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6월 27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6-22 18:20
조회
133
우선 숙제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즐거운 학문》 5부를 읽고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라는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과제를 쓰는 동안 고려해야 할 키워드들은 ‘삶과 인식’, ‘체험과 인식’, ‘질병과 건강’, ‘고통’입니다.
간식은 지은누나와 봉선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1. 《즐거운 학문》 4부

“《아침놀》은 긍정의 말을 하는 책이며, 심오하지만 밝고 호의적이다. 이와 똑같은 말이 《즐거운 학문》에도 최고 의미에서 다시 적용된다 :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는 심오함과 장난기 어린 좋은 기분이 정겹게 손을 맞잡고 있다. 내가 체험했던 가장 경이로운 1월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 시구가―이 책 전체가 1월의 선물이다―어떤 심오함에 의해 ‘학문’이 여기서 즐거운 것이 된 건지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고 있다 :
그대는 불꽃의 창으로
내 영혼의 얼음을 흩뜨린다.
내 영혼은 이제 거센 소리를 내며 바다로 향하고
그 최고의 희망으로 서둘러 간다 :
끊임없이 더 밝고 끊임없이 더 건강하게,
자유롭게 애정 어린 의무를 가지고―
그리하여 내 영혼은 그대의 기적을 찬미한다,
그지없이 아름다운 그대 1월이여!”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p.417)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 ‘1월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즐거운 학문》이 1882년 1월에 주로 쓰여지기도 했지만, 니체에게 1월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니체에게 1월은 ‘사이’ 혹은 ‘이행’의 달이었습니다. 1월은 겨울과 봄의 사이입니다. 겨울의 죽음과 봄의 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달이죠. 또한 1월의 성인이기도 하고 니체가 《즐거운 학문》 4부에 붙인 시의 제목이기도 한 ‘성 야누아리우스’. 야누아리우스가 상징하는 것은 ‘양성성’이죠. 이는 니체 자신의 상황과도 맞아떨어집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2판 서문에서 책을 쓰던 당시의 자신을 ‘회복기의 환자’라고 소개하고 있죠. 《즐거운 학문》에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부터 시작된 ‘병’을, 비판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이제 새로운 건강을 맞이하는 니체의 ‘해빙기의 언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스피노자가 《즐거운 학문》을 읽었다면 ‘기쁨의 역량’으로 충만한 책이라고 평했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니체의 긍정이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정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적인》부터 이어진 비판의 과정과 무관하게, 혹은 그러한 과정을 또다시 부정함으로써 도달하는 긍정, 기쁨, 건강이 아니라는 것. 《즐거운 학문》 307절에는 니체적 의미에서의 부정과 긍정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비판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유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이전보다 진리에 더 가까워짐으로써 이전에 믿고 있던 미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비판이란 진리에 의존해 있으며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지니고 있던 과거의 견해를 죽여버린 것은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삶”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우리는 부정해야 한다고. 왜냐,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에. 니체에게 부정과 긍정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죠(어린아이는 사자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 있어 부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소극적 긍정(자기보존)은 긍정이 아니고, 진리나 초월자를 요청하는 나약한 부정은 부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긍정-부정은 늘 ‘이행’이며, 회복기에 있는 자만이 진정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즐거운 학문》 4부를 강의하시면서 채운샘이 강조하셨던 것은 ‘양식을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295절을 비롯한 몇몇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양식을 부여하는 일, 습관을 창조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조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니체는 습관 따위는 버리라고, 양식을 해체하라고 말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즉흥적 삶이란 그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흥적 삶은 무엇도 창조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즉흥적 삶도, 규범적 삶도 아닌, 단기적 습관이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이것이 “수많은 사물과 상태를 그 달콤함과 쓰라림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알게 만들어주는 더없이 귀중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물과 상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이는 세계와 다른 관계를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나무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습니다. 나무는 거리를 꾸며주는 가로수고, 우리는 그 앞을 지나쳐가는 행인(관찰자)입니다. 가로수-행인이라는 익숙한 관계의 지속은 ‘진실’로 둔갑하여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그 관계 양식에 의존해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사물의 밑바닥’이란 이러한 고정된 관계항을 깨고 다르게 보고 느끼는 시도를 할 때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채운샘은 고흐의 예를 드셨습니다. 고흐의 독특한 풍경화는 그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다르게 관계 맺고 다르게 느끼려는 적극적 시도와 수련의 결과물이라는 것. 이렇게 시도하는 사람에게 습관은 필연적으로 단기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계와 다른 관계맺음을 시도한다는 것은 충동과 감각에 무조건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생겨남 자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죠. 그것을 어떻게 조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늘 동시적으로 제기됩니다. 가령 마약은 우리의 감각을 해체하고 분기시킬 수 있을지언정 능동적인 관계맺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죠.

