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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1-5 "음악 표기법의 기원"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16 22:24
조회
309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오정아



1-5. 음악 표기법의 기원




 

우리는 글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말과 노래가 뚜렷이 구분되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글자와 단어로 기록되는 하나의 형식만 있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무시케(mousike)’라는 음성 예술(vocal art) 분야가 있었지만, 에릭 해블록(Eric Havelock)이 설명하듯이, 그리고 이미 플라톤의 언급에서 보았듯이, “선율로서의 음악은 오직 무시케의 일부였고,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선율은 노랫말의 하인으로 남아 있었고, 선율의 리듬은 말의 장단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Havelock 1982: 136).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음악’에 사용할 표기법을 만들지 못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해블록은 추측한다. 그들은 음악과 말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글과 음악을 굳이 분리해서 표기할 이유가 없었다(같은 책: 345).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 음악 표기법이 존재했을 가능성과 그 특징에 대해서는 고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틴 웨스트(Martin West)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는 하나도 아닌 두 개의 병렬 표기법이 존재했으며, 하나는 노래를, 다른 하나는 악기 연주를 위한 것이었다(West 1992: 7). 하지만 이 표기법들은 아주 제한적인 기능을 지녔고, 소수의 전문 연주가들에게만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리듬이나 음의 길이를 따로 명시할 필요는 없었다. 긴 소리와 짧은 소리를 번갈아 반복하는 것으로 노랫말의 운율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129-30)

웨스트도 인정하듯이, 심지어 노래의 선율도 부분적으로 구어의 특징을 기반으로 했다. 특히 그리스인들이 ‘프로소디아(prosoidia),’ ‘함께 노래 부르기(singing along)’라고 부른 음조의 변화를 바탕으로 했다. 말을 묘사할 때도 선율과 마찬가지로 ‘높은/낮은, 긴장/완화’ 같은 대비되는 어휘들을 사용했다(West 1992: 198).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아리스토크세누스(Aristoxenus of Tarentumi)―그는 선배들의 작업을 두고 오만불손한 발언을 해댄 사람으로도 유명하다―는 둘의 유사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말의 음조와 노래의 선율 사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말하거나 노래할 때의 목소리는 이리저리 배회하듯 높은음과 낮은음으로 옮겨가지만, 말할 때는 그 변화가 지속적인 반면 노래할 때는 간격을 두고 이어진다.

변화가 지속적이면 우리는 말이라고 부른다. 대화를 나눌 때 목소리는 마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는 듯 변화하기 때문이다. 간격을 두고 이어진다고 했던 다른 형식에서는 정반대의 특성을 보인다. 목소리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는 것으로 보이면 그는 더 이상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아리스토크세누스, 《화성의 기초(Elimenta Harmonica)》 1권, Barker 1989: 133)

아리스토크세누스도 글과 구별하여 음악을 표기한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선율을 표기하는 것이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자체를 비웃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서만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인식과 기억이라는 두 요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음악의 내용을 따라가는 다른 방법은 없다.”(같은 책: 155)

웨스트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전문 가수들 사이에서 노래의 선율을 표기하는 합의된 체계가 널리 사용되었다. 텍스트의 음절 위에 문자 기호를 붙여서 음의 높낮이를 지시하는 체계였다(West 1992: 254). 하지만 이런 기호들은 기억을 돕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가수들은 노래를 배울 때 음을 뜻하는 기호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오로지 귀로 들어서 배웠다(같은 책: 270). 운문의 텍스트는 그런 기호 없이 작성되었고 나중에 기호가 덧붙여졌다. 현대의 악보에 운지(運指) 기호나 활의 방향을 지시하는 기호가 덧붙여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처럼 텍스트를 ‘교정’하는 작업은 노래뿐 아니라 연설 분야에서 더욱 폭넓게 응용되었다. 글자 위에 다양한 표시를 덧붙여서 연설의 중요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낮추도록 지시하는 용도로 쓰였다.

노래와 비슷한 이런 음조 변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바로 앞에서 만난 ‘프로소디아’다. 이 단어는 로마인들에 의해 ‘아드-칸투스(ad-cantus)’로 번역되었고, 이후 ‘아켄투스(accentus, 강세)’로 바뀌었다(같은 책: 198).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 쓰인 강세 표시 체계는 기원전 200년경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의 도서관 사서였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of Byzantium)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표시들은 ‘끄덕임’ 또는 ‘신호’란 뜻의 그리스어 단어인 ‘네우마(neuma)’로 불렸다. 네우마에는 목소리의 상승을 지시하는 양음(揚音, the acute)과 하락을 지시하는 억음(揚音, the grave)의 기본 강세가 있었고, 더욱 복잡한 억양을 나타내기 위해 이 둘을 결합해서 V나 N 모양으로 표시하기도 했다(Parrish 1957: 4). 그레고리안 성가에 도입되고 ‘네우마(neumes)’라 불린 표기법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이것은 글과 구분해서 사용한 서양 최초의 음악 표기법이었다.



