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7월 4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6-30 05:31
조회
130
장마가 시작될랑 말랑한 날씨네요. 습하다가도 쾌적해지고, 다음날이면 다시 습해지는 야릇한 날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뭐라 정확하게 비교는 못 하겠지만 10년 전과 비교해도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아니면 에어컨 없이 지내다가 최근 몇 년 에어컨 있는 곳에서 지내서 그런 걸까요? 뭐가 됐든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날씨입니다.

이번 주 숙제는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해오는 것이었죠. 하지만 역시 니체의 사유를 이해하기란 힘들어요. ㅋㅋㅋ ‘비판하자’, ‘실험하자’, ‘낯설게 생각하자’와 같은 말들은 답이긴 하지만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작동하는 문제들을 니체의 사유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채운쌤은 니체의 말을 가져와서 이어붙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니체의 개념들을 해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않는 것은 니체의 사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힘의지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라 하셨죠. 농담조로 얘기하셨지만 책 한 권 끝날 때까지 니체의 개념 하나를 자기 언어로 소화하지 못하는 건 확실히 반성해야겠어요. ㅠㅜ 마음을 다잡고! 《도덕의 계보》는 《즐거운 학문》보다 더 고통스럽고 즐거운 만남이 될 수 있도록 각자의 해석의지를 더욱 발휘해봅시다!

다음 주 숙제 공지하겠습니다. 《도덕의 계보》 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읽고 1. 계보학이란 무엇인지 2.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 대한 니체의 계보학적 작업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저와 건화형이 준비할게요~

 
  1.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


인식이 삶의 수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니체는 삶이 인식의 수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식이 삶의 수단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식은 삶에 봉사하는 합리적인 도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삶이란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되죠. 하지만 니체에게 삶은 방향성, 의미를 가지지 않은 하나의 카오스이며, 인식 또한 인간의 합리성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언어 전달을 위해 발명된 것이며, 이성은 충동의 한 가지 형태이며, 인식은 ‘두려움의 본능’에 따라 낯선 것을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의지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삶과 인식의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인식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작동하는 합리적인 의식의 활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삶은 인식의 수단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조별토론에서 나눈 얘기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느낌만 있었지 능동적인 해석의지는 없었습니다. ^^;; 일단 느낌상의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삶은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각종 다양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되면서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진리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삶은 오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어딘가에 있고, 삶은 그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오류들을 배제하며 진리를 찾으려고 하겠죠. 이럴 때 인식은 진리를 찾기 위한 도구일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는 오류들 뒤에 숨어있지 않고, 삶이 어떤 의미 속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찾기보다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는 세계를 긍정할 것입니다. 이럴 때 인식은 세계를 고정시키려는 우리의 사고의 습(習)에 균열을 내는 포착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이 인식 이전에 존재하지 않다면, 문제는 다양한 사유의 틀을 만들어내는 인식의 실험이 아닐까요? 여기서 풀리지 않았던 것은 고통과 삶의 관계였습니다. 삶을 실험하기 위해서 고통이 필요한데, 정확히 고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딱히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고통을 말 그대로 신체적 징후로 보면, ‘이미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다르게 느끼자’는 정도의 얘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고통을 공부하면서 느껴지는 사유의 실험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뇌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대략 이 정도의 느낌이 있었습니다.