2. 진리의 계보

언제 스스로가 ‘진실하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가끔 제가 얼마나 습관적으로 ‘진실함’을 승인해줄 초월적 심급을 요청하는지 느끼곤 합니다. 가령 의견이 충돌해서 논쟁을 할 때 저는 자주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옳은가’를 증명하려듭니다. 그러나 ‘누가 더 옳은가’를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복종할 초월적인 진리를 스스로 외삽하는 꼴입니다(장자와 푸코가 토론을 싫어했던 이유). 그것이 청중이건, 법이건, 합리성이건 간에 옳고 그름을 판정해줄 제3자(판관)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죠. 제3자를 끌어들이는 한 우리는 고해성사를 하며 스스로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종교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진리는 인식의 가장 무력한 형태입니다. 인식이 진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으로부터 진리가 뒤늦게 파생된다는 것이죠. 고대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진실을 판정해달라고 누구에게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리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제 3자에 의해 판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진리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이는 내내 안고가야 할 화두인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 함께 읽었던 자료(《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푸코는 니체의 진리비판을 매우 간결하게 (그러나 여전히 난해하게ㅋㅋ;) 정리하고 있습니다. 푸코가 강조하는 것은 진리의 뿌리가 의지라는 점입니다. 진리-의지, 진리를 요청하는 의지, ‘진리가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의지로부터 진리가 파생된다는 것.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의지는 진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 ‘영원불변하는 참된 것’을 위한 자리는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죠. 진리-의지는 진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들(욕망, 충동, 본능)을 자신으로부터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진리-의지는 진리와 의지를 결합시켜줄 ‘자유’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요청된 자유가 바로 ‘자유의지’이며, 욕망과 충동으로부터의 자유죠. 진리의 존재와 자유는 동일시되며 이로부터 형이상학적 “존재론(참된 것의 자유는 신 또는 자연일 것이다)”과 금욕주의적 “윤리학(의지의 의무는 금기, 포기, 보편으로의 이행일 것이다)”이 따라 나옵니다.

니체는 진리와 의지를 결합시킨 것이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었음을 폭로합니다. 진리-의지의 절합에는 진리를 외삽하는 의지의 폭력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진리가 인식 이후에 오는 것이라는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할까요?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이상주의를 대신에서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신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들이고 무신론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저편’을 사유하는 일입니다. 이때 ‘저편’이란 진리를 초월한 자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생성되는 진리 이전의 차원을 가리킵니다(니체가 ‘선악의 저편’을 말할 때). 이러한 차원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인식-진리-도덕의 카르텔을 깨트리고 다른 행위양식을 구성함으로써 ‘자기 진실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는 진리의 역사성을 사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진리 자체에 의거하지 않고 어떻게 담론적-비담론적 실천 속에서 진리가 출현했는지를 질문하는 일.

진리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의미를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무(無)로 돌아가는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의미가 없는, 의미가 분기하는 차원으로서의 무의미(non-sens)를 사유하는 것. 이는 능동적으로 의미를 파괴하고 또 생산하는 과정(이행)을 말합니다.
전체 2

  • 2018-06-22 19:34
    끊임없이 더 밝고, 끊임없이 더 건강하게! 아, 1월! 1월처럼 공부하자! ^^

  • 2018-06-24 13:35
    진리에 대한 니체의 전복은 보면 볼수록 대단한 것 같습니다. 진리가 어디있냐! 라고 얘기하는 데서 끝날 줄 알았는데, 진리가 어떻게 무력한 것인지, 왜 실상을 담보하지 않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더군요. 사실 니체하면 충동이 떠올라서 그의 글쓰기가 논리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니체는 예민하게 사물을 관찰하면서도 글을 쓸 때는 손 가는 대로 쓰지 않았더군요. (너무 당연한 소린가 ㅋㅋㅋ) 쨌든 천재가 예술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님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글을 쓰면 이렇게 되는 건가... 아무튼 장자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자유가 느껴지니 머리가 아파도 읽을 맛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