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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추수'.편 후기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7-09-26 22:00
조회
173

‘추수’ 편을 읽고 어머무시한 감동과 희열을 느껴 잠조차 설쳤다고 하는 초료(鷦鷯, 에디뜨 피아프^^) 선생을 향한 채운 샘의 가차없는 비아냥(?^^)에 저도 살짝 동참을 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저 또한 비슷한 흥분을 경험했다는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 우물안-강줄기-바다로 이어지는 공간의 확장이 시야나 퍼스펙티브의 광활한 열림을 경험할 수 있게 했던 거 같고, ‘소요유’나 ‘제물론’의 엑기스들을 구체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데서는, 어떤 입문자가 제게 <장자>가 어떤 책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냉큼 ‘추수’편을 보라고 얘기해 줄 수 있겠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게다, 말 그대로 장자풍의 근사한 장부의 모습까지 부록처럼 달려 있으니 더할 나위 없지 않은지~~.


허나, 문제는 늘 감동받고 흥분하고 마는 데서 그친다는 것. 지난주엔가 채운 샘께서, 철학이 어려운 이유가 그 사유나 사상들이 내 삶의 과정 속으로 확 들어오지 않아서, 체화, 체득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어쨌든 지식이나 언어로 잡아두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비근하고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늘 또 그런 생각만 해보게 되지만~~ㅠ). 이번에 공통 과제를 쓰면서 또 느꼈던 게, 그러자면 그 철학들을 지금 여기의 나의 말과 글로 풀어내고 옮겨적는 것밖에는 달리 뾰족한 뭐가 없다는 사실. 하여, 그게 온전히 내 생각과 마음이 되고, 내 낯빛과 눈빛, 행동과 처신으로 자리잡을 때까지, 그렇게 언어를 붙들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으, 어렵고 또 어렵네요, 공부의 길.


저희 조 논의 중 해석이 엇갈렸을 뿐더러 의미 파악조차 어렵다고 했던, 장자와 혜시의 대화에 대한 얘기로 강의가 시작되었네요. 물고기가 되었건 인간이 되었건 타자의 생각에 대해 뭐라 섣불리 얘기할 수 없는 건 지당하고, 또 그러지 않는 게 윤리적으로도 타당한 태도가 아니냐, 농담 비슷한 말 한 마디로 대화를 끊어 버리고 그 이후를 알려주지 않는 건 뭔가 혜자에게 불공평한 일 아니냐는 게 짧은 제 소견이었지요. 물론, 장자의 마지막 말이 갖는 깊은 의미 갗은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요.


채운 샘께서는, 혜자나 공손룡 같은 명가는, 흐름 가운데 있는 세계를 언어를 통해 고정시켜 구조화하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요새로 치면 언어논리학자들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물고기도 아닌 주제에 물고기의 마음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는 혜자의 질문에는 인식의 당사자, 즉 주체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의 인식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동일자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고 하셨네요. 이에 비해, ‘지금 여기 물가에서 알았지’라는 장자의 조롱 섞인 일갈에는,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대상의 현존성과 흐름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의 유동성을 고착된 무언가로 붙잡아 두려는 일체의 언어 논리적 기획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 짧은 에피소드는 인간 주체로 환원되는 차원의 앎을 부정하면서도 또다른 차원의 앎(大知)을 말하고, 언어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다른 차원의 언어(치언)를 말했던 장자의 독특한 언어 및 지식에 대한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불교의 선문답이 또 그런 전략을 구사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면, 채움샘의 말마따나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장자식 인식론의 멋진 마무리로도 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장자 사유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겠다는 것을 또 다들 절감하지 않았나 싶네요.


대저 사물의 수량에는 끝이 없고, 시간의 흐름은 멈춤이 없으며, 각기 사물의 운명도 차례로 변화하여 일정함이 없고, 처음과 끝은 되풀이 되어 집착이 없소.


이러하니까 참된 지혜를 터득한 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다 관찰하오. 그러므로 작다고 깔보지 않고 크다고 뛰어나다 하지 않소. 그것은 사물의 수량이 한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또 그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밝히오. 그래서 오랜 옛일이라 해서 무관심하게 어둡지 않고 가까운 요즘의 일이라 해서 허둥지둥 애쓰지도 않소. 시간의 흐름은 멈추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또 그는 가득 차고 텅 비는 것을 관찰하오. 그러므로 무엇을 얻었다고 기뻐하지 않고 잃었다고 울적해하지도 않소. 각기 사물의 운명이 일정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또 그는 도가 평등하다는 것을 밝히오. 그래서 살아 있음을 새삼 기뻐하지 않고 죽는 것을 역겨워하지도 않소. 처음과 끝이 되풀이 되어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오. - ‘추수’편 중, 안동림 번역 (夫物,量无窮,時无止,分无常,終始无故.是故大知觀於遠近,故小而不寡,大而不多, 知量无窮, 證향今故,故遙而不悶,철而不기. 知時无止.,察乎盈虛,故得而不喜,失而不憂,知分之无常也,明乎坦塗,故生而不說,死而不禍,知終始之不可故也.)