채운쌤은 니체의 고통을 불교의 고(苦)와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불교에서 ‘고’는 무상(無相)입니다. 동물은 통증을 느끼지만 고뇌하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는 통증의 원인을 찾는 의식적인 영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통증을 느끼면 고뇌를 시작합니다. ‘왜 나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하지?’라는 원망은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음’ 혹은 ‘아파야만 하는 원인’을 상정합니다. 통증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통증에 대해 원인이나 이유를 투영하는 순간, 통증은 사라져도 우리 자신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또 다시 다가올 통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실체화하지 마라’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유를 실험하라’가 니체의 답이라면, 불교의 답은 ‘아상(我相)을 깨라’일까요? ㅋㅋㅋ) 니체가 고통을 사유하는 태도도 불교의 ‘고’와 비슷합니다. 니체는 고통을 전유하는 방식 및 통증에 대해 어떤 표상을 생산하는지 등 사람들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합니다. 〈낭만주의란 무엇인가?§:370〉에서 니체는 똑같은 삶을 살아도 삶을 과잉(fülle)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결여(Verarmung)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삶을 과잉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을 그 자체로 충만한 것으로 느끼고, 반대로 삶을 결여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이 모든 것이 갖춰진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느낌을 뜻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기독교도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자신들의 죄에 입각한 시련으로 해석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 고통을 극복하는 순간 자신들에게 천국이라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인식을 통해 삶의 예측불가능성을 설명함으로써 삶을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삶에 대한 태도는 기독교도들과 비슷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키려고 하죠. 제 경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필요했던 일이야.’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말들로 위로하지만, 이미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은 후에 나오더군요. 하하 이런 합리화들은 실상 ‘정신승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어난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견디는 게 아니라 고통을 고통으로 남겨두지 않는 기예입니다. 채운쌤은 풍요로운 조건이 갖춰져야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조건에 얽매이는 이상 삶은 항상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결여’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조건이든 그 속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건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철학은 자신이 의존하는 조건들을 하나씩 줄여가는 기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사유()의 가벼움, 쾌활함


니체는 철학자의 이미지로 ‘가벼움’과 ‘쾌활함’을 말합니다. 이때의 이미지는 사유의 역량을 얘기하는 것이면서 실제로 일상에 드러난 철학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관념은 신체의 상태와 연관됩니다. 주위에 의존하는 게 많은 신체일수록 관념도 수동적이겠죠. 인식과 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니체도 스피노자와 비슷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구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익숙한 앎, 익숙한 인식만을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인식을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체성, 새로운 습관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철학이 의존적인 것들을 하나씩 끊어내는 문제라는 얘기와 연결됩니다. 니체의 철학적 작업인 계보학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어떤 가치판단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의심하는 것이죠. 편의상 경험과 체험을 구분해서 말하면, 경험은 우리가 익숙한 가치판단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체험이란 자신에게 작동하는 가치판단을 의심함으로써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인식한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 부분이 잘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_=;;)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정신이 팔려서 우리의 가치판단 기준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일어난 이 일은 나쁜 거고, 혹여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선판단 속에서 경험하고, 경험함으로써 선판단을 강화시킵니다. 가치의 가치를 문제 삼지 못하면 무리 속에서 가장 약한 것을 도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통은 누군가에 대한 원한으로밖에 분출하지 못하고, 삶은 부정적이고 무겁게 되는 것이죠.

니체의 인식의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세계는 어떤 실재를 가진 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느낌과 행위 자체가 세계를 출현시킵니다. 이 말은 주체화의 문제가 결국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뜻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건들과 수동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나로부터 능동적으로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나로 이행돼야 합니다. 나를 속박하는 조건들이 결여된 세계의 증거가 아닌 새로운 사유를 향한 실험 재료들이 될 수 있다면, 삶은 이전보다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니체에게 건강과 질병은 서로가 배제된 고정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체는 여러 이질적인 균들과 상호교환하며 균형과 불균형을 반복합니다. 이때 외부로부터 유입된 균에 의해 균형이 깨진 상태가 병에 걸린 것이고, 반대로 우리 안에 있던 균이 외부의 균을 제압해서 균형을 유지한 상태가 건강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는 계속 외부와의 교환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며, 건강과 질병은 신체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균형과 불균형에 대한 각각의 징후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질병은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에 대한 거리를 두게 만드는 기회입니다. 신체의 상태가 달라지면 새로운 인식도 가능해집니다. 이전과는 다른 신체적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질병은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라도 그 속에서 결여로 삶을 인식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들과 다르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신체의 역량을 일궈낼 수 있는 게 니체가 말한 가볍고 쾌활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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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30 15:10
    삶은 충만하고, 또 충만하도다! 갑자기 웃음이 납니다. 오! 규문은 풍요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