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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죽음, 매순간 나의 소멸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21 11:21
조회
289

죽음, 매순간 나의 소멸



글 / 경아




 

‘나는 여기서 우기도 여기서 겨울도 여름도 지내리라’라고 어리석은 자는 생각하니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20. 길의 품, 624쪽)

일주일 밖에 자기 생이 남은 줄도 모르고 오백 대의 수레에 바리바리 실어 온 잇꽃으로 물들인 옷을 팔 계획에 여념이 없는 상인 마하다나의 모습을 보시고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가 아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 아이의 수준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음이 이해될 때 그저 미소 지으며 바라보기도 한다. 법구경에 나오는 인연담 중 어렵게 깨달은 직후 집에 돌아가는 중에 어이 없이 죽거나, 부드러운 법복에 애착하다 입어보지도 못하고 죽어서 법복 속의 이로 태어나는 장로 띳사의 죽음처럼 예기치 못한 어는 순간 불현듯 들이닥친다. 누군가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데도 깨달음에 매순간 전심을 다하고 누군가는 죽는 순간마저도 집착을 놓지 못한다. 방일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항상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어리석게도 천년만년 살 것 마냥 방일하고 있는 우리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있다.

만약 우리가 각자 죽음의 날을 알고 있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죽음이 바로 내일이라거나, 1년 뒤, 10년 뒤 아니면 90살까지 근근이 살아간다고 정해져있다면 지금 나의 행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당장 내일이라면 지금 숙제를 멈추고 가족들과 이별 의례를 치루고 있을 것 같다. 어떤 말들을 할 것인가? 고마웠다고 사랑했다고 상상만 해도 낯간지러운 상황이긴 하다. 그리고 만약 1년 뒤라면 무엇을 할까? 회사 다닐 때에는 회사 그만두고 1년 동안 먹고 싶었던 것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회사 다니는 것은 당장의 하고 싶은 일을 유예하고 돈과 미래를 위해 담보 잡힌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1년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예전처럼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단지 내가 지금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할 것 같다.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나를 받아주기만을 바랬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바라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그것으로 끝나도 좋으련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라는 생각에 간섭하려는 마음, 서운해 하는 마음 등이 더 크기 때문에 그 만큼 불만도 더 커졌던 것 같다. 1년 뒤 죽음이 온다면 관계를 정리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지금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좀 불편하지만 묻어두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삼스레 지금 해야 할 일들의 우선 순위들이 자연스레 매겨진다. 만약 10년 남았다하면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하면 그 10년을 활기차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것 같다. 그래서 1년 단위로 배우지 못했던 운동을 새로 시작한다든지 가보지 못한 곳을 가서 살아본다든지 시도를 해볼 것 같다. 솔직히 10년 열심히 공부해서 깨닫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지금 공부를 다른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대신하고 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어떤 조건에서든 공부가 아직은 1순위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 1년 뒤, 10년 뒤 그리고 30년 뒤로 딱 정해져 있다면 과연 사람들이 깨달음을 향해 방일하지 않고 정진할까? 만약 죽음이 몇 년 뒤로 정확히 정해져 있다면 병들고 늙어가는 것도 지금처럼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사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괴로움도 줄어든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죽음의 날을 통보받았을 때 이렇게 집착이 줄고 괴로움이 줄어들까? 적어도 뒤로 미루면서 하기 싫었던 것을 지금만큼은 억지로 참으면서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생에서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자는 쾌락주의로 빠질 듯도 한데, 이 방식은 죽음을 ‘나의 끝’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윤회를 강조하고 법구경의 인연담에서 전생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인과를 설명하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방점은 지금의 선택이 어떤 업으로 연결되는 지에 찍힌다. 이생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쾌락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가 서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한 개체의 소멸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이 개체의 죽음이라면 우리는 왜 윤리적으로 살아야하는가? 사는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을 남들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보아도 부모가 자식을 살리는 것 같지만 자식이 부모를 살아가게 하기도 한다. 내가 나로 성립하는 것은 물질적, 인간적 관계 안에서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꽃들이 피었다 지고 작은 벌레들이 스러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의 죽음은 그것과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태어난 날이 나의 시작이고 내 호흡이 멈추는 날이 나의 끝이라는 이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어떤 것도 실체로 있지 않고 나는 연기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는 무아를 이야기한다. 에너지적 조건이 물질화해서 형색을 갖추고 작용을 하면서 그 에너지적 조건과 물질적 조건이 스러지는 과정을 나의 삶이라 칭할 뿐이다. 그 물질적 조건과 에너지적 조건이 나라는 이름을 통해 실체로 나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이름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실체는 없음에도 말이다. 내일 어떤 조건 속에서 해체될 수도 있고 1년 뒤, 10년 뒤 언제든지 어떤 조건 속에서 해체될 수 있다. 결국 죽음이란 그 물질적 조건과 에너지적 조건이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일 뿐이다. 흙의 자양분이 되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진 어떤 기억이 되든지 말이다. 그렇게 개체로 보면 불연속적이지만 전체적 관점으로 확장하면 끊어짐이 없는 연속적 흐름이다.

계획된 죽음이든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이든 죽음을 개체의 소멸로 생각하는 한 그 죽음을 긍정할 수 없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 생과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생은 죽음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생이라 할 수 없고 생을 전제하지 않은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죽음이 성립하는 조건 전체를 긍정해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면 나의 죽음 또한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한 치의 자연법칙도 벗어날 수 없는 돌과, 꽃과, 벌레와 다름없다. 단지 감사하게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유한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을 살 수 있다. 이 무한은 무한정 늘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유한수 사이에 펼쳐지는 무한수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행하라. 내일 죽음이 올지 누가 알리오. 우리가 많은 군대를 거느린 죽음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하루를 살더라도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사는 자는 행복하다고 적멸에 든 성자는 선언한다.”라고 말씀 하신다. 무한 수명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지금 여기에 우주만물의 모든 것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온 마음을 다하는 그 순간, 내가 소멸한 그 순간을 영원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나의 소멸, 그것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매순간 겪어야하는 죽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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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3 19:30
    자꾸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빠지게 하는 글이네요. ㅎㅎ 정말 생각해볼 내용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죽음과 관련된 거라 참 쉽지는 않네요. 그러다가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