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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만] 4화 "봉지심(蓬之心), 주어진 쓸모에 갇힌 마음"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5-15 23:53
조회
372

봉지심(蓬之心), 주어진 쓸모에 갇힌 마음



글/ 규창



1.고립되고 싶지 않다


‘인싸’가 되고 싶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축제나 행사 같은 공적인 자리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노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항상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과 매력을 갖춰야 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남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출 자질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사회든 운동이든 게임이든 공부든 어느 정도 능숙해졌다. 그리고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난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이야깃거리도 마련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인싸’에 이르지는 못했어도 어느 자리든 빠지지 않는 필수적인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그동안 내가 고수해왔던 ‘인싸’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공부는 어느 정도의 시간으로 능숙해질 수 있는 활동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공부를 하면서 기존에 연결되었던 관계망이 끊어지며 단조로운 생활을 보내게 됐다. 하루에 2시간 정도 하던 게임을 어느새 끊게 됐고, 사람들과 만나서 노는 일도 줄어들었다. 주말마다 여기저기 놀러 다녔던 것도 그만두게 됐고, 일 년에 최소 한 번 떠나던 여행도 가지 않게 됐다. 이제 가족 외에 나를 찾는 사람들은 손에 꼽는다. 그야말로 공부로 고립되는 일상 아닌가?


‘인싸’에 대한 열망은 고립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인싸’에 대한 열망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연예인 혹은 유튜버 같은 직업이 장래희망으로 등장하는 게 그 증거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싸’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예외적이다. 내가 ‘인싸’가 되고 싶었던 것은 혼자 있는 적막함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타인과 시끌벅적하게 지내더라도 혼자 있는 시간은 꼭 오고야 만다. 잠을 자는 시간이 그렇고, 언젠가의 죽음이 그렇다. 우리는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가도 언젠가 그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고립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오히려 노력할수록 고립에 대한 공포만 더더욱 커지는 것 아닌가?

장자는 ‘아웃사이더’였지만, 스스로 고립됐다고 느끼지 않았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제후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팔고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장자는 어떤 제후와도 자신의 지식을 교환하지 않았다. 한 번은 초나라 위왕이 재상으로 스카웃하려 했지만, 장자는 “거북이가 죽어서 뼈를 남겨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라기보다 진흙 속을 꼬리 끌며 살기를 바라듯이, 나도 지식을 팔다 죽어서 허명을 남기기보다 가난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오”라고 거절한다. 장자는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그러나 이는 자유를 위해 고립된 삶을 자처한 것이 아니다. 장자에게 자유와 고립은 대립하는 개념이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 지식을 팔며 전국을 바삐 돌아다니는 유세가들이야말로 고립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기를 바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장자가 보기에 그것은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드는 길이었다. 장자는 왜 여러 제후들이 찾는 유세가를 고립됐다고 보고, ‘아웃사이더’인 스스로를 자유롭게 세상을 떠돈다고 생각했을까?

 

2.‘인싸’,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

유세가 중 한 명인 혜자는 장자의 철학이 쓸모없다고 비난한다. 마치 거대한 박이 크기만 하고 바가지로 쓰기에 부족한 것처럼, 장자의 철학은 놀랄만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쓸모도 갖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현실적 쓸모에 얽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응수한다.
장자가 말하였다.

“선생은 참으로 거대한 것을 쓰는 법(用大)이 졸렬하구려. 송(宋)나라 사람 가운데 손 안 트게 하는 비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 빠는 것을 일로 삼았소. 나그네가 그것을 듣고 그 비법을 많은 돈(百金)으로 사겠다고 청하였더니 일족을 모아 모의했소. ‘우리는 대대로 솜 빠는 것을 일로 삼았지만, [그 수입은] 몇 금에 불과하다. 지금 하루아침에 기술을 많은 돈에 팔게 되었으니 청컨대 그것을 팔도록 하자.’ 나그네는 그것을 얻어 오왕(吳王)을 설득하였소. 월(越)나라와 전쟁이 일어나자 오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소. 겨울에 수전을 펼쳐 월나라 사람을 크게 무찌르자, 그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제후에 봉하였소. 손을 트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혹은 제후에게 봉해지고 혹은 솜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하니, 이는 쓰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에게 5석(石)들이 박이 있다면 어찌 큰 술통 모양의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얕고 평평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 걱정하오? 선생은 여전히 얽매인 마음(蓬之心)을 가졌구려!”(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百金. 聚族而謀曰: ‘我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鬻技百金, 請與之.’ 客得之, 以說吳王. 越有難, 吳王使之將. 冬, 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能不龜手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無所容? 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장자는 똑같은 ‘손 안 트는 비약’을 다르게 사용하는 송나라 일족과 나그네를 통해 무엇이 ‘현실적 쓸모’인지를 반문한다. 송나라 일족은 솜 빠는 일을 위해 비약을 사용했다. 송나라 일족은 대대로 비약을 사용해 솜을 빨았음에도 몇 금 버는 데 그쳤다. 나그네는 일족이 대대로 번 것보다 많은 돈을 줘서 비약과 바꿨다. 후에 나그네가 오나라 군대의 장수가 되어 월나라와 전쟁하게 됐을 때, 비약 덕분에 승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비약으로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제후로 봉해졌다. 나그네가 비약의 쓸모를 ‘솜 빠는 일’이라는 주어진 쓸모에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자는 사물에 내재된 더 효율적인 쓸모를 발견하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쓸모란 존재하지 않는다. 쓸모는 발명되는 것이다. 판다는 대나무를 잡기 위해 손목뼈를 엄지손가락처럼 진화시켰고, 석기시대의 인류는 돌과 진흙으로 온갖 생활가구를 발명했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의 필요 속에서 쓸모를 발명하기보다 관습적으로 주어진 쓸모를 답습한다. 송나라 일족이 그 예다. 그들은 대대로 손 안트는 비약을 솜 빠는 일에만 사용했다. 그들은 솜 빠는 일꾼으로 더 없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것 외에는 어떤 쓸모도 갖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주어진 쓸모에 복종할수록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인 고유한 쓸모를 발명하는 데 무능력해진다.

