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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0-02 17:21
조회
140
171014 동사서독 공지



1. 즐거움

[至樂]편은 제목과 달리 즐거움이 얼마나 고통인지를 말하고 있지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ㅎㅎ 즐거움은 고통의 시작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즐거움은 곧 사라질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잊지 못해 붙들어 두려고 해서 고통이 시작되기 때문이죠. 인간은 무상함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통이 닥쳤을 때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믿고 싶고 즐거움을 만났을 때는 무상하지 않다고 믿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무상하다’고 단순히 아는 것으로는 이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장자는 즐거움이 근심이 되는 것을 너무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부자들은 버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을 모두 소진해버리고 쌓아놓은 것을 미쳐 다 써보지도 못하지요. 딱 “즐거움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며 평생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은 전제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바꿔보겠다며 불가능한 일에 달려들고요.

그럼 우리는 어느 때 즐거움을 느낄까요. 채운쌤은 바로 미래에 투영하는 기대치대로 된다고 생각할 때라고 하셨는데요, ‘내 생각대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즐거움을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흐름대로 되는 국면 중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나름대로 세운 의식의 질서를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때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됩니다. 즐거움의 지극함은 이와는 달리 우주의 법칙이란 내 기대와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기대대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요.

만약 순간에 대한 즐거움에 집착하게 되면 근심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억지로 하는 일’, 有爲입니다. 즉 즐거움은 자연의 無爲와도 연결됩니다. 자연은 기대가 없으므로 고통이나 즐거움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죠. 저희 조는 또 無爲를 가지고 한바탕 이게 무엇이냐를 가지고 토론 했었는데, 무위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겪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들었습니다. 분명 아는 이야기인데 다시 무위를 이야기하면 자꾸만 ‘무위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만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위’를 일종의 좋은 상태, 유토피아처럼 상정하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억지로 하려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2. 죽음

우리가 즐거움 때문에 근심하는 이유는 결국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거나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앞날은 빤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으며 언제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요것만 알면 되거든요. 하지만 이 ‘모른다’를 견디지 못하고 인간은 늘 예측하고 기대하고 흘러가는 일을 붙잡아 예측에 맞추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긴 알아도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끝’이라고만 생각하며 두려움을 투영하고 반대로 삶에는 ‘즐거움’만을 투영해서 지속시키려고 하는 꼴입니다.

<장자>에서 생사는 구분이 없다고 합니다. [지락]편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중 하나는 팔에 버드나무가 돋아난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죽음이란 사실 化, 그러니까 ‘끝’이 아니라 다른 이질적인 것이 되는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生을 긍정하는 것은 결국 이런 이질적인 것이 내 몸에서 돋아나는 化 즉 죽음을 긍정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변화를 원하는 한편 영원 또한 원하기에 삶을 완전히 긍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채운쌤께서 인용하신 <어서와. 잘 가> 이야기가 딱 그 모습을 보여주어서 재밌었는데요, 인간은 영원을 감당할 수 없으면서 자기 것이 된 영원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3. 機

[지락] 6장은 온갖 사물이 化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앗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이끼가 되는가 하면 새가 되고 말은 인간을 낳는 모습들을 생전 처음 보는 한자들을 써 보여주고 있지요. 그걸 반복하며 읽고 있자니 무슨 환상적인 그림을 하나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장자는 그 모든 작용을 機라고 했는데요,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용을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 만물을 사유할 때 우리는 ‘태초’라든가 ‘신’과 같은 심연이나 초월적인 심급을 상정하기를 멈출 수 있다고 합니다. 작동, 생성, 되기를 강조하는 철학이라야 만물이 이어져 있으며 하나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장자는 도를 ‘지도리’라고 했습니다. 지도리 역시 작동하는 기계이지요. 작용과 분리되지 않으며 문이 작동할 때라야 의미가 있는 지도리처럼 도 역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機, 天機라는 개념은 조선후기 문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장자>를 읽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장자>를 읽은 티는 다 냈던 것이죠. 도학적이고 매너리즘적인 문장을 벗어나 인간 성정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문장 담론이었다고 하는데 ‘당연함’이 아니라 ‘경험으로서의 天’을 주시한 문장이었다고 하네요.

이 機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자의 개념으로 自化가 있습니다,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에 化를 본질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흐름에 따른다고 하면 휩쓸려가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쉬운데, 사실 변화 자체가 내재적이기에 나는 나로서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만물은 모두 끊임없이 작동하며 이어져 있는 가운데, 나는 나로서 있는 것입니다...그래도 역시 잘 정리가 안 되네요ㅠㅠ 機와 化를 계속 생각하며 <장자>를 읽어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은 [제물론] [대종사] 퀴즈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 오시고요.

<열자> [황제], <장자> [달생] 읽어옵니다. (<열자>는 곧 올리겠습니다~)

후기는 정옥쌤

간식은 정옥쌤, 태욱쌤

암송 있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7-10-04 19:30
    듣보보도 못한 이상한 생물들에다 난감한 한자어들 투성이인 6장을 암송하는거 보고 역시 특이한 애로군 싶었는데, 좀더 들여다보니 역시 천기의 작용의 놀라움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글고, 골개숙 어깨에 버드나무 가지 돋아난 대목 읽으면서, 난 바로 버드나무를 혹이나 종기의 가차로 바꿔 이해해버렸는데~~ 채운샘 말듣고 난 버드나무를 버드나무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힘을 읽어버린게 아닐까 싶었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