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세미나『스피노자의 동물우화』1주차 후기-지은팀

작성자
김현정
작성일
2018-07-25 20:51
조회
156
세미나『스피노자의 동물우화』1주차 후기-지은팀

『스피노자의 동물우화』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피노자의 철학에 접근합니다. 스피노자는 동물과 인간의 위계를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이는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스피노자적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5주에 걸친, 이 번 세미나의 목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란 주체성을 떠나기, 그리하여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야의 확보입니다. 그러니만큼 이 책을 충실히 따라가며, 가장 인간답지 않은 곤충 등의 비인간에 빙의해보라고 채운샘은 권유하셨지요?

세미나는 두 팀-지은팀 & 민호팀-으로 구성되어 ‘조별 토론’을 거친 후, 의문점과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채운샘의 정리’로 이어졌습니다. 각 팀이 다룬 토의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지은팀>

본성이 무엇이며, 그 본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신은 범신론과 어떻게 다른가?

데카르트의 신과 스피노자의 신은 자유의지의 유무로 차별화될 뿐인가?

스피노자는 신이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 왜 그 전체를 지성이라고 하나?

<민호팀>

원인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의 원인은 전체라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협소한 인과의 원인, 그래서 어떤 감정을 수반하여 그 감정에 예속시키는 원인과 다른 듯하다.

신인동형론을 파기하며 신의 지성과 인간의 지성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일 뿐, 그 지성은 동일하다고 했는데, 이 점이 조금 애매하게 다가온다.

사물의 본성에 더 큰 실재성이 귀속한다는 말에서 귀속한다는 말은 구속하고 갇혀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물의 본성은 신에게서 찾을게 아니라, 내재해 있으므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찾아가야하는 것인가?

이에 채운샘은 ‘역량’과 ‘신’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셨습니다. 이 책도 데카르트가 공리로 삼은 속담, <더 나은 일, 즉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더 못한 일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비판하며, ‘역량’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채운 샘의 강의를 요약, 정리해봅니다.

모든 역량은 현행적이다.

데카르트는 어려운 걸 하는 사람은 쉬운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학을 나온 지식인은 농부가 하는 농사일은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일류대를 나온 사람은 다른 것도 모두 잘할 거라는 학벌주의 같이 말이죠. 이렇게 우리는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의 위계를 나눠놓고 어려운 것을 하면 쉬운 것도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원소기호를 외워 복잡한 화학식을 이해하는 사람도 밭에서 풀포기 이름 하나 모를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농부는 화학식을 몰라도 잡초를 구별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농부의 역량이며, 이 역량은 농부라는 실존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잡초를 구별해낼 줄 모르지만, 복잡한 화학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카데미의 박사라는 실존에서 나온 것일 뿐이죠. 이렇듯 역량, 즉 누군가가 자기고 있는 힘은 실존과 분리되지 않으며 실존을 통해 현행적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본질을 부여받은 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받은 여러 특징-언어사용, 노동능력, 사회를 구성하는 경향 등-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는 ‘본질주의’로, 우리 속에 가능적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어떤 힘이 저장되어 있지만, 안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싸우다가 ‘너 내가 죽여 놓을 수 있는데 참는다’고 말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죽일 수 있는데, 안 죽이는 것처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처럼. 이는 역량을 가능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먹이 세다는 것은 말로 거들먹거려서 아는 게 아니라, 때려봐야 알고 맞아봐야 하는 것이죠.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클레의 그림을 보면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펜을 들어 백지에 선 하나를 그어봐야 그릴 수 있는지를 알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의 역량은 그때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역량은 실존의 현실적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중요해집니다.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게 되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실존입니다. 먹고 배설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등, 생산하고 있는 것이 실존이며,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부정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하고 있음을 통해서 존재함!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며, 존재를 역량이란 관점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실존이 행위이며 행위역량이 곧 실존역량인 이상, 이제 존재를 관념으로 퉁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바로 이 실존을 통해 드러나는 현행적 힘, ‘역량’은 기존의 철학과 차별화되는 스피노자철학의 실천적이며 혁명적인 개념입니다.

각각의 역량은 공통의 척도가 없다.

