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5월 2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4-29 12:12
조회
89
이번 시간에는 저의 질문과 함께 다시 한 번 구조주의와 고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채운샘의 상세한 설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ㅎㅎ

 우선, 구조주의 이전의 사고는 ‘주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시간에 배웠던 현상학은 ‘나'에 따라 대상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이었죠. 이는 곧 인간중심주의로, 인간의 이성과 의지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합목적적인 판단에 의거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귀결됩니다. 구조주의 역사학 이전의 역사는 서유럽을 역사의 하나의 ‘완성'으로 보고 그를 기준으로 ‘타자들'의 역사를 하나의 ‘결여'의 역사로 기술했습니다. 그것에 시간성을 더한다면 서유럽을 제외한 국가들은 서유럽에 얼마나 가까이 ‘당도했는가’를 기준으로 그 국가의 선진성 또는 야만성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이렇게 모든 것을 주체로,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사유방식을 거부합니다. 구조주의의 두 뿌리인 언어학과 인류학 중 먼저 언어학을 살펴보겠습니다. 언어학에서 우리의 전제를 뒤바꾸는 사유는 바로 ‘주체가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규칙성(랑그)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 기본 규칙성으로 무언가를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차이들의 체계'입니다. ‘이것’이 ‘저것’과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분류표. 우리가 특정 언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곧 그 공동체의 특정 사고방식에 젖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언어의 의미는 그 공동체가 공유하는 규칙성의 체계 내에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류학. 레비스트로스는 이 변별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랑그와 같은 규칙성이 사회에 적용될 수는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각 공동체에는 특정 시공간을 고유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본 요소가 있는데, 이를 들뢰즈는 ‘퍼즐의 빈칸'으로 표현합니다. 그 빈칸 또는 심급에 따라 요소들이 어떤 규칙성에 따라 계속 위치 변환을 합니다. 대상은 그가 이웃하는 미분적/변별적 관계들에 따라 위치지어집니다. 이 위치는 또한 이웃관계들의 자리바꿈에 의해 계속 변합니다. 따라서 위치 또한 선험적으로 주어진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이 다른 존재들과 얼마나 다른 변별적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그 대상의 의미가 결정되고, 그와 동시에 그 대상과 관계맺는 주체도 떠오릅니다(이모와 다른 엄마, 그 엄마의 자식으로서의 나). 정리하면, 구조주의자의 과제는 특정 시공간에 고유하게 작동하는 규칙성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은 그 규칙성 안에서 변별적 관계를 통해 떠오르는 결과물 내지 효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구조주의는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납니다.

 푸코는 구조주의가 말하는 주체와 대상을 떠오르게 하는 변별적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지평을 사유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저것과 가깝게 또는 멀게 분류되는가? 그 분류를 가능하게 해주는 규칙성의 장을 보아야 하는것은 아닌가?’ 표면에 드러난 담론 속 어구 및 명제들의 유사성과 차이 이전에 존재하는 그 유사성과 차이를 낳는 조건. 에피스테메는 ‘역사적’ 아프리오리입니다. 그것은 담론의 장 바깥에서 주어지는 어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에피스테메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표가 특정 방식으로 계열화됨에 따라 만들어지는 담론의 형성물들과 함께 만들어지는 규칙성이 에피스테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규칙성들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이전의 규칙성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어떤 규칙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도 하고, 완전 새로운 규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규칙성들이 계속 변화하면서 상이한 담론들이 생겨납니다(불연속). 따라서 푸코는 한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규칙성을 찾아내려는게 아니라 상이한 담론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보려 했습니다. 상이해 보이는 두 담론은 얼마만큼 다른가? 정말 다른 지반 위에 있는걸까? 완전히 같은 지평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담론들은 정말 동일한가? 이러한 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규칙성들의 외부, 즉 제도 및 권력과 같은 물질적 층위입니다.

