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6월17일 장자후기(재유)

작성자
미리
작성일
2017-06-20 23:57
조회
186
6/17 장자 후기

<재유>는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는 뜻으로 무위의 정치를 가리킵니다. <재유>편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性과 德에 대한 것이죠. 내편에서는 본성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천도나 도추와 같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 살라는 표준을 제시하고 있지요. 내편에 없는 性 개념이 <외편>에 많이 드러나는 것은 당시 지식인 계층에서 빈번히 논의되던 시대적 담론이었다는 겁니다. 순자의 성악(性惡), 맹자의 성선(性善)도 동시대 담론입니다. 본성에 대한 규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 담론 또한 활발했다는 의미겠지요. 정치와 별 무관했던 장자의 후학들은 <외편>에서 왜 性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그것은 ‘문명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외편에서는 본성을 덕과 나란히 보는데요, 내편에서도 덕을 말합니다. 정치와는 무관한, 완성된 내면의 상태를 말합니다. <외편>의 덕은 뉘앙스가 조금 달라집니다. 마제편에 보면 至德의 시대는 배나 다리도 없었고 함께 무지, 무욕 하고 소박했다고 표현합니다. 인위적인 것이 가해지기 이전의 소박한 상태, 본연의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문명에 의해 본성이 헤쳐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문명을 비판하는 것은 문명의 나쁜 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죠. ‘문명자체’를 비판하는 것이죠. 더 정확히는 ‘문명의 선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응제왕>의 숙과 홀처럼 선의에 내재된 폭력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샘은 여기서 공자의 仁에 대한 말씀을 예로 들었지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공자는 ‘나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지 않고 반대로 말했을까요? 하고자 하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라고 하는 것은 동일자의 원리라는 것이지요. 숙과 홀이 혼돈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죠. ‘나에게 있는 좋은 구멍이 너에겐 없으니 내가 뚫어주겠어’ 라는 선의가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정복자의 논리입니다. 승리자가 무서운 것은 언제나 善의 얼굴을 가장한다는 것이죠.

너무 좋은(善) 것은 결여를 만듭니다. 왜냐면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게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 있다는 것이겠죠. 이 추구하는 바를 善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입니다. 리샤오간은 장자를 무군파로 분류하였지요. 조 토론에서는 무군파가 오히려 노자식 군주의 통치철학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했었지요. <장자>를 무군파, 아나키즘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샘은 크로포트킨의 이야기를 들어 설명해 주셨죠. 국가가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하나로 끌고 가는, 이 보편의 거부가 아나키즘이라는 거죠.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즘의 비전으로 제시한 것이 자연이라고 하니 장자와도 공유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은 추구하는 바도 목적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장자의 표현은 너무도 절묘한 것 같습니다.

문명을 비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가가 세계를 理로 해석하는 것과 달리 노장은 세계를 氣의 관점에서 보고 있지요. 우주는 에너지로 차있고 일정하게 순환하면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우주 구성원인 인간도 마찬가지겠지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한 기의 유지가 필요합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을 제시해 더 기뻐하게 만드는 것이죠. 기뻐하는 것도 기의 항상성을 깨트려 기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어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따로 있지 않으며 인간은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어지면 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오지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서 안명(安命)은 지족(知足)하는 것인가 봅니다.

<재유>편을 읽을 때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어 헷갈렸는데, 샘은 재유에 많은 것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고 하셨네요. 노자, 유가의 사상을 다 볼 수 있지요. 장자가 흥미로운 것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파(派)를 형성했다기보다 계속 달아났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비판을 하지만 그 근본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비판은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 아닌 얼마나 근본적인 비판인가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비판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전 의미 있었는데요, 책을 읽으며 계속 대안을 찾기 때문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장자읽기의 팁을 얻은 느낌입니다. 어떤 근본적인 문제를 포착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죠.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전체 1

  • 2017-06-23 18:10
    분파를 이루고 대안을 찾기가 아니라 달아나는 사유에 익숙해지지 못하는거 같아요... 본성이란 뭘까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