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동화인류학 강의 후기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1-04 21:50
조회
116
기관 없는 신체

오늘 수업은 들뢰즈 & 과타리의 개념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 중 하나인 ‘기관 없는 신체’의 설명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프랑스어로 Corps sans Organes인데요, 각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Corps: 신체, sans: -가 없는, Organes: 기관들. 우리 몸의 기관에는 입도 있고, 눈도 있고, 다리도 있고, 팔도 있습니다. 각 기관은 특정 기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입이 먹는 것에, 눈은 보는 것에 쓰이는 것처럼요. 그런데 입은 먹는 것에만 쓰이지 않습니다. 화가 나 누군가의 팔을 입으로 콱 물어버린다면 입은 갑자기 무기로 돌변해 버리죠. 이것이 들&과가 말하려 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기관들이 특정 기능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관의 기능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기관이 없어지면 다른 기관이 그 기관이 맡았던 기능을 대체합니다. 눈이 없다면 다른 기관을 통해 세상을 감각하고, 다리가 없다면 엉덩이로 걷거나 기계와 접속해서 다리를 대신합니다.

  따라서 들/과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는 인체의 모든 기관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을 과감히 깨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개체들에 어떤 기능을 부여하는 것도 부정합니다. 근대 이전 사회는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모든 백성들이 선비, 농민, 장인, 상인 등 각 직업이 갖는 기능을 중심으로 나뉘었습니다. 누구는 공부해서 정치를 하고, 누구는 농사짓고, 누구는 장사를 하는 등 각각이 가지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것을 들&과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관'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는 자본주의 사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회 안에서 개인은 각자 어떤 기능을 하는데요, 그것을 우리는 직업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체 안에서 우리가 특정 일을 하는 기관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우리 개인은 이 직업 안에만 갇혀있지 않는 욕망의 흐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욕망하는 기계인데요, 우리 모두는 어떤 ‘기능'으로 규정되기 전 욕망-기계입니다. 흐르는 욕망들이 코드화 되어 어떤 직업(또는 어떤 다른 표상)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영토화 되어 그 직업이 만들어 내는 관계망 안에 접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 또한 사회에 의해 코드화 됩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프고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무섭다던지 하는 특정 상황에 연결되는 특정 감정들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진부한 연결고리이죠. 프랑스 시인이자 연출가 앙토냉 아르토는 사회가 코드화하는 감정들에 맞서는 예술작품을 만듭니다. <잔혹연극론>에서 그는 습관으로 굳어진 우리의 감정들을 깨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습관은 사회적으로 굳어진 관념, 표상을 말합니다. 아르토에게 정해진 내러티브와 감정선은 있지 않습니다. 아르토의 연극은 정해진 텍스트에 따라 ‘재현’(represent)'하는 행위가 아닌 그야말로 신체적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의 연극에서 배우는 매 순간이 창조의 순간인데요, 배우는 무대와 또는 관객과 호흡하면서, 특정 동작 또는 소리가 발생시키는 ‘신체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에 방점을 둡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그의 신체와 그 신체를 둘러싼 것들과의 호흡 자체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개념화'되지 않은 신체성을 표현하기. 기관 없는 신체.

분열증

  어느 하나의 개념이나 표상으로 다 환원되지 않는 흐름들. 분열증은 과정일 뿐, 끝이 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은 분열증을 놓고 정신분석학을 믿지 않아서 그런다라고 이야기하며 치료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못합니다라고 읽습니다…). 정신분석학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은 편집증 뿐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욕망하는 것이 고정되어 있을 때에만 그 욕망이 향하는 지점을 해석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꿈과 환상을 ‘무대' 위에 올립니다. 가령 똑같은 꿈을 계속 꿀 경우에는,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에 어떤 것이 작동하는데 사실 꿈에 나오는 A가 사실은 ‘엄마'였다, ‘아빠'였다는 해석을 합니다. 이것을 표상적(representative)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꿈에 나오는 대상을 현실의 어떤 것으로 규정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입니다. 나의 욕망이 표출되지 못한 지점은 반드시 꿈으로든 뭐든 회귀하며 그 회귀한 것을 현실의 어떤 대상으로 치환하는 순간 치료는 완료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은 분열증 처럼 욕망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흘러가는 경우에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으려면 욕망이 머물러야 하는데, 욕망이 흘러가는 분열증은 해석의 여지가 자꾸만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은 그래서 분열자들을 보고 “정신분석을 믿지 않는다"라고 해석해버립니다. 들/과는 정신분석학이 해석하지 못한 분열자들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체’ 또는 ‘벨브'처럼 신체를 체험한다고 합니다. 마치 몸이 체 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외부에 열려 항상 진동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분열자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세포막처럼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합니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것처럼 견고한 주체인 ‘나'가 먼저 있고 그 밖의 외부와 관계맺는 순서가 아닌, 관계가 선행하고 그 관계를 맺는 ‘나'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기계이고, 욕망기계는 접속, 작용을 본질로 합니다. 욕망은 절대로 어떤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움직인다는 것,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욕망이고, ‘대상'이나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욕망함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돈'을 욕망한다, 또는 ‘그 사람'을 욕망한다고 했을 때, 정말 그 돈 만을 원하는 것인지 또는 그 사람 전체를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실제로는 그 돈이 이루는 어떤 조건을 욕망하는 것일수도 있고 또는 그 사람의 일부분만을 욕망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사회체는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이고, 그 속에 욕망-기계들인 우리가 있습니다. 사회체는 자본주의일수도, 전제군주체제일수도, 원시부족 시스템일수도 있습니다. 각 사회체의 추동력,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되는 이 ‘기적기계'는 욕망이 흐르도록 하는 ‘홈'을 만듭니다. 욕망들이 ‘자본'이라는 길로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죠. 이 홈을 따라 작동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무능력'이라 명명합니다. 돈이 안되는데 그걸 왜해?라는 질문은 이미 흔하죠.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항상 돈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넘쳐흐르는 힘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도주선을 만듭니다. 들/과는 우리의 욕망을 탈영토화의 1차성이라 명명합니다. 도주하는 힘을 1차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죠.

