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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1-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5-18 13:47
조회
196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오정아


원고와 악보

언어가 단어와 의미의 영역으로, 말의 소리와는 별개인 영역으로 확립된 것이 글 때문이라는 게 월터 옹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언어와 음악은 글 자체가 생겨난 순간부터 분리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글의 역사는 부단히 전개되어 언어의 역사에서 한 장을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옹의 주장은 큰 논란이 되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와 음악을 구분하게 된 것이―적어도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로 구분하게 된 것이―글의 탄생이 아닌 글의 종말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글의 종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점에 주목해보자. 글의 역사 전반에 걸쳐 음악이 언어 예술로 간주되었다면, 다시 말해, 음악의 본질이 그 곡을 이루는 말의 반향에 있었다면, 글은 음악을 표기하는 한 형태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에게 음악의 표기법은 글과 매우 달라 보인다. 둘의 차이를 정확히 특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잠시 후에 밝혀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음악은 글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글의 역사는 음악 표기의 역사이기도 하고, 그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 하나가 이 둘을 구분하게 되는 경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와 음악을 가르는 현대의 구분을 그대로 과거에 적용해서는 안 되고, 언어나 음악의 표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의 문제를 이해할 때 각각의 문제만 고려하면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런 식의 가정이 주를 이루어왔다. 글의 역사에 관해 내가 찾은 자료들 중에 음악의 표기에 관해 사소한 언급 이상을 담고 있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글이나 음악 표기의 역사는 보다 포괄적인 표기의 역사의 일부일 것이라는 게 내 주장이다. 그 표기의 역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글과 음악 표기, 혹은 원고와 악보가 현대 서양의 관습에 따라 어떻게 구분되는지의 문제부터 짚어보고 넘어가자. 이 문제는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이 ‘예술의 언어들(Languages of Art)’에 관한 강의에서 언급했다(Goodman 1969). 얼핏 생각하면 답은 분명해 보일지도 모른다. 뭔가를 제안, 주장, 의미하고자 할 때 악보로는 불가능하지만 글로는 가능한 방식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원고를 판독하는 것은 악보를 보며 그 곡의 연주를 떠올리는 것 이상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나? 하지만 굿맨이 지적했듯이, 이런 식의 기준은 조금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무의미해진다. 그에게 이 문제는 그런 기준보다는 ‘작품’으로 여길 수 있는 텍스트나 작곡된 음악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에 달려 있는 듯하다. 여기서 굿맨의 주장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의 결론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악보는 표기 체계에 따라 작성되고 작품을 규정하는 반면,…… 문학적 원고는 표기 체계에 따라 작성되고 그 자체로 작품이기도 하다.”(Goodman 1969: 210) 작가는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표기법을 사용하고, 그가 쓰는 것은 문학 작품이다. 하지만 작곡가는 음악 작품을 쓰지 않는다. 그는 악보를 쓰고, 악보는 그것에 따르는 연주를 명시한다. 음악 작품은 바로 그 연주다. 비슷한 예로 굿맨은 소묘와 동판화의 경우를 언급하는데, 두 가지도 같은 식으로 대비된다. 소묘는 작품이고, 동판화에서 작품은 원판에 부합하는 흔적이다. 하지만 원고나 악보와 달리 소묘와 동판화는 어떤 종류의 표기 체계도 사용하지 않는다(그림 1.2 참조). 선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표기 체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5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자. 왜 작품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음악과 문학 예술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을까?

     그림 1.2 원고, 악보, 소묘, 동판화의 차이. (넬슨 굿맨 참조)