이렇듯 역량은 실존과 분리되지 않는 현행적 힘이라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농부보다 박사가 더 우월해보이고, 화학식을 아는 것이 풀포기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려워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단일한 척도를 가지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반 일리치가 학교화를 비판하는 것도 근대화된 학교 교육이 하나의 척도로 모든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고, 교육단계를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수량화시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한 교실에 있는 학생 중에도 역사를 잘 아는 아이가 과학은 잘 모르기도 하고, 수학은 잘하지만 국어는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똑같이 더 어렵고, 똑같이 더 쉬운 과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잘 안다고 해서 더 우월한 학생이라고 할 수 없으며, 수학을 못한다고 해서 열등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데카르트를 포함한 기존의 철학자들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이 됩니다. 이럴 때는 ‘그럼 어떻게 목적인 진리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방법이 중요해집니다. 데카르트도 방법을 중시하여 채택한 사유가 ‘방법적 회의’이며, 어떤 회의를 거쳐서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저술한 책이 ‘방법서설’이랍니다. 이런 데카르트적인 방법에는 그것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이상적인가?’라는 척도가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척도에 따라 위계가 나눠지고 우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방법이 따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방이 돌투성이인 지역에서 만들어내는 도구와 사방이 쇠붙이인 곳에서 사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도구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도끼를 만들어낸 사람보다 칼을 만들어 낸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스피노자에게 진리는 사유의 과정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유의 과정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정확하고 이상적인 방법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란 사유의 과정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돌도끼라는 형상이 우선적으로 우리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돌도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돌도끼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이리저리 돌도끼를 만드는 과정과 돌도끼가 탄생하는 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이상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각자의 다른 지능, 조건으로 각자의 방법으로 힘들게 벼리는 방법만 있을 뿐이랍니다. 이것이 역량입니다.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서 더 빨리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똑똑하다는 생각. 어려운 수학문제를 더 빨리 푸는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 이것은 척도가 있을 때 적용되는 역량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 다르기 때문에 더디게 가도 하나하나 이해해서 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도 걷기까지 수천 번의 부딪히는 과정이 있죠. 벼리는 모든 과정은 똑같이 어렵습니다. 쉬운 단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단계는 똑같이 다 어렵습니다. 그 모든 단계의 어려움이 새롭게 어려울 뿐입니다. 이렇듯 스피노자에게는 과정과 결과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유의 과정 속에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도달해야하는 그 무엇이 진리가 아닌 것이죠. 그래서 책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적인 방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마라. 힘들게 쇠를 벼리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능숙한 대장장이도, 망치도, 모루도 그리고 다른 도구들도 만들어지는 것이다.’(p16)

우리는 현대기술로도 거미줄을 거미처럼 자을 수 없다고 합니다. 거미가 인간보다 열등하고 더 쉬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잣는 것으로 실존하고, 인간은 인간이 하는 방식으로 실존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이 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함으로써 실존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 안에는 완전한 것(우등한 것)과 불완전한 것(열등한 것)의 위계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완전히 반대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맨 위에 신, 자신을 닮은 인간, 그 다음은 동물, 맨 아래는 식물의 피라미드 모양의 존재의 사슬을 그러낸 바 있답니다.그러나 존재의 사슬은 스피노자의 우주에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서는 하나의 척도에 따라 구별되는 선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성과 맞지 않는 것이 악이며, 실존과 역량을 분리하는 것이 악이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역량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기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본성이란 무엇일까요?

