강좌 후기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읽기 세미나 후기

작성자
박주영
작성일
2018-07-26 21:50
조회
131
  스피노자는 작년 철학하는 월요일의 진태원 선생님 강의 등을 통해 몇 번 접하였지만, 스피노자 관련 세미나, 글쓰기 등 제가 직접 부딪혀서, 적극적으로 만나지 않아서 그런지 개념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스피노자를 이해하기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작년에 스피노자의 동물우화도 읽었는데 다시 보니 언제 이 책을 읽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역시 책을 누구랑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네요.


  스피노자는 동물우화를 쓴 적이 없지만,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동물, 특히 곤충의 예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도 거미, 개, 벌레, 물고기, 사자, 염소 등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해요. 채운샘은 스피노자의 사유의 특징 중의 하나로 ‘비인간’을 언급하셨는데, 책을 읽을 때 이를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신 등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위주로 사유를 하게 되는데, 이 책과 세미나가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이번 주에는 1장 거미, 2장 두 마리의 개, 3장 인간, 당나귀, 코끼리, 4장 핏속의 벌레까지 다뤘습니다. 1장에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량’개념이 나옵니다. 데카르트는 ‘더 나은 일, 즉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더 못한 일도 할 수 있다.’라는 속담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이용했다면, 스피노자는 ‘어떤 것을 쉽다고 어떤 것을 어렵다고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원인이 서로 다르다면, 동일한 시간 안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것도 쉬운 것이면서 동시에 어려운 것일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의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각자의 본성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이죠. 인간은 거미를 쉽게 눌러 죽일 수 있지만, 거미만큼 쉽게 거미줄을 짤 수는 없습니다. 역량을 단일한 척도로 비교하고 측정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거미의 고유한 역량을 강조하는데, 거미로 있음과 거미가 뭔가를 할 수 있음이 따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즉 거미의 역량은 실존 자체인 것입니다. 거미로 있음은 곧 거미줄을 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역량’을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 가능적인 것으로 여기고, 등수, 점수 등 단일한 척도로 평가하는 것에 익숙하죠. 그렇기에 ‘나는 공부를 많이 하면 시험을 통과했을 텐데, 내가 그 때 잠을 많이 잤기 때문에 시험 점수가 낮은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내 능력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죠. 그리고 시험을 통과한 자는 시험성적이 낮은 자에 비해 여러 방면으로 우월하다고 봅니다. 지성을 시험이라는 단일한 척도로 평가하여 점수로 위계화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존 자체가 역량이므로 내가 행위한 것, 내가 말한 것, 내가 쓴 것 자체가 내 역량입니다. 내가 부여받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잠재적 역량이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진리가 주어져 있지 않듯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진리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는 도달해야 할 목적, 진리가 있다고 사유했기 때문에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을 중요시 했고 그의 저서 제목인 ‘방법서설’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진리와 이에 도달하는 방법이 어딘가에 주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사유과정과 진리가, 결과와 과정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방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했는데, 힘들게 쇠를 벼리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능숙한 대장장이도, 망치도, 모루도, 그리고 다른 도구들도 만들어진다고 봤습니다. 즉 모든 것은 어려운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는 쉬운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공부에 이상적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하면 되고, 내 가 한 만큼, 즉 내 역량만큼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1장에서 ‘어떤 사물의 본성에 더 큰 실재성이 귀속할수록, 그 사물은 실존하기 위한 스스로의 힘을 더 많이 갖는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실재성이란 많은 타자를 내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변이능력을 의미합니다. 즉 타자와의 접속력이 강해지면 내 역량이 커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갇히고, 낯선 것을 회피하면 할수록 나의 실재성과 역량은 떨어집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중요한데, 내 역량이 증가할 때 나는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는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자들과는 편안한 관계를 지속하려 하고 낯선 타자와의 관계는 불편하기에 피하려고 하는데, 이는 내 역량을 감소시켜 나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낯설다고 피한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를 공부함으로써 그를 넘어갔습니다. 내가 불편한 타자를 만났을 때 피하고 싶은 것은, 나를 바꾸고 싶지 않고 나의 습을 편하게 유지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한 변화는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 무생물 등 내가 마주치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접속하여 변이할 수 있다면 내 역량은 더욱 확대될 것입니다.


  2~4장은 ‘신’에 대한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신은 물론 자연에 대한 표상을 갖고 있기에 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자연)은 외부에 원인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즉 자기원인을 갖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며, 변이하는 개체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세계 밖에 있는 전능한 신에 대해 익숙합니다. 이러한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 상상한 산물로 신의 역량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권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는 꼴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의 전능성은 무한한 것이기에 자신의 뒤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남김없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우리는 생산에 대해 자꾸 무엇을 만들어내는 플러스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이 생산은 해체하고 파괴하고 없애는 마이너스 측면도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므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신의 지성과 우리의 지성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지성은 무한한 지성의 한부분일 뿐입니다. 여전히 스피노자의 신은 추상적으로 다가오지만,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신의 역량이며 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따른 정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잊지 못하고 부정하며, 내가 그 때 어떤 행동을 했더라면 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망상을 지속하는 것 같습니다.


  4장의 제목은 핏속의 벌레인데, 인간은 피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핏속의 벌레와 같다는 것입니다. 핏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벌레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주의 특정한 부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듯이 이 벌레는 핏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피의 각 부분을 하나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부분들 모두가 피의 본성의 지배하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그러한 피의 보편적 본성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모든 부분들이 서로 조응하도록 강제되어 특정한 관계에 따라 서로 합치하는 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전체가 자신의 역량을 부분들에 강제하는지, 즉 어떤 식으로 전체가 부분들을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에 종속시키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저에게는 너무 추상적으로 다가오네요. 우리가 생각하는 드넓은 우주,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들 등 모두 전체 안에 있는 하나의 부분일 뿐이고, 자연이며 전체인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부분들은 변이들을 무한히 겪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우리는 인과관계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습니다. 내 감각과 인식의 한계 속에서 익숙한 사유방식으로 생각하기에 어찌보면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기존의 사유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사용하지 않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삶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체와 정신에 모두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에 나의 지평을 확대하려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전체 2

  • 2018-08-03 20:04
    행위역량이 존재역량이라고 저는 쉽게 쉽게 말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기가 참 힘든 것 같네여...
    늘 가능성을 상정하고 저기에 할 수 있는 나, 하지 않을 수 있는 나, 다른 경우를 상상하니까 이런저런 감정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내 역량만큼이 내 존재고, 내 존재는 내 역량만큼이라는 것. 계속해서 환기하고 환기해야겠어요!

  • 2018-07-27 19:04
    동물우화, 술술 읽혔지만 토론하고 보니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죠ㅋ 읽을 땐 이해했던거 같은데 같이 이야기해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듯 ㅎㅎ 이해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접속할 수 있는 지평이 넓어지고, 접속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게 바로 자유라는데.. 아 자유롭기 너무 어려버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