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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지락>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7-10-12 22:21
조회
136
장자<지락> 후기

 

후기가 너무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공부는 조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로 밀고 가기가 쉽지 않네요.

 

즐거움이 곧 이다: 樂에 대한 장자식의 통찰력은 즐거움에 근심과 두려움이 동반됨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즐거움이 사라질까봐 두렵고, 어찌하면 더 붙들어 놓을까 근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좋은 것만 지속될 수는 없고 우린 그걸 잘 알고 있죠. 그래서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즐거움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돈, 명예 같은 것들이죠. 사람들은 부자로 살기위해 다 써보지도 못할 재물을 축적하면서 몸을 괴롭힙니다. 잘 쓰는 것이 부자가 아니라 축적해 놓는 것이 부자라는 생각에도 집착이 작동하고 있네요. 정치가도 마주칠 수 없는 선악 논쟁을 지속합니다. 명예를 위해 죽은 열사는 또 어떤가요. ‘열사의 죽음’과 ‘명예’는 서로 모순되는 善이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善은 찾을 수 없고, 이때는 善, 不善의 경계조차 모호합니다. 이런 즐거움이 위험한 것은 모두가 함께 무리지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멈추기 더 어렵고, 부득이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길이란 없습니다. 외부의 즐거움을 향해 집착하며 달려갈 때, 즐거움은 고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샘은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가 미래의 기대치대로 일이 진행될 때라고 하셨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생각한대로 뭔가 착착 이뤄질 때 무척 기쁘죠. 미래가 내 뜻대로 될 거라는 기대는 현재를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를 재단하기도 하고 현재의 즐거움을 유예시켜 놓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러나 모든 계획이란 삑사리를 동반하죠. 이 우주엔 우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변수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이나 만족은 어쩌다 온 순간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至樂이란 우주의 변화원리를 알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럴 때 즐거움이 근심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장자는 지락을 無樂이라고 했습니다. 지락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무락은 즐거움의 지속을 위해 집착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에 투영하지 않는 것이 되겠네요. 여기에 더해서 샘은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내 기대대로 일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가는대로 내버려 두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즐거움에 대한 상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남의 즐거움을 모방하지 않고, 내 즐거움도 남에게 투영하지 않아야 하는 모진 결단이 필요하지요.

장자가 지락은 活身한다고 했는데 무위를 말하며 活이란 글자를 가져왔네요. 지극한 즐거움이란, 기존의 가치를 그치고 따라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위이고, 기존가치를 향해 무리지어 가는 힘에서 이탈하여 그 순간의 다른 가치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活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고 몸을 지킬 수 있게 되겠지요.

 

각의 2장도 樂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자연의 운행에 따르기 때문에 福이나 禍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인위적 조작을 하지 않는 것은, 예측해서 미리 대처하는 않는 것입니다. 즐겁고 슬픈 일에 흔들리는 것은 덕이 삐뚤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선성 3장에는 樂全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樂全은 즐거움이 온전해지는 것으로, 뜻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樂全之謂得志) 뜻을 얻는다는 것이 딱 오지는 않는데요, 장자에게 외물은 天德으로 오고가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과 슬픔이 똑같은 것이 됩니다.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채로 온전해지기 때문에 어떤 즐거움도 여기에 더 보탤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뜻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물에 끌려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至樂의 경지이네요. 외물의 척도에 끌려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때 至樂, 無樂, 樂全 할 수 있는 것이네요.

 

생의 긍정은 죽음의 긍정과 맞물려 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냥 있어도 될 걸 장자가 괜히 오버했다고 평하신 은남조도 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에 대한 애착이 있는 만큼 죽음은 더 두려워지고,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믿음이 애착을 더 키우지요. 그런데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장자는 죽음을 化로 설명합니다. 원래 삶이라는 게 없었고,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서 기가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氣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변화 속에 氣의 만남과 흩어짐이 있고 그것이 삶과 죽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변화만 있는 것이네요. 변화라는 측면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곳의 생성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골개숙도 팔에 돋아나는 버드나무를 병이라 하지 않고 변화라고 말합니다.(俄而柳生其左肘) 강의 중 예로 드신 데미안 허스트의 ‘소머리 전시’에 대한 설명은 소멸과 생성을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예였지요. 삶과 죽음은 하나로 맞물려 있고, 맞물려 돌아가는 것에는 시, 종이 있을 수 없겠지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삶의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은 반증이라는 겁니다. <어서와, 잘가>에서처럼 나이가 들어도 12살에 머물러 化하지 못하는 존재를 괴물이라 두려워하면서도 생의 변화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에 대해선 두려움을 가지는 자기모순을 아는 것이 공부의 첫 걸음이겠네요.

 

세계는 작용하는 기계()이다

장자의 化 이론은 2,3,4장의 죽음을 설명하고 6장에도 이어집니다. 하나의 씨앗이 수초가 되고 개구리가 되고 나비, 귀뚜라미... 말, 사람에서 다시 씨로 동식물, 인간을 구분 없이 넘나들고 있습니다. 장자는 이것을 미묘한 ‘작용’이라고 설명하고 機로 표기합니다. 천지가 계속 작용하는 하나의 기계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를 작용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만물을 하나의 기원으로 소급해 창조나 최초라는 이름으로 고정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만물은 어떤 조건하에서 ~되고 ~되고 ~되는 생성과 化의 과정만 남게 됩니다.

여기서 샘은 두 가지 개념을 더 확장시켰습니다. 만물일체와 自化입니다. 천지가 하나의 큰 작용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만물이 하나인데 이 때 자신이 고정되어 있으면 변화 작용을 이루어 낼 수 없겠지요. 이것은 하나의 척도를 세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추수 1장에서 하나의 일정한 법칙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未可而爲常也) 말합니다. 추수 2장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백과 북해약의 대화를 통해 귀천의 구별을 없애고 끝없는 혼돈에 맡기며(反衍), 사방으로 흐트려뜨리고 뻗어나가게(謝施) 하여 경계를 없애라고 합니다. 경계가 없어야 작용과 함께 할 수 있고 변화 할 수 있으니까요. 만물은 움직여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自化인데, 자화는 ‘저절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늙고 아픈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과정이죠. 누가 시키는 게 아닙니다. 만물이 자화하는데 즐겁다고 지속시키려 하고 고통스럽다고 뽑아 없애려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죠. 이 원리를 아는 것이 至樂입니다.

 

名止於實, 義設於適 서로 본성을 지켜주는 것: 장자의 해석 중 재미있는 것이 은둔이었습니다. 선성2장에서 세상은 도를 잃어버리고 도는 그것을 펼칠 세상을 잃어버려 도가 있어도 숨겨진 상태가 되었을 때 성인은 숨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숨어지는데 이것이 은둔입니다. 세상의 때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고, 본성대로 두는 것이기도 하지요. 지락 5장은 공자가 제나라로 가려고 하는 안회에게 때에 맞지 않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맞지 않게 움직이는 것이 위험한 것은 타인의 본성까지 흐려 놓기 때문입니다.

 
전체 2

  • 2017-10-13 10:40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바로 다음 순간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게 계속 머리에 남네요~ 욕구가 충족돼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어찌 보면 끝없는 괴로움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이걸 알기 위해 작용으로서의 세계, 세계의 무상 등등 얘기하는 것 같지만, 금방 주체적인 나로 돌아가는 이 인위적인 사고 ^_^

  • 2017-10-13 16:37
    일체이자 자화하는 기계. 이런 얘기를 거침없이 하는 장자가 놀라워요. 읽다보면 경계를 계속 세우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