(위) 그림 1.4  / 네우마가 표시된 9세기 말 필사본, 생 갈 수도원.

정확히 언제부터 이 네우마가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5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사본 중 네우마가 표시된 최고본(最古本)은 9세기에 쓰인 것이다(그림 1.4 참조). 더구나 글 위에 표시된 기호들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레고리안 표기법에서도 양음은 원래 모양을 유지하며 ‘비르가(virga, 막대)’라고 불린 반면, 억음은 ‘풍툼(punctum, 점)’으로 줄어들었다. 이 두 개의 기본 기호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네우마를 만들 수 있었다. 점 뒤에 막대를 붙인 ‘포다투스(podautus, 발)’는 저음에 이은 고음을 뜻했고, 막대 뒤에 점을 붙인 ‘클리비스(clivis, 언덕)’는 그 반대를 뜻했다. 두 점과 하나의 막대가 결합된 ‘스칸디쿠스(scandicus, 오르막)’는 올라가는 세 개의 음을, 하나의 막대와 두 개의 점이 결합된 ‘클리마쿠스(climacus, 사다리)’는 내려가는 세 개의 음을 의미했다. 또 한 개의 점, 막대, 또 하나의 점이 결합된 ‘토르쿨루스(torculus, 굴곡)’는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가는 음을 뜻했다.

기호의 구성이 서로 다른 네우마 표기법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9세기를 거치면서 생겨난 듯하다. 이 표기법들은 좀더 복잡한 네우마가 쓰인 방식에 따라 구분되기도 했다. 네우마의 모양이 네모나게 변화한 것은 13세기에 갈대 펜이 깃펜으로 대체된 결과였다. 네우마에 가는 수직선이나 굵은 수평선 또는 사선이 붙고, 네모와 다이아몬드 블록으로 각 음이 표현되었다. 이 주제에 관한 칼 패리시(Carl Parrish)의 권위 있는 저작에서 우리는 주요 그룹의 가장 흔히 사용되던 네우마 기호들을 볼 수 있다(그림 1.5). 시간순으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변화했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복잡한 음을 나타낸다. 맨 오른쪽 줄은 현대의 표기법에서 그에 상응하는 음표들을 보여준다.



(위) 그림 1.5  / 그레고리안 표기법의 네우마. 패리시(1957: 6).

가장 초기의 표기법들은 어떤 음으로 노래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거의, 혹은 아예 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노래의 본질은 노랫말의 반향에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미 그 곡을 외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율은 단지 목소리의 장식음으로 여겨졌고, 네우마는 전적으로 글의 부속물이었다. 패리시에 따르면 네우마는 ‘선율을 상기시키는 체계’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각 음절에 적용할 운율의 미묘한 차이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Parrish 1957: 9). 하지만 어떤 표기법은 상상의 수평선 위에 다양한 간격으로 기호를 넣어서 음의 높이를 표현해야 했다. 10세기 무렵의 필사본에는 상상의 선이 실제 선으로 바뀌어 문서에 들어가 있다.

현대의 표기 체계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단계를 밟은 것은 11세기의 귀도 다레초였다. 귀도는 네우마가 한 곡에서 얼마나 자주 반복되든 정해진 열에 표기할 것을 권장했다. 이 열들을 구분하기 위해 선들이 가깝게 그려졌고, 선의 위, 또는 사이의 공간이 소리의 열이 되었다. 귀도가 교황 요한 19세 앞에서 입증해 보였듯이, 이런 식으로 표기하면 처음 듣는 노래도 배울 수 있었다. 교황은 귀도의 발명에 몹시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시험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으로 전해진다(Strunk 1950: 117-20).