장자는 현실적 쓸모에 고착된 자들의 마음을 ‘꼬불꼬불한 쑥 같은 마음(蓬之心)’이라 비판한다. 봉(蓬)은 짧고 꼬불꼬불한 모양의 쑥인데, 가는 곳마다 만날 정도로(逢) 여기저기 무성하게 피어있는(艹) 쑥이다. 그런데 이 쑥은 주변에 비슷한 쑥들이 있으면 꼬불꼬불하게 피어나는데, 마(麻)처럼 곧게 자라는 식물이 있으면 곧게 피어난다. 즉, 주어진 환경에 따라 줄기가 정향되는 유약한 식물이다. 장자가 보기에, 유세가들이야말로 이런 유약한 쑥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제후들의 필요에 맞춰 지식을 판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제후의 마음을 사로잡고 대단한 지식을 팔고 명성을 높인다 해도, 장자가 보기에, 이들은 유연한 자들이 아니다. 다양한 군주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추는 모습은 타인으로부터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주어진 쓸모에 종속된 자들이다.

장자는 백이와 숙제, 비간 같이 군주와 나라에 대한 충심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들을 주어진 가치에 예속된 자들이라 비판한다. 이들의 비극은 충심을 삶보다 앞서는 초월적 가치로 상정한 데 있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소진과 장의, 공손연처럼 다양한 군주들에 맞춰 지식을 파는 자들 역시 주어진 가치에 예속된 자들이다. 이 두 부류는 고유한 쓸모를 발명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삶의 두 가지 표현이다. 혜자를 비롯한 유세가들은 부, 명예, 권력을 획득한 성공한 사람들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데는 실패한 자들이다.

장자가 말하는 ‘거대한 것의 사용(用大)’이란 현실적 쓸모를 넘어서는 고유한 쓸모의 발명을 의미한다. 고유한 쓸모란 자신이 놓인 독특한 시공간을 인식해야 발명될 수 있다. 즉, 부, 명예, 권력 같은 것이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상식적 세계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때 고유한 쓸모를 발명할 수 있다. 장자가 재상 자리를 거절한 것도 자신이 놓인 독특한 시공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재상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도 되지 않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재상 일을 하는 순간 이미 유세가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유세가로서 성공한 재상이 하는 일은 타국의 군주를 설득하는 유세가의 업무다. 끊임없이 각국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구워삶을 논리를 정리하는 일상에서 누가 지식을 파는 유세가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장자는 재상 자리를 수락하는 순간 유세가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 세계에서는 다른 유세가들처럼 부, 명예, 권력을 좇을 수밖에 없다. 부, 명예, 권력을 좇는 것으로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자는 재상 자리를 거절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장자와 같은 결단이다. 고독을 느끼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인정을 갈구하는 ‘인싸’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고독 자체를 다르게 사유하는 철학자가 될 것인가? ‘인싸’가 어마어마한 인기 속에서 화려하게 살아간다면, 철학자는 고독하고 담백하게 살아간다. 쑥처럼 욕망이 여기저기로 정향되는 나로서는 선뜻 철학자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 공부하면서도 ‘인싸’처럼 화려한 철학자의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인싸’는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어떻게든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피로한 삶이고, 철학자는 어떤 조건 속에서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삶이다. ‘인싸’가 혼자 남겨진 시간을 최대한 생략하는(skip) 반면에 철학자에게 그 시간은 사유를 확장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애당초 이 둘은 병행할 수 없다.

고독을 고립이라 느끼는 것은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싸’로 살든 철학자로 살든 고독에 대한 사유는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헤어졌다 새로운 사람과 다시 만나는 일을 반드시 반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때도 있겠지만, 고독하게 보내야 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때마다 외로움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할 수는 없다. 나는 장자처럼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다행히 공부는 그런 삶을 실험하는 데 있어서 꽤나 적합한 활동이다.