한 개체의 본성은 바로 그 개체의 역량이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라고 우리가 묻는 것은 본성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주어진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악(性惡)이냐? 성선(性善)이냐? 라는 질문도 우리의 본성이 보편적 악으로 주어졌느냐? 보편적 선으로 주어졌느냐? 라는 물음인거죠.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는 본성을 자꾸 ‘보편적인 그 무엇’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성은 이런 질문을 통해서 탐구한다고 아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본성이 원래 ‘보편적인 그 무엇’으로 주어져 있어서 그 본성에 맞는 일이 따로 있고, 그런 일을 찾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어떤 사물의 본성에 더 큰 실재성이 귀속할수록, 그 사물은 실존하기 위한 스스로의 힘을 더 많이 갖는다.’(16쪽, 채운샘은 이 말을 조건부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고 말합니다. 여기서 ‘본성에 더 큰 실재성이 귀속한다’는 구절은 본성과 실재성이 따로 있어서 항아리에 구슬 넣듯이 본성에 실재성을 집어넣는 문제가 아니랍니다. 본성이 실재한다는 것, 즉 ‘본성이 있다’는 것은 ‘실존하기 위한 스스로의 힘’ , ‘실존을 통해 표현되는 역량’에 달려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행위역량을 통해서 내 실존의 힘이 커지고 있다면, 그것이 내 본성이 됩니다. 하면 할수록 힘들고 지치면서 역량이 줄어든다면 내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며, 신나서 힘이 솟는다면 그것은 내 본성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본성을 알 수 있으려면 행위를 통해 역량을 발휘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죠. 이렇듯 본성과 역량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성을 모른 채, 자꾸 무엇이냐고 묻는 까닭은 선악(善惡) 오호(惡好) 등의 가치평가 규준을 우리 밖에 설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익을 낳느냐? 않느냐? 입력과 출력이 일치하느냐? 안하느냐? 이런 자본주의적 척도로 끊임없이 마음을 수량화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1+1=2의 세계는 화폐계산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적용됩니다. 은연중에 자식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생각, 무엇을 얻고자 연인에게 이런 정성을 다하고 있을까? 라는 반문 등은 자본주의적 가치기준이 뿌리 깊게 작동한 결과, 우리에게 나타나는 심적 메커니즘입니다. 이는 관성의 법칙이 우리 정신과 마음에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어릴 때부터 받는 교육과 미디어에 대한 무의식적 노출 등으로 자본주의적 구조가 한번 세팅이 되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지속적으로 우리의 사유방식을 규정하며 좀처럼 끊어내기 힘들게 됩니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내가 줘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연은 어떠할까요? 자연에서도 어떤 것을 입력하면 고스란히 그대로 출력이 될까요? 우리가 우리의 본성에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우리가 만든 가치기준에 모든 것이 다 부합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가치규준들, 인간의 기대를 투영해 만들어낸 한시적인 척도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가치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 자기가 생산한 것을 평가하지 말고, 자연법칙을 이해하면 본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부분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국한된 인과 속에서 우리가 겪은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것들은 대상에 대한 편협한 관념과 나의 편협한 경험으로 구성한 인과관계입니다. 그런 부분에 국한된 편협한 인과를 벗어나려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본성이 더 많은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은 더 많은 변이의 역량을 가진다는 말이니까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건을 이해하는 범위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원한, 분노 등으로 반응하는 즉각적인 감정도 내가 사건을 협소하게 이해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크게 이해해 보면, 그런 정념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예속하는가를 이해하게 되면, 맞서 싸워야하는 지점을 알게 되고, 억울함 없이 평정심을 갖고 평정심을 갖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스피노자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역량을 어떻게 더 크게 만들 것인가? 우리 스스로 역량이 증가된 상태, 즉 기쁨으로 충만하면서, 우리를 제약하는 이 세계와 타자들과 함께 교통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윤리학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 역량의 문제로 귀결되지요. 다음으로는 신 얘기가 나옵니다. 이제 신에 대해 알아봅니다.

신=자연=전체

인간은 자기의 신체적 정신적 조건하에서 자기와 비슷한 존재(신인동형)를 상상합니다. 그런 후, 인간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하여 전지전능한 신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신(神)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바깥에 그 어떤 것도 원인으로 갖지 않습니다. 자기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신인 것이죠. 그러나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외부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자연세계를 창조하되, 자연법칙 밖에서 스스로 있는 자로 가정됩니다. 그리고 중세철학자들이나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신의 존재를 증명하여 실재함을 보여주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이런 신의 존재는 논증 불가능합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자연 안에 있는 것들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신은 우리 세계밖에 존재한다고 하면서 신에 대해 논증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 세계밖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상상일 뿐이다. 결국 신도 인간의 관념으로 만든 상상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상상을 제거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역동적인 변이의 장(場)이 남습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런 변이의 장(場)이 신이며, 신은 곧 전체 자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신(神)은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축복하고 벌을 내리는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변이하는 개체들의 전체가 신인 것이죠. 이렇게 자연 전체, 전체로서의 자연이 신이라면 스피노자의 신은 범신론일까요?

스피노자의 신≠범신론

철학사적으로 보면 일원론과 다원론, 혹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립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그 근본적 지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있는 것이 하나인 것이 일원론 혹은 절대주의라면, 있는 것이 여러 개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원론 혹은 상대주의입니다. 이들과 완전히 달라지려면 무언가가 ‘있다’는 그 전제를 깨야합니다. 니체의 관점주의가 그런 경우입니다. 관점주의는 관점에 따라서 진리가 여러 개라는 말이 아닙니다. 관점주의는 진리가 하나든 여러 개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있냐? 없냐?’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무엇에 의해서 진리가 만들어지는가?’를 질문합니다. 스피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신론은 신이 여기저기 다 있다는 주장입니다. 꽃에도 나무에도 곤충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 신이란 얘깁니다.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식 해석이 바로 범신론입니다. 헤겔에게 신은 어떤 신비한 존재로서, 여기저기서 드러납니다. 이 또한 신은 ‘있다’를 전제하고 있죠.