지금 보면, 노래의 선율을 표기하는 이 체계가 우리에게 익숙한 오선 악보의 전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완성된 음악 표기 체계로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노래에서 음악적 본질이 노랫말의 억양에 있다고 간주된 만큼, 네우마는 노래의 부속물일 뿐이었고 노래는 먼저 글로 작성되었다. 현대의 기악 악보에 표시되는 운지기호처럼 네우마는 주석과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즉 음악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노래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악보에서 운지기호를 모두 지운다 해도 음악에는 아무 손상이 없다. 마찬가지로 중세의 원고에서 네우마를 모두 지워도 노래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각 경우에서 손상을 입는 것은 기억을 상기시킬 도구를 잃은 연주자와 가수의 기량일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지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문자 기호들처럼 네우마는 전적으로 기억을 돕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배우는 학생들이 그 노래를 암기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했다. 귀도는 이렇게 자랑하기도 했다. “몇 사람은 사흘도 안 되어 모르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방법으로는 여러 주가 걸려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Strunk 1950: 124) 하지만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여전히 사흘이 걸렸고, 그 노래를 암기하기 전에는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다. 하지만 표기법의 도움으로 학생들은 노래를 훨씬 빨리 암기할 수 있었다.

오선에 음표나 연결선을 표기하는 것이 독립적인 기보법으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수 세기가 흐른 뒤였다. 고어가 지적하듯이 “음악이 텍스트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Goehr 1992: 133). 근대의 악보에서 네우마는 엄청난 정교화 과정을 거쳐서 글과 구분되는 체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반면 원고에서는 글의 틈새에, 구두점의 형식으로만 남았다. 구두점의 기이하고 모호한 역사에 관해서는 따로 한 장을 할애해야 마땅하겠지만 여기서는 네우마와 구두점이 같은 관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즉 텍스트를 전달하는 연설가를 돕기 위해 미리 작성된 원고에 표시를 하는 관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만 언급하겠다(Parkes 1992: 36).

쉼표, 콜론, 마침표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였다. 그는 그리스 문헌들에 주석을 달기 위한 표기 체계의 일부로 이 구두점들을 도입했는데 네우마의 전신인 부호들도 거기에 포함되었다(Brown 1992: 1050). 한참 뒤인 9세기경에 다른 부호들―풍투스 엘레바투스(punctus elevatus), 풍투스 인테로가티부스(punctus interrogativus)(물음표의 전신), 풍투스 플렉수스(punctus flexus)―이 추가되었고, 이 부호들은 멈춤을 지시할 뿐 아니라 의문문이나 종속절 끝에 붙어 적절한 억양을 지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줄리앤 브라운(T. Julian Brown)에 따르면 이 새로운 부호들의 기원은 다름 아닌 “네우마라 불리는 음악 표기 체계로, 이는 적어도 9세기 초부터 그레고리안 성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Brown 1992: 1051)!

음악이 말에서 분리되자, 나눌 수 없는 시적 통일체였던 노래는 이제 말과 소리라는 두 요소의 합성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하나의 형식으로 기록되던 노래, 즉 글자와 단어로 쓰이고 강세와 억양을 지시하는 네우마와 구두점으로 장식되던 노래가 각각 분리된 줄로 기록되고 동시에 읽히는 글과 악보로 나뉘게 되었다. 오늘날 노래의 가사는 악보에 덧붙여지는 글의 형태로 쓰인다. 그 글을 제거해도 여전히 목소리는 남지만, 그것은 말이 없는 목소리다. 악보를 제거하면 소리도, 목소리도 사라지고 오직 일련의 말들만 남는다. 그 말들은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 1.6에서, 남아 있는 구두점들―쉼표, 인용부호, 괄호, 세미콜론 등―은 단지 텍스트의 통사적 연결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 노래를 부를 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율의 구조나 악구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노래를 방해한다. 따라서 가사를 음악에 맞출 수 있게 변형 구두점 하나가 가사 ‘안에’ 하이픈의 형식으로 도입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원래보다 텍스트의 길이가 길어졌다. 해블록이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말을 음악의 선반 위에 얹는다.” 말을 늘이거나 압축하고, 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맞춰 억양을 바꾼다(Havelock 1982: 136). 음악은 이제 말의 주인이지 하인이 아니었다. 한때는 노래의 음악적 본질이었던 가사는 이제 부속물로서 음악에 ‘덧붙여’진다. 하지만 소리는 어떻게 글에서 추방된 것일까? 종이 위의 글은 어떻게 목소리를 잃게 되었을까?



(위) 그림 1.6 병렬 구조로 기록되는 가사와 음악. 캐롤 ‘한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While Shepherds Watched),’ 마틴 쇼(Martin Shaw) 편곡. Dreamer, Vaughan Williams and Shaw (1964: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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