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71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09 15:30
조회
381

바렐라의 <몸의 인지과학> 읽기를 마쳤습니다. 이제 두 주 연속으로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을 읽고 나면 요번 시즌 불교n도 끝.
수업이 없는 7월 25일에 가열차게^^ 에세이를 준비하고 8월 1일에 짜자잔 만나면 되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주제는 ‘보살행’. 뜬구름 잡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 다들 하는 이야기 말고 좀 더 우리 몸 우리 일상과 밀접한 이야기, 생각을 밀고 나간 끝에 겨우 도달한 이야기를 펼쳐볼 수 있기를 >_<


지난 수업에서 배운 주요 개념은 뭐니뭐니해도 발제(enaction)죠.
앞서 살펴본 대로 바렐라는 표상과 구분해 인지를 발생적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인지는 대상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 안에서 발생되는 것이며, 그로부터 행위 또한 구성된다고 했지요.
그러니 잠자리가 자신의 겹눈과 더듬이를 통해 형성한 인지는 인간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인간이 잠자리보다 더 완벽하고 정확하게 인지를 구성한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되겠지요.
인지 개념에서 핵심은 무엇보다도 신체와 관계인바, 무엇도 관계보다 선험적이고 절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답니다.


이로부터 ‘세계란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지요. 대상과의 관계 및 그에 따른 인지작용 이전에 객관적으로 선재하는 시공은 없습니다.
그간 다윈주의에서는, 환경은 미리 주어진 것이며 그 안에서 개체가 적응하는 방식을 진화라 간주했습니다만, 바렐라는 그에 대응해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란 바깥이 아니라 차라리 사이에, 중간에 있다!
이 표현이 조금 오해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 그럼 만들어지는 세계 이전에 객관적 외부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그 객관적 외부와 내가 만나 화학작용을 벌여 그 사이에 무엇인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바렐라가 말하려는 건 그것이 외부든 내부든 간에 그 어떤 ‘실체’도 따로 없다는 사실이라네요.
관계 안에서 발생되는 세계 외에 그 어떤 부동/불변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세계는 오직 관계 안에서, 개체의 행위 안에서 형성되고 제출되는 것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발제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지과학은 일원론도 이원론도 넘어 선다는 것이 채운 쌤의 설명이었습니다. 나와 환경을 각각의 실체로 파악하는 것도 지양되고,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곧 나로, 나를 세계로 환원시키는 것도 지양된다고요.
불교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이 공유하는 이런 결론이 참 흥미롭지요 ^^


뒤이어 채운 쌤께선 심지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보살은 세계 자체가 본디 발제되는 것임을 깨달은 자라고요.
실체로서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지난 수업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였는데)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발생합니다.
그때그때 인간의 지각, 행위 그 모든 것은 세계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뚜렷한 인과와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상황적 배치에 의해(=시간에 의해 =연기적 조건에 의해) 우리는 생각하고 선택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여 우리의 세계는 발제됩니다.
매번 나의 마음과 힘 작용에 의해 세계가 발제되고, 그렇게 발제된 세계 안에서 또 마음이 요동치고 힘이 방향을 틀고. 내가 그럴 때마다 나와 만나는 모든 대상들의 마음이 또 달라지고, 그래서 또 다시 세계가 다르게 구성되고, 그러면 또 나는……. @.@


그런데 세계가 곧 발제되는 것임을 모르는 중생은 하나의 결과에 대해 특정한 인과를 세우고, 그것을 평가하고 집착하고 저어하니 이게 다 ‘업’이 된다고 말하는 게 불교라고 채운 쌤께서 설명하셨죠.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크건 작건 간에 다중 원인을 갖고, 그것 자체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다중결과를 낳는 것이건만(이게 바로 空! 緣起!), 무명의 존재들은 그걸 모르니 나에 집착하고 대상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깨달음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를 아는 것. 업의 소멸은 다중 원인과 다중 결과를 이해하는 지혜에 달린 일이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았을 때 드디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현상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다는 말씀.


그래서 용수(나가르주나)의 글쓰기를 보살행으로 볼 수 있다 하신 말씀도 인상적이지요.
보살행이라고 하면 뭔가 지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정감을 주고받는 말랑말랑 소프트한 일이거나 혹은 누가 봐도 살신성인이라고 할 만한 선택(생명을 보시한다던지!) 같은 걸 연상하기 쉬운데, 이와 같은 글쓰기야말로 깨달음을 기반으로 현상(=속제)에 대한 이해를 나누는 보살행이라는 거예요.
“일종의 언어 표현으로서 세속적 언어의 한계 속에 참여해야 한다.” 함께 읽은 글(<용수의 공사상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인상적이었고, 뭔가 연관 지어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용수나 <중론>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다만 세속적 언어를 도구로 삼아 진리를 사유한다는 것, 심지어 <무문관>처럼 선문답 형식도 아니고 지독하리만치 치밀한 논리의 전개를 통해 불교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 기이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속제와 진제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와 상통할 것 같은데… 음…….


자, 아무튼 이렇게 끝났습니다.
한 권 한 권 책 읽기를 마치면서 더불어 쌓이거나 소멸되는 것도 짜자잔 멋지게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욕심이겠죠 ^^; 먼데 내다보지 말고 우리 그냥 한 걸음씩 걸어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는 반야심경 1부+나눠드린 두 개의 출력물 읽어 오시는 걸로!
후기는 락쿤쌤. 간식은 명애쌤께 부탁드립니다.
월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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