채운 샘의 강의를 듣고 다시 들춰보았는데, 정말이지 장자 사유의 전체 맥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혜원이 앞서 정리한 것처럼, 命과 時의 문제서부터 生死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장자의 세계관과 동양적 사유의 특징 및 그에 따른 삶의 태도나 윤리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 그에게 궁극적인 앎이란, 이 세계와 대상을 고정시키는 논리적 틀이나 언어적 전제들을 깨고 벗어나는 차원의 앎일 수밖에 없는 거고, ‘너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알라(知爾醜)’는 것도 그런 고정된 차원의 한정된 인식에서 벗어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닐 것일 테고요. 존재론과 윤리론, 인식론이 구별하기 힘든 채로 얽혀 있는 철학이라는 평가에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거 같습니다.


觀於遠近.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두루 관찰한다는 것. 전 이번에 이 말이 되게 와 닿았는데, 채운 샘께서는 이를, 추상과 구체, 원리와 현실, 체와 용의 관계를 갖고 설명해 주셨더랬죠. 동양적 사유에선 언제나 이 둘이 떨어져 있지 않을 뿐더러 전자들은 후자들을 통해서만 펼쳐지고 작용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오갈 수 있어야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요. 언제나 둘을 대립 관계로 보고 사이에 벽을 치거나, 비근한 것을 전체적인 원리 차원에서 보지 못해 당장의 쾌와 불쾌로 심한 감정의 진폭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랍니다. 닥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 또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전체의 원리를 추상화해 내지 못하고 오로지 당장 자신의 인간적인 인과 속에서만 세상을 재단하려 들기 때문일 테고요.


이 비근한 개체의 생을 ‘도’라고 하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볼 수 있는 직관력 같은 것을 장자가 말하는 ‘大知’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샘께서는 이에 도달하는 게 드물지만 불가능한 일만을 아닐 거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죠. 그러자면, 무엇보다 ‘達於理’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자기 인식을 지평을 뚫어나가려고 노력할 것!!! 그 정도는 되야, 작은 문제 하나라도 해결하지 그렇지 않음 늘 요 모양 고 꼬라지로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다가 가게 될 것이라고. (꺄악~~무섭지 않나요?~~ㅇㅎㅎ)


아, 그리고 공자께서 광 땅에서 위난을 겪었을 때 보여준 태도 또한 울림이 장난 아니었죠. 송의 군인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과 시세를 분명히 알고 담담하고도 의연히 맞이하는 공자의 그 모습은 분명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 한술 더 떠 채운 샘은, 여기서 미학적 태도를 이끌어 내고 그 태도 자체가 갖는 윤리성에 대해 말씀해 주셨죠. 그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중요하다는 건데, 공자의 이 모습은 윤리가 결국은 미학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좀 놀라웠슴다. 흘러가고 또 오는 시간 속에서 그 어떤 척도에도 기대지 않고 매번 자신을 던져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것이 불러올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책임질 줄 아는 자는 과연 그 태도의 아름다움으로 또 한번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공부할 거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참, 18~9세기 조선의 문학예술론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천기(天機)’도, 잘 잡히지 않아 정리는 못했는데, 비슷한 듯 다른 여러 개념들의 독자성을 잘 살려내야 장자를 좀 더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앞으로 눈여겨 봐야 할 개념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남은 시간 열공하시고, 토요일에 즐거운 얼굴로 뵈옵기를 바라옵네다. 쿤우를 응원하며~~!!!

전체 2

  • 2017-09-27 18:06
    느낀 바가 많았던 [추수]편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다 절정은 원리에 통달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작은 문제의 해결도 요원하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강의였지요...ㅇ0ㅇ

  • 2017-09-28 07:31
    이제부터 초료라고 해야겠군요. 뱁새를 한자로 옮기니 발음이 거시기하게 이뻐요.. 저야 하두 오바를 많이해서 그랬는데 '추수'가 감동이었다니 저만 그런게 아니었어요(안심이라니 이뭐꼬).
    그나저나 여기서 좋다가 끝난다는거, 단지 장자를 읽고 말리라 는 생각때문인 듯요. 저도 이치를 깨닫겠다는 각오 없이 공부하면 내 문제하나 풀지못할거라는 쌤 말씀이 가장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