 휴.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래서 정리를 하자면 구조주의와 변별되는 고고학의 지점이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구조주의는 하나의 규칙성 속에서 요소들의 자리바꿈을 보며 주체와 대상의 성립을 사유했다면, 고고학은 규칙성들의 복수성에 주목하면서 같은 단어일지라도 실은 상이한 주체들 및 상이한 대상들을 출현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성'에 대해 말하더라도 환원될 수 없는 상이한 지반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겠죠? 또한 그러한 복수성들이 만들어지는 바탕은 물질적 지반이라는게 두 번째 변별지점인 것 같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를 그런 방식으로 출현시켜주는, 특정 주체로서 특정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물질적인 제도 및 권력. 푸코는 이를 두고 담론의 ‘실증성'이라고 명명합니다. 푸코의 ‘실증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담론이 구체적으로 우리 신체에 효과를 미친다는 것입니다. 주체를 특정 방식으로 말하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물질적 층위. 저번 시간의 ‘선고sentence’를 상기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법원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피고를 10년형에 처한다'는 말이 미치는 효과). 고고학은 실증주의자들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외부의 반영'으로 보는 것(텍스트의 저자로 의미를 환원하는)이 아니면서도 언표는 필연적으로 외부와 관계맺으면서 의미가 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푸코의 작업은 분산되어 있는 담론들을 출현시키면서 ‘공존과 투쟁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역사를 ‘진화모델'이 아닌 ‘전쟁모델’로 봐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힘관게 및 역학관계에 의해서 상이한 앎들 중 하나의 담론이 과학적 차원으로 격상하게 되는 과정. 투쟁 및 전쟁이라는 단어가 저한테는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다양성' 내지 ‘복수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서로가 투쟁하지 않고 사이좋게 공존한다는 이미지가 같이 떠올렸는데, 푸코가 말하는 것은 전혀 그게 아니었다는걸 알게 되었거든요. 담론들은 서로 1과 1의 관계로 수평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힘이 센 담론이 힘이 약한 담론을 ‘배제’하며 지식 또는 학문의 영역을 ‘전유’하게 되는 ‘힘관계’로 이루어져있다는 것. 전쟁모델!ㅎㅎ 고고학은 이 지도를 그리기 위해 고고학은 특정 시대를 이루는 규칙성을 미리 상정하고 역사를 분석하는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런 언표를 가능하게 했던 규칙성들’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의 담론적 형성물은 대상과의 지시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천'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담론이 출현할 때에는 비담론적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실재적 효과를 가지고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시대를 다르게 설명하는 대체적 이론의 생산이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담론적 실천으로 이 시대의 담론들의 관계들 속에서 투쟁할 것인가의 문제인 듯 합니다. 채운샘은 이것을 ‘앎들의 봉기'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금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푸코의 사유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통해 투쟁을 할 수 있을까요? 채운샘이 우리 시대가 ‘지식 생산의 시대'인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을때 귀가 절로 쫑긋했습니다.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자기가 배운 것을 가지고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지식.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방법론 생산이 아닌,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변형하고 생산하는 실천의 문제. 와웅! 계속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다음주까지는 <지식의 고고학> 결론 부분과 <담론의 질서> 35페이지까지 읽고 각 부분을 한 단락 정도로 요약해 오시면 됩니다! 과제를 하지 않으셨던 세 분들은(ㅎㅎㅎ) <지식의 고고학> 결론 부분까지 포함해서, 숙제를 하신 분들은 <담론의 질서> 부분만 하시면 됩니다~ 다음주 간식은 영님샘, 봉선샘입니다.
전체 2

  • 2018-05-01 11:12
    전 시간 수업이 더 잘 이해되네요. 고고학과 구조주의의 차이가 규칙성의 복수성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외부적인 제도와 같은 것이구나. 아하. 근데, 복수성은 시간과 관계있는건가? 하는 의문이 갑자기. ㅎㅎ

    • 2018-05-01 19:12
      호오....샘 덕분에 또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규칙성 마다 가지는 시간이 다를테니 시간의 복수성이기도 하겠네요! 수업 초반에 나왔던 브로델의 다수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