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704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02 21:07
조회
523
기나긴 장정 끝에 드디어 <금강경>을 마쳤습니다(-0-) /
초반에는 왜 이런 이야기(붓다가 공양하고 세족했다;)에 주석이 이토록 길고 다양한가 싶기만 할 뿐 별 감흥도 없더니, 붓다의 설법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니 뭔가 묘한 기분이 한가득입니다.
오, 처음에 그 장면이 이런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반대로 어느 하나 제대로 배운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 29分에서 붓다가 여래에 대해 한 이야기가 어쩌면 이런 것이었을까요. 여래란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다...

하지만… 여래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제대로 답하지 못하겠다는;;
다만 수업 시간에 풀어주신 如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진리는 세계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如如한 세계,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이므로 옴 자체도 감 자체도 없다.
이로부터 부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상적인 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채운쌤의 질문과 답: “부처는 왜 부처인가요?” “여여함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분별이 없으므로 세계 자체입니다.”

<금강경> 마지막 수업인만큼 뭔가 그럴싸한 후기와 공지를 올리면 좋겠지만, 그것도 제 욕심과 고집인 것 같고, 현실은 이렇습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늦은 공지 글을 올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수업 시간 내용도 많이 잊어먹었을 게 분명하고, 어쩔 수 없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만 듬성듬성 복기해보도록 할게요.

수업에 앞선 토론시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눈 것은 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노무 상이 골치를 썩이는군요.
은하쌤도 은남쌤도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상이 없다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하셨지요.
그런데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불교는 결코 상이 없는 세계, 苦가 없는 세계를 말하지 않는답니다.
관건은 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이럴 경우 상을 ‘없애는’ 일에 또 집착하게 된답니다) ‘상을 소유하지 않는 것’!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이 그저 상일뿐임을 아는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옳은 것, 정의로운 것, 타당한 것… 이 모두가 인연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지은 상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고로 중요한 것은 상을 짓지 않는 게 아니라(이건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관계들 속에서 부대끼며 존재하는 한 불가능한 일) 내가 지금 상을 짓고 있다는 것, 이것이 고를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 나아가는 것뿐이랍니다.
<화엄경>에서 보여준 화엄의 세계가 바로 이런 경지를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상을 붙들지 않는 세계란 그처럼 변화무쌍하고 드넓고 빛으로 가득한 세계로군요!

그런데 상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 그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도 잘 알고 붓다 생존 당시 그 제자들도, 또 모두의 큰 스승인 붓다 자신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경전들 속에 등장하는 붓다는 종종,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르침 또한 ‘인연조건에 따라’ 사라지리라 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말을 도그마화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말씀을 던지기도 했지요.
금강경에서도 붓다와 붓다의 말씀을 실체화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붓다는 三十二相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 하고, 또 말해지는 모든 것이 卽非라고도 합니다.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붓다 및 그의 가르침을 실체화하고 집착하는 것조차 넘어섰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답니다. —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

허나 중생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無明 탓이라 말합니다.
달리 무명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집착하고 있는데 자신이 집착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무명이랍니다.(이런 관점에서라면 상을 가지고 앎을 형성하는 학자들 모두가 무명;;)
그런데 채운쌤 말씀대로, 보통 우리는 집착하는 동안 그 집착을 깨닫지 못하지요.
‘이건 집착이야’라고 되뇌어본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위와 내 상태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며 마음만 더 괴로울 뿐,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어째서 그럴까 생각해보면, ‘집착이다’ 중얼거리고 앉아 있을 때조차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인연조건 안에서 대상을 그렇게 보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인 것 같지요.
알지 못하는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대상에 대한 내 이 마음이 존중받지 못하거나 무시당한다고, 부정된다고 생각되는 순간 솟구치는 불쾌감에 있습니다.
내가 훼손되고 부정된다는 느낌에 휩싸인다는 이 사실이, 내가 무명의 존재임을 방증합니다.
‘이건 집착이야’라고 내처 중얼거리고 있을 뿐, 여전히 나는 집착하는 내 마음만 마냥 귀하게 여기느라 그것이 만들어진 조건을 살필 힘 내지 지혜가 없는 거죠.
그런 지혜가 없으니 사람은 쉬이 현혹됩니다. 누구에게 현혹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현혹해버립니다.

…이렇게 보건대 정말이지 불교는 인간이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는 철학 아닌가요.
채운쌤 말씀대로, 내가 가장 좋다고 믿는 그것,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대상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벗어나기란 그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것과 나는 하나인데.
바로 이를 해낸 이를 불교에서 ‘보살’이라 부릅니다.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보살은 본질(이라고 하면 오해가 있겠고… 세계의 실상)에 대해 완벽하게 자각한 끝에 현실에 대한 사랑에 이른 이랍니다.
…뭔가 멋진 말인데, 아직 소화는 안 되는군요; 이건 모두들 에세이에서 각자 함 풀어봐야 할 듯합니다. 채운쌤께서 미리 에세이 주제를 내주신 것 기억하시죠? ‘보살행’에 대해 지금부터 각자 골똘히 생각해봅시다 ^^;

자, 이렇게 해서 <금강경>이 끝났습니다.
붓다가 공양하는 모습도 지켜봤고, 자신은 이미 알면서도 다른 제자들을 위해 수보리가 일어나 질문을 하는 것도, 또 수보리가 잠깐 (피곤했던지^^;)해이해져 스승의 질문에 잘못 대답하는 것도 봤지요.
배움이란 결국 이처럼 말과 말이 오가는 위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 하지만 그때의 말조차 인연조건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스러질 것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수보리와 붓다의 문답은 이제 끝났으니, 자 이제 21세기의 중생들이 어떤 인연조건 속에서 앎을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았습니다그려. 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
다음 시간에 <몸의 인지과학>을 끝까지 읽고, 그 다음 시간에는 반야심경 1부와 나눠준 프린트를 읽고, 그리고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우리 각자 생각해보아요~

후기는 은남쌤께서 일찌감치 올려주셨죠. 간식은 락쿤쌤.
다음 시간 <인지과학> 발제는 현옥쌤, 락쿤쌤, 수경, 은남쌤이 차례로 맡아 해주시겠습니다.

다음 다음 주…라고는 해도 내일 모레ㅜ… 그날 여섯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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