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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달생' 후기

작성자
초료
작성일
2017-10-18 04:30
조회
116
달생 후기입니다.

1. 장자는 가볍고 유쾌하다.

지난주에 장자 공통과제를 쓰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딸년이 ‘엄마는 뭘 쓸 때는 꼭 예민해지더라, 상원아 건드리지말자’ 하고는 방을 휙 나가버리더라고요. 내가 좀 조용히 하라고 화도 버럭 냈던 것 같고요. 그때 느낀 것은 ‘아 내가 장자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장자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구나’ 라는 것이었어요. 분량을 꽉꽉 채우려는 욕심에 나름 뭘 해석한답시고 끙끙대는데,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들에 물리고 짜증나고. 뭐 이런 것들을 애들이 느낀 거죠. 새끼들이 옆에서 떠들든지 말든지 의식하지 않고 장자 과제를 쓰는 날은 언제나 올까요? 역시나 이번 주에 쌤은 공통과제를 읽고는 ‘장자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고 하셨어요. 무겁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경직됐다는 뜻이고요.

쌤은 장자 이야기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라고, 그 맛을 좀 알았으면 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듯 했어요. 무어 그리 장자를 우리의 의식 속에 의도함에 ‘때려 넣으려 하냐’고, 당최 심각하고 무겁답니다. 쌤은 장자가 얼마나 가볍고 경쾌한지 지금까지 들었던 강의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붓다,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푸코, 공자, 간디, 한나 아렌트, 심지어 고등학교 학창 친구님, 수영왕 장 타리스, 미켈란젤로, 화가 이우환, 동의보감 등등- 종횡무진 이야기를 전개하셨죠. 저는 웃기도 많이 웃고 어리버리 지나갔는데 이놈의 후기를 쓰려고 보니 쌤은 가장 장자스럽게(?) 강의를 해주셨네요. 자유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장자스럽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쌤은 장자는 삶의 동시성, 양면성, 역설성을 가장 잘 보았다고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어느 것에도 규정되지 않고 의도함이 없으며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놓는다고 했습니다.

또 쌤은 ‘방황’이니 ‘소요’니 하는 단어들이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어가 가지는 역사성은 사회마다 규정해 놓은 가치에 따르기 때문에 단어마저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니까요.

아무튼 장자의 역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 오든 그 사건을 마치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일 수 있을 테지요. 저는 가벼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성적 훈련이 있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쌤은 경험에서는 즉각적인 습관이 작동하여 넘어가게 될 뿐 근본까지는 사유하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백번 동감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까만 떠오릅니다. 그래서 쌤은 어찌나 배움을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귀딱지가 내려앉겠어요) 거기에는 쌤은 우리의 무거움에서 본 것들-진부함, 상투적인 언어, 습관적 사고의 패턴, 헤어나지 못하는 도덕성-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겠지요. 뭐가 없음을 못 견뎌 하여 끊임없이 이름붙이고 규정하려 하는 규정성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삶이 어디 내가 의도한 대로 규정한 대로 흘러가더냐, 라는 말이 남습니다. 삶이 신비롭다는 것은 ‘규정불가능성’ 때문이라고 하지요.

2. 왜 배워야 하는가?

배움에 대해서라면 공자님이 빠질 수 없지요. 쌤은 공자님의 배움의 단계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학지, 곤이불학-를 설명하고 ‘困’하는데도 배우지 않으면 곧 욕망의 노예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困이 닥친 어려움이나 괴로움은 물론 내가 즐거워하는 것, 좋아하는 죽는 것을 말한답니다. 탐닉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범죄자는 달리 범죄자가 아니라 너무나 진부한 인간의 욕망밖에 없는 사람인데 배우지 않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고 했지요. 지성적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도 자기가 타고난 기질대로 ‘저지르고’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지성의 힘이 더 능동적으로 커질 수 있도록 이전의 욕망보다 더 큰 욕망이 되도록 만드는 거랍니다. 지성이 욕망을 누르는 문제가 아니라 이해가 욕망이 되어야 한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는 게 있습니다. 세상이 무상하고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감정이 지성을 이겨버리고 소유하기 위해 안달복달하지요. 그러니까 이런 욕망을 누르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랍니다.

