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4월 25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4-22 10:32
조회
133
지난 시간 채운샘은 푸코의 관심이 ‘주체’에 있었다는 것을 환기하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주체는 어떻게 ‘발생’했는가? 푸코의 작업을 ‘주체없는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주체를 배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를 발생시킨 역사적 조건을 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푸코는 주체를 중심(출발점)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구조주의는 어떤 바둑판 같은 세계를 상정했습니다. 장기나 체스의 말이 각각의 고유한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는 반면에, 바둑알의 경우에는 그것이 놓인 ‘위치’에 의해 그 본질이 결정되죠. 바둑판 위의 바둑알처럼, 구조주의적 주체는 그것이 놓인 위치에 따른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주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주체들이 다른 힘을 가지고 다른 것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유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근대 계몽주의가 ‘역사’나 ‘진보’와 같은 이상에 종속시킴으로써 주체를 무력화시켰다면, 그에 맞서는 구조주의 또한 비역사적인 구조만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에게 구성적 역량을 되돌려주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의 관심사(?)는 광기도, 성도,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구성적인 주체를 사유할 것인가,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죠. 푸코에게 역사란, 주체를 발생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주체’와 ‘대상’ 이전의 체계입니다. 따라서 푸코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라는 식으로는 묻지 않습니다. ‘광기란 무엇인가?’라는 식으로도 묻지 않죠. 그는 어떻게 광기가 앎의 대상으로 출현하였으며, 그것을 진리로 출현시키기 위해 인간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탈국면적 분석’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출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죠.

이러한 고고학적 작업은 그 자체로 실천성을 갖습니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믿고 있는 것들, ‘과학’으로 승인된 것들에 그 ‘출현’을 묻는다는 것. 그러한 작업은 아주 다양한 앎들의 봉기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승인된 앎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은 다른 실천과 네트워킹을 촉발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앎과 주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실천에 이론을 제공하거나, 다른 앎(예컨대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증명하는 것과는 상이한, 푸코식의 실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 채운샘은 우리가 여전히 명확하게 움켜쥐지 못하고 있는 언표개념을 다른 관점을 동원하여 설명해주셨습니다. 들뢰즈(스토아학파)의 사건 개념을 통해서요.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시는데, 여전히 아리송 하네요^^;

푸코는 늘 ‘비담론적인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언표 개념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죠. 언표에 대한 분석은 결코 의미작용의 체계를 분석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언표는 언어의 극한에 존재하는 것. 따라서 언표에 대한 분석은 의미들의 그물망을 파악하는 일이 아니라, 언표를 비담론적 차원의 ‘표면효과’로서, 즉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는 것을 뜻합니다.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맞닿아 있는 표면. ‘맞닿아 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은 일방적인 인과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나무를 인식하는 사건은, 나무라는 비담론적 차원의 실재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론적 차원에서 지니고 있는 언어적 표상들과 무관하게 나무 자체에 가닿을 수는 없죠.

채운샘은 사건 개념을 ‘선고’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판사가 피고의 죄를 선고할 때, 물질적 차원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선고가 이루어지기 이전과는 무언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고는 ‘재판정’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 각각의 역할 등의 비담론적 차원이 전제되어야만 이루어지고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식으로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되, 인과를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 ‘선고’가 놓이는 차원이 곧 언표의 층위입니다.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이 맞닿는 표면. 거기에 언표-사건이 있습니다.

언표를 표면으로 본다는 것이 함축하는 사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표를 어떤 의미를 띄기 이전의 잠재적 차원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사건화의 주체인 우리는 주어진 단어들을 가지고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표들의 계열을 수립함으로써 의미를 출현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건화(=계열화)하는 방식은 우리가 주체화 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역사’란 다른 계열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구성하는 방식을 낯설게 보게 하는 도구인 것 같습니다.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의 규칙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사학자 자신의 현재적인 조건을 가시화하는 일이겠죠.

다음주에는 《지식의 고고학》 4장 전체와 이번 시간에 나눠드린 자료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이번 강의내용을 바탕으로 ‘고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 보는 것과 각 챕터를 한 단락 정도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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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3 03:11
    선고의 예가 딱이었습니다. 카프카도 떠오르고요. 한편으로는 사법의 장이, 다른 한편으로는 선고하는 말 자체 딱 만나서 사람 하나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순간. 그야말로 '사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