그러나 스피노자는 판을 달리합니다. 그는 신이 그렇게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고정불변하며 영원불멸하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에게 세계는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고체적 상태가 아닌, 액체나 기체적 상태로 끊임없이 변이하는 자연입니다. 합성과 해체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면서, 생성, 소멸 변화하며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이하고 있는 장(場)인 것이죠. 바로 이런 자연세계 전체가 바로 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 즉 자연 안에 있는 것이니까요.

부분과 전체= 조각과 조각보의 관계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습니다. 어떤 규칙이 적용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이하는 자연을 벗어난 개체들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동시에 그런 개체들을 벗어나서 신이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전체를 벗어나서 개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체를 벗어나서 전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보통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체가 부분보다 항상 우월해집니다. 그러나 이게 아닙니다. 부분들이 계속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이하고 있을 때마다 그 모습이 계속 달라지는 전체입니다. 그런 개체들이 아니면 전체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전체입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조각보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조각들을 어떻게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조각보가 다르게 생성됩니다. 조각하나하나가 조각보 전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각이란 개체의 생산과 더불어 조각보라는 전체도 생산되는 것이죠. 이렇듯 조각과 조각보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전체와 부분도 분리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를 통해 자유를 발명하라

이렇게 신이란 끊임없이 변이하는 개체들의 관계 전체입니다. 자연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신의 생산물입니다. 신은 개체를 생산하는 것으로써 자기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성, 변이가 무한하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신의 역량입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역량은 무한합니다. 그러므로 자연 안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진, 돌연변이, 이상기후조차도 다 자연법칙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거기에서 신을 상상할 테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인간을 가장 약하게 만드는 정서입니다. 슬픔도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자기 정념에 예속된 상태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모든 개체는 모든 것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어떤 개체도 몇 가지 요인에 의해서 존재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님도 상한 죽을 먹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덥기도 하고, 몸이 약해져 있기도 했던 거죠. 너무나 많은 요인에 의해서 죽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상한 죽을 가져다 준 자를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다죠? 그것은 붓다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법칙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도 어떤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이해하라고 합니다. 그 원인이란 자연의 법칙을 말합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 얼마나 많은 인과관계로부터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라는 거죠. 가령, 사람들을 슬픔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과 억압 등에 저항할 때,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고 저항하면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발명하면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기술, 인간욕망의 메커니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가 인간욕망을 어떻게 길들이는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나면 원한, 슬픔에 빠지지 않으면서 싸울 수 있답니다.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 안에 있습니다. 인간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면 심지어 신적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답니다. 깨달은 자, 통하는 자, 성인의 경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네요. 이해하는 만큼 내가 더 많이 변이할 수 있고, 그런 만큼 또 더 많은 타자성과 교통할 수 있고, 더 큰 역량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나를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거죠. 나에게 아주 많은 적대적인 힘들 속에서, 나와 너무나 다른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속에서 타자들과 함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자만이 자유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들과 어떻게 교통할 것인가? 그 세계 속에서 어떻게 다른 관계들을 발명해 낼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두 개의 질문>

以上과 같은 채운샘의 강의 후에는 책 구절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16쪽의 ‘작품의 고유한 역량’에 관한 질문 & 30쪽의 ‘이 전체 개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한 질문이었죠?

먼저 ‘작품의 고유한 역량’에 대해서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죠. 교사의 앎과 의도가 고스란히 학생에게 전달될 수 없듯이, 작가의 계획과 의도가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되지는 않는다고요. 결국 교사와 학생처럼 작가와 작품도 상호능동성의 관계 속에서 작가의 역량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양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작품도 만들어진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작품의 역량은 작가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감동하는 관객에 의해 만들어진답니다.

그리고 ‘전체 개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전체 개체, 즉 전체로서의 자연세계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이 시사하듯 계속 새로운 것이 더해지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만약 전체가 계속 변한다고 하면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하는 다른 존재, 자연 밖의 존재를 또다시 요청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의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로의 창조적 새로움이 아니라, 변이하는 것으로써의 새로움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새로움은 없던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관계들을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생겨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만나는 사람 등에 변화를 주는 것이죠. 그리고 신의 무한성이란 바로 이런 변이의 무한성을 의미하며, 신의 영원성이란 순간의 지속이나 타임리스timeless가 아니라, 변이가 멈추거나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항상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후기가 생각보다 길어져 개인적 소회는 생략할까 했습니다. ^^; 그런데 강의를 정리하며 후기를 쓰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실존과 본성과 역량의 관계'입니다.
현행적인 역량은 지금의 실존을 통해 드러나고, 본성은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실존적 힘, 역량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나아가 '한 개체의 본성이 바로 그 개체의 역량'(40쪽)이라면, '본성이 곧 실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본성과 실존 그리고 역량을 구별하지 않은 채, 본성=역량=실존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유인, 즉 깨달은 자' vs '노예 혹은 깨닫지 못한 자'의 실존과 역량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인과 노예 그리고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그 본성이 다르다고 봐야할까요?
흠...1주차부터 헤매는 느낌이 듭니다. 저만 이럴까요?^^;