욕망의 능동성

 프랑스의 시인 조에 부스케는 아버지의 압박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다 느끼고, 항상 죽기를 열망합니다. 세계 1차대전때 참전하여 항상 프론트 라인에서 전투를 했었는데요, 포탄이 떨어지는 순간 ‘아, 드디어 내가 바라는 대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채로요. 처음엔 절망의 날들을 보냈지만, 점차적으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고 합니다. 몸의 일부를 쓸 수 없는채로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 그는 새로운 사유를 하게 됩니다. “나보다 먼저 나의 상처가 있다.” 부스케는 ‘나를 통해 삶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묻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상처를 통해, 삶을 통해, 죽음을 통해 ‘나’는 다른 지점으로 넘어갑니다. ‘상처', ‘삶', ‘죽음'이라고 명명지어지는 새로운 물질들의 배치, 힘의 벡터들 속으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새로운 장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 만큼 능동적으로 예상치 못한 삶의 국면들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스케는 말합니다.

 욕망의 능동성은 모든 것 속에서 ‘구성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파괴하는 힘'과도 접속합니다. 이 힘에는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완전한 것도 불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무의식에 직조되어 있는 사회적 조건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할 때만이 그것을 바꿔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우려면 돈을 벌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은 참 수동적인 욕망입니다. 자유가 어떤 조건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진정한 자유란 자유를 제약한다고 생각되는 조건들을 능동적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이지 않을까요? 자유롭기 위해 돈을 번다면, 그 과정 속에는 돈을 버는 나만 있을 뿐 자유로운 나는 없습니다. 왜 돈을 벌기를 원하는지, 돈을 벌기 원하는 나는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돈을 욕망하는지 사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욕망하는 나를 성찰하기 보다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 속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는데요, 바로 사회가 내 바깥에 있는 듯이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나를 구성하는 ‘막'은 있지만 이 막에는 구멍이 많아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욕망을 주고받습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을 투여받고, 투여받은 욕망을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욕망을 사회에 재생산합니다. 들/과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와 나 사이에 어떤 선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같이 돌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가족주의

1. 자본주의

우리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욕망에 자유롭지 않을때, 그것은 실은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망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돈을 버는 것에 쏠려 있기 때문에 돈을 번다는 것이죠. 들/과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자유의지'로 젖을 빠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욕망-기계가 젖을 강렬하게 욕망하는 것이죠. 알콜중독인 사람 또한 자유의지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술을 마심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들/과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위계화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신이 살던 토지로부터 떼어내어, 계급도 철폐하고 그들은 다같이 ‘평등한' 개체로서 ‘어디서든 자유롭게' 개인이 알아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1’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균질화' 됩니다. 학교에서는 같은 나이끼리 묶어서 공부하고, 이러한 ‘평등한 출발점'에서부터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성적을 부여하여 위계질서를 성립합니다. 사실 사람들의 특성은 각자 다 다른데, 그러한 개별성을 무시하고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듯이 ‘기회의 균등'을 이야기합니다. ‘노력한 만큼 가져갈 수 있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일’하도록 만듭니다. 들/과의 비판지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신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명명하고서는 돈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구속하는 것이죠. 엄청난 노력으로 성공을 거머쥔 사람들의 사례가 많이 조명되는 것은,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환상을 부여하여 끊임없이 돈을 벌게 만듭니다.