근대 이후 음악에서 언어적 요소가 제거되고 언어에서 소리의 요소가 제거된 방식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원고를 쓰는 작가나 악보를 쓰는 작곡가는 모두 종이의 표면에 이런저런 기호들을 표시한다. 두 경우 모두, 기호들은 소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호들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을 반대의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는 원고의 기호들을 글자와 단어로, 즉 소쉬르의 청각영상이 투사된 투사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마음에 찍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종이 위에 인쇄된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즉시 그것이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것, 즉 아이디어나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반면 악보의 기호는 글자와 단어가 아닌 음표와 악구로 인식하고, 아이디어나 개념이 아닌 ‘소리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요켠대, 언어와 음악을 비교하면 의미의 방향이 반대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원고를 읽는 것이 인지의 과정, 즉 본문에 적힌 의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면, 음악을 읽는 것은 실행의 과정, 악보에 적힌 설명들을 ‘실연(實演)하는’ 과정이다. 전자는 언제나 우리를 안으로,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ought)의 영역으로 이끌고, 후자는 언제나 우리를 바깥으로, 소리의 느낌으로 이끈다(그림1.3). 우리는 저자의 생각이나 의도를 알기 위해 글을 읽지만, 악보에 표현된 작곡가의 의도를 읽는 것은 그런 음악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물론 어떤 음악의 표기 체계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서양 음악의 전통적 표기 체계는 음조와 음색 같은 요소들은 배제하고 오로지 가락과 리듬에만 초점을 맞춘다. 후자의 요소들이 명시되어야 할 경우에는 단어나 약어, 숫자의 형태로 덧붙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기 체계의 목적은 음악가들이 그것을 읽고 원작품과 거의 유사하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소리를 묘사하는 데 있다.

  그림 1.3 ‘이해’와 ‘실연’의 과정으로 이끄는 원고와 악보


언어와 음악이 이런 식으로 엄밀하게 나뉘면서 둘 사이의 경계에서 어쩔 수 없이 변칙이 일어나게 된다. 굿맨조차도 연극 공연을 위해 쓰인 원고는 반은 악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암송하기 위해 희곡의 대사들을 읽기 때문에 목소리를 고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연극의 경우 작품은 물론 원고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공연이다(Goodman 1962: 210-11). 낭송을 위해 쓰인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단어의 소리를 활용하는 한 그 시는 언어보다는 음악에 더 가깝다. 하지만 언어의 표현물로 남는다면 그 시는 음악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따라서 시를 적은 것은 원고이면서 악보이거나, 아니면 원고도 악보도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공연이나 낭송과 같은 변칙적인 경우가 우리에게는 문제로 여겨질지 몰라도 근대 이전의 우리 선조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리디어 고어가 언급했듯이, 음악의 측면에서 작품이라는 개념, 즉 만들어진 가공물(기념비적이고 형태를 지닌)로서의 작품이라는 개념은 18세기 말 경에 음악이 독자적인 예술로 분리되면서 생겨난 작곡, 연주, 표기의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Goehr 1992: 203). 그 이전에는 실질적인 ‘음악 작품’은 곡을 만드는 활동이 아닌 연주하는 활동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모든 연주가 표기법에 따라 미리 작성된 상세한 설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 3

  • 2021-05-22 18:03
    글의 역사가 음악 표기의 역사이기도 하고 글이 음악을 표기하는 한 형태였을 거라는 건 정말 흥미로와요! 고대 인도어인 빠알리어로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도 실은 노래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거든요. 음악이 언어 예술이었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되는 건가요? ^^

    지금 우리의 글에서는 더 이상 음률을 상상할 수 없고, 작곡가의 악보에선 반성적 사고를 끌어낼 수 없지만, 인간이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이해’하고 ‘실연’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거죠!
    흠... 근데 이게 ‘선들 Lines' 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지 점점 궁금해집니다~ ^^
    흥미진진한 번역 잘 읽었습니다, 정아샘~!

    • 2021-05-23 14:40
      그러네요.. 노래로 전승되던 부처님 말씀도 언어 예술!^^
      이제 조금 뒤부터 선에 관한 이야기가 '드뎌' 등장하는데, 우리 잉골드님께선 여전히 딴 얘기들을 한바탕 들려주십니다.ㅎㅎ 근데 저는 그 얘기들이 또 재밌더라고요.ㅋ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2021-06-01 10:51
    오호! 언어와 음악의 분리가 글의 탄생이 아니라 글의 종말에서 비롯되었군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매우 흥미로운 얘기네요. ㅎㅎ; 갑자기 들뢰즈의 문장은 '이해'와 '실연'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차이'와 '반복'이란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이해할 때는 '체험'을 매우 강조하죠. 텍스트를 통해 기존에 형성된 인식체계가 깨지는 체험이 잉골드가 말하는 음악의 '실연'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잉골드의 얘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