여튼 다음 주는 휴강하고, 세미나-강좌는 8월에 연속하여 이어집니다.

진도분량은 1주차(4장), 2주차(~10장), 3주차(~16장), 4주차(~24장), 5주차(~30장)입니다.
전체 4

  • 2018-07-27 18:44
    흐아 현정샘 이렇게 정성스러운 후기를 써주시다니..! 밑줄 치며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는 자신의 본성을 알고 행위하는 자와 인위적 가치규준에 얽매여 자기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아닐까요? 모든 이에게 공통되는 보편적 본성이 있는게 아니라 지금의 조건 위에서 조건을 도약대로 삼는지, 억압으로 느끼는지에 따라 달라지는게 아닌가 싶어요. 암튼 샘 덕분에 복습 지대로 하고 갑니다. 감사용~

    • 2018-07-28 01:09
      의도치않게 후기가 길어졌는데, 좋게 봐주시고 또 질문에 대한 생각도 나눠 주시니 이리 고마울 수가~♥
      음....지은샘 말씀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싸르트르의 말처럼, 보편적 본성이 실존에 앞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지요? ^^
      그렇다면 '본질은 실존하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성질의 것'이라면, 즉 '실존의 행위역량에 의해 드러나 결정되는 것'이라면...자유인과 노예,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물론이고, 우리는 각자 그 본성이 다 다르다고 봐야하나 싶어서요~^^;
      일단, 다음 시간 질문으로 keep해 둘께요~^.~

  • 2018-08-03 22:11
    오오,, 읽으면서 지난시간 내용들을 다시 삭삭 떠올리게 됐어요!
    정성껏 적어주신 후기 빠져서 잘 읽었습니다~
    "한 개체의 본성은 바로 그 개체의 역량이다." 개체 내에서도 역량이 변하면 본성도 변하는 것이냐는 질문인 것 맞지요?
    저도 샘과 같은 상태가 된 것 같네요.. 역량이라는 말을 실존이나 행위랑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
    역량은 과연 확장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실존은 변한다고 할 수 있을지...
    본성=역량=실존으로 이해해버리면 본성은 한 개체에게서도 가변적인 것이 되는데 잘 모르겠네요ㅜㅜ
    단어를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가져다 쓰고 있었던 제가 반성이 되네요.

    • 2018-08-04 11:44
      빙고!...제 질문을 훨씬 더 구체화시켜 주셨군요. 이리 얘길 나누다보니 질문도 훨씬 깊어지고 풍부해졌어요. 좀 있다가 연구실에서는 또 어떤 얘기들이 오갈지 기대됩니다. 그럼 나중에 반갑게 봐요~~^.~

      아~ 그리고 저는 이렇게 이해해봤답니다.
      '본질'은 '어떤 것(사물이나 개체)을 바로 그것(사물이나 개체)으로 존재하게 하고, 만약 없다면 그것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테고....'역량'은 '어떤 것(사물이나 개체)를 바로 그것(사물이나 개체)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 그래서 본질은 역량을 통해 실재하게 되구요.
      '실존'은 '존재하고 있는 지금 현실적 상태나 모습'일텐데....'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 섞여있는 상태'가 아닐까 하구요. 왜냐하면 우리가 신(전체)이 아닌, 신의 일부 즉 전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의 관계할 수 밖에 없고...그래서 우리안에서 우리이게끔 하는 본성과 그 본성을 드러내는 힘(역량)으로만 실존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받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구요....그렇게 해서 역량(본질을 실재하게 하는 힘)이 많으면 우리가 온전히 우리일 수 있기 때문에(즉 본성대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역량이 작아지면 우리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기때문에(본성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지는구나 하구요.

      따라서 역량이 변하면 실존은 달라지지만, 본성은 그대로인데, 다만 본성이 실재하는 정도, 본성이 구체적 현실에서 드러나는 정도가 변하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담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