2. 가족주의

자본주의는 개인을 ‘탈영토화' 그리고 ‘탈코드화’ 시켰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살던 땅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하고(탈영토화), 신분철폐로 다같이 평등한 인간이 되었습니다(탈코드화). 이제 개인들은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 위해 공장으로 몰려듭니다. 하지만 개인은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등 ‘가족'이 생기면 사정은 달라지죠. 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족주의'라는 것인데요, 들/과는 탈영토화 그리고 탈코드화된 개인들이 다시금 가족이라는 영토로 들어가(재영토화) 돈벌이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듭니다. 자신 아니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이 ‘험한 세상'에 그래도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는 것이죠. 이 때부터 부모는 아이를 위한 모든 역할을 다 합니다. 함께 노는 친구, 밥 먹여주고 돌보아 주는 유모, 각종 지식을 알려주는 교사, 아플 때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 내가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경찰 등. 전근대 사회에서는 특정 지역에 계속 정착해있는 형태로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굳이 엄마나 아빠가 이런 모든 역할을 맡아도 되지 않아도 되었다면, 근대가족은 모든 역할이 부모에게 오롯이 지워집니다.

 견고해진 근대 가족관계에서 그나마 남성은 ‘숨통'을 트일만한 사회적 영역이 있는 반면, 여성과 아이는 상대적으로 그러한 영역이 제한되어 있어 이것이 신경증과 편집증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출구 없는 리비도의 왜곡이 일어난 것인데요, 동성애나 성적변태에 관한 담론들이 증가한 시점도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동성애를 배척합니다.

n개의 성

들/과는 세상에는 남성/여성 뿐만이 아닌 n개의 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규정적 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죠.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가족주의는 세상의 성이 ‘부모'를 이룰 수 있는 남성, 여성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우리의 리비도는 이성을 향해만 가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은 물론 사물을 향하기도 합니다. 나는 매끈한 아이폰의 곡면을 보면서, 또는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만지면서도 흥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들/과는 “진실로 성욕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합니다. “관료가 서류를 애무하는 방식 속에, 재판관이 판결하는 방식 속에, 사업가가 돈을 흐르게 하는 방식 속에,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를 비역질 하는 방식 등 속" 등등. 이것을 n개의 성이라고 합니다. (<안티오이디푸스>, 489)

 따라서 들/과는 가족 안에서 머무르는 리비도를 사회적 투자로 전향하려면 다른 것(예를 들면 예술작품)을 통해 승화한다던지 탈-성욕화를 해야 한다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합니다. “진실로 성욕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만 혼자 남겨져도 살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버려진다면 모래와, 또는 선인장과 리비도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들/과는 그것이 욕망을 가두는 수동성 내지 무능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리비도를 재구성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아빠나 엄마의 사랑을 애인에게서 찾는 것은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재생산하며 수동적으로 그 관계에 의존하는 것일뿐,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부모처럼 기댈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일부일처제의 억압을 뚫고 가는 것은 다부다처제가 아닙니다. 리비도를 다른 곳에 접속시킬 때 일부일처제의 욕망구조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다른 애인을 찾는다는 것은 도처에 자신의 아내/남편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벗어날 수 있어야만 영토화도 가능합니다. 리비도는 흐름이 본질이기 때문에.

욕망의 해방

‘자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억압을 다 해제하는 것일까요? 세상에 완벽한 억압의 해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실험'해야 합니다. 내 욕망이 어디에 고착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출구를 찾기를 실험하는 것이죠. 들/과가 이야기했듯이 욕망은 끊임없이 흐르며, 끊임없이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지옥으로 내려가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고 지상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다시 에우리디케는 지옥으로 송환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의 리비도, 욕망입니다. 무언가를 욕망하다가도 다른 것이 오면 금새 그곳으로 욕망이 쏠리는 것. 따라서 우리는 흐르지 않고 고인 욕망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관계가 갇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돈을 쌓아두기만 해서는 안되고, 잘 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머무르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국면으로 접속하고, 리비도가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들/과는 사회적 압력을 부정하는 것도,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사회'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미약하게 보이는 개인일지라도, 그 개인이 바뀌면 그 주위의 관계장이 바뀌며, 그 관계장이 맺는 관계장이 바뀔 수 있다고 들/과는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끊임없이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처럼요.

이렇게 써놓고 봐도 사실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조에 부스케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질문이었는데요, 삶에서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한다는 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전혀 겪고 싶지 않던 일을 겪을 때 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지… 수행이 필요한 지점일까요 ㅎㅎㅎ 어쨌든 예상치 못한 저의 이러 저러한 ‘불행'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새로운 배치 속으로 내 몸을 맡기고 적극적으로 나의 리비도를 다른 곳으로 접속시키는 것. 조금 피곤하고 지난해 보이긴 합니다만...이것이 인생인 걸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죠 뭐!

다음 시간 후기 & 간식은 현정샘입니다 :)

다음 시간 숙제는 동양 동화에서 하나, 서양 동화에서 하나씩 발제문을 써오시는 것입니다! 담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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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4 22:07
    저도 조에 부스케의 예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통해 구현되는 사건들을 맞이하기! 다음주 <형제편>에서, 우리는 또 어떤 사건을 겪게 될지요. 음핫핫핫!! 지은도 만쉐! ^^

  • 2017-11-09 20:11
    드디어 다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이 인생론은 대체?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