사실 장자는 이 세상을 떠나라는 은둔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달생]에서 몸을 보존하기 위해 세상을 버리라(棄世)고 하는데, 이 말은 ‘세속의 가치’를 버리라는 것이랍니다.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데 대체 우리는 왜 세속의 가치를 못 버리는 걸까요?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를 채워 줄 수 없음을 알지요. 돈이, 남편이, 자식이, 명예가 그 무엇도 우리를 채워 주지 못하는데도 무언가 찾아 헤매는 것은 스스로 완벽하게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삶이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주지요. 철학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욕망이 커질수록 하나씩 내려놓아지는 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니체의 <아침놀>을 읽으면서 다가온 문장이 있었어요.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 배워야만 한다네요. 쌤은 푸코 말을 인용해서 ‘철학은 어떤 문제를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복잡하고 미묘한 인생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 진부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사유불능성, 평범성이 악이라고 설명하면서요.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이란 다르게 욕망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할 것도 같아요. 마치 다른 주파수의 영역대를 찾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3. 정기를 보존한다는 것(神全)

쌤은 술취함의 비유나 나를 잊는다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의도함이 없는 상태라고 했지요. 이런 무위(無爲)가 어떻게 양생이 되느냐, 이 문제는 氣라는 에너지차원에서 살펴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흐름을 절단 내고 막히게 하는 것으로 기가 막히는 상태를 불러옵니다. 세계의 속성은 계속 흐르고 두루두루 통하는 것인데 이 흐름과 함께 할 때 우리 에너지도 원활하게 흘러 에너지 소진이 없게 되지요. 강의가 재밌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릅니다. 힘들지가 않지요. 그런데 내가 썼던 과제를 생각하고 자기비하나 내 생각이 슬슬 올라오면 방바닥이 불편하고 이곳저곳 아픕니다. 힘들어요ㅠㅠ. 정기소모는 내가 하고 있었지 절대 외부 때문이 아니었어요. 정기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에너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때 즉 기대하고 분별하고 망상을 지을 때, 억지로 할 때 정기가 가장 많이 소모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안되면 되게 하라던가, 오버해서 감정을 끌어내게 하는 자본주의가 가장 정기를 소모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을 멀리 하라는 것도 신체적으로도 정기를 소모하게 하는 것에서 멀어져 정기를 보존하는 것으로, 양생과 맞물려 있었던 것이지요.

쌤은 무거움은 곧 경직성이며 가벼움은 유연성이라고 했습니다. 분별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힘을 주게 되고 몸을 경직되게 만들면 뜀틀 하나 넘지 못하고 고꾸라지고 마는데 정신에 있어서도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체를 떠나서 관념자체도 단독으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신체를 돌보는 것이 양생이지만 신체만 돌보아서는 절대 양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신이 경직된다는 것은 의도함, 규정성을 만드는 것인데 자기 자신의 의식을 실체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의식이나 감정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불교에서는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 틈을 메워서 연속적인 덩어리로 만들어 덩어리를 평생 안고 사는 것에서, 그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이 덩어리들을 부수고 마음에 맺힘을 만들지 않다는 말이지요. 마음이 풀리면 몸이 풀리고 기가 활발하게 돌테고요. 의식을 세상의 가치에 묶어두고 무겁게 고정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정기를 소모하지 않는 것은 신체의 문제와 동시에 마음의 문제요 욕망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4. 그래서 達生이란

達달이란 어떤 것을 이해한다. 도달한다. 어딘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하나를 탁!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리까리가 아니라 밝게(明)하게 이해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달생이란 무엇이냐? 1,2,3번까지 전부 달생에 관한 말씀이었어요...그러니까 수업시간 내내 쌤은 달생을 말했던 거지요. 생명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린 지성의 힘으로 다른 욕망을 만들어 내야하며 인간의 命이 내 뜻대로 억지로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達해야 한다는 것. 생명의 실정을 이해하게 되면 내 의도와 내 의식이 무의식과 자연스럽게 일치 될거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자연의 이치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공자님이 말씀하신 從心所慾不踰矩에 이르는 경지이겠지요.

쌤은 우리가 하늘과 부합한다는 것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못되더라도 배우면 이것이 생의 매커니즘이구나,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장자를 너무 멀리 고원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쌤은 네가 지금 지지고 볶고 있는 욕망를 들여다보면 장자의 어느 지점에서 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가..가...볍게 떠오르는 것이 분명 있다고 했어요...

여기까지 후기 마칩니다. 끄~읕.

 
전체 1

  • 2017-10-18 11:14
    업로드 시간이 ㅇ0ㅇ 은남쌤의 정기소모를 걱정하게 됩니다...ㅠㅠ 생의 가벼움에 達!!하는 것이 너무 힘겹네요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