 

3.공부하는 백수의 쓸모

‘인싸’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공부는 너무나도 쓸모없는 활동이다. 특히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어떤 현실적 쓸모로도 환원되지 않는 활동이다. 친구들이 조금씩 자신의 스펙을 쌓고, 자기 명의로 된 차와 집을 사면서 서로의 삶을 나누는 동안, 나는 장자와 맹자, 스피노자,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저러한 사유를 배웠음을 공증하는 문서나 보상 같은 것은 없다. 나는 그들의 사유로 나의 굳건한 자아에 조금 흠집을 냈다는 것에 만족한다. 아마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점점 쓸모있는 인간이 될 것이고, 나는 여전히 쓸모없는 백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쓸모를 요구하는 곳에서 살아갈 것이고, 나는 쓸모를 요구하는 모든 곳에 참견하며 그것들과 다른 식으로 연결될 것이다.

다른 식의 연결은 금방 일어나지 않는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붕의 비행이 3천 리 물을 치고, 9만 리 높이에 날아오르고, 6월의 바람을 타야 하는 조건이 있듯이, 연결하는 데에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 자신을 훈련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공부는 스마트폰과 달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는다. 스마트폰은 자다가도 사용할 수 있지만, 읽고 쓰는 활동은 제정신을 온전히 유지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은 아무리 시끄러운 지하철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읽고 쓰는 활동은 혼자 있는 시간을 꼭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중 온전히 읽고 쓰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아침 9시에서 11시가 가장 정신이 온전하고, 그 뒤로 조금씩 잡념이 침범하기 시작한다. 9시에서 11시를 온전히 읽고 쓰는 시간으로 보내려면 나름의 규율이 필요하다. 최소한 자정을 넘기기 전에 자고,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에 몸을 깨우는 방을 정리하고, 가볍게 운동하는 것 같은 루틴이 필요하다.

물론 규율을 지키지 못한 적도 많다. 유튜브에 빠져 자정을 넘긴 적도 있고, 다음날 세미나 준비를 마치지 못해서 새벽까지 깨어있었던 적도 있다. 늦잠을 자거나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겹쳐 퀭하게 아침을 맞이한 적도 있다. 특정한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그날 하루를 온전히 잘 보내기 위한 노력, 일주일의 리듬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는 그간 내가 집착한 ‘인싸적 욕망’을 탈피하는 훈련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훈련한 적은 있어도, 어떤 활동을 위해 나의 일상을 재조직하는 훈련을 겪은 적은 없다. 타인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갈 준비는 한 적 있지만, 나의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고유한 리듬을 새겨본 적은 없다. 이러한 훈련을 고립이라고 할 수 없다. 나만의 규율과 리듬 속에서 나와 세계에 다르게 접속할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나는 어떤 문제들 속에서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까? 장자는 ‘전국시대’라는 조건 속에서 통치, 삶을 기르는 것 등을 질문하며 말 그대로 세계를 자유롭게 떠다녔다. 그가 제후들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이미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철학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과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조건은 다르지만, 고립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길은 동일하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좁은 세계 속에서 몇 안 되는 연결을 부여잡고 살았다. 이제 고립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를 유영하기 위해 이 인기 없고, 쓸모없는 백수를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전체 5

  • 2021-05-16 19:34
    규창쌤의 프로다운 공부모습의 능숙함 뒷편에 이렇게 힘든 백조의 자맥질이 있었다니! 역시 공부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지금의 규창쌤의 모습이 '용이 밭에 있는 모습'이라면, 그 속에는 이미 '비룡재천'의 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앞날의 즐공과 함께 다음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 2021-05-18 10:05
    "그러나 내가 저러한 사유를 배웠음을 공증하는 문서나 보상 같은 것은 없다. 나는 그들의 사유로 나의 굳건한 자아에 조금 흠집을 냈다는 것에 만족한다. 아마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문장이 무척무척 감동적이네요.... 동료로서 용기가 생기게 하네요.
    규창이형은 누구보다도 연구실에서 자신의 쓸모를 잘 발명하고 사람들과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고민이 있었군요.
    그리고 그 고민을 밀고 나가는 일이 스스로의 리듬과 규율을 만드는 일로 이어지네요.

  • 2021-05-18 14:54
    샘이 고민하던 '붕의 비행'이 이런 이야기로 펼쳐졌네요. 더 큰 세계를 유영하기...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져요.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저도 비슷한 루틴을 몸에 새기려고 애쓰는 중이라 제 얘기인줄..ㅎㅎ

  • 2021-05-23 22:28
    엑 제가 맨날 하루하루 인싸가 아니면 못 살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그게 고립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니요!!
    항상 인싸가 아니라면 살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1-05-26 19:39
    규님 글 읽다보니 사람들이 되고 싶은 '인싸'란게 외부의 인정이나 세상의 주어진 쓸모에 자신을 맞추는데 마음이 기울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은 '아싸'가 아닐까 합니다. 오히려 자신에도 외부에도 갇히지 않고 매순간 고민하고 한발 한발 신중히 자신만의 고유한 쓸모를 발명해 가는 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인싸'가 아닐까 싶네요.
    뭐 이러나 저러나 인싸가 되는 길은 험난하군요ㅠㅠ
    규선배 간만에 출산하셨는데 축하가 늦었습니다. 기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