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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동사서독 천운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15 21:09
조회
152
동사서독 후기 나갑니다

1. 지현샘 에세이

성실왕 지현샘의 에세이 미리보기가 있었습니다. 지현샘은 「인간세人間世」의 심재(心齋) 개념과 외편 「재유在宥」에서 나오는 심양(心養)을 통해 ‘마음의 문제’를 고민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저는 가장 비근한 문제를 붙들고 현실감을 잃지 않는 글을 쓰시는 게 지현샘의 장점이고 배우고 싶은 점이라고 늘 생각해왔었고, 이번에도 지현샘께서는 직장에서 겪으신 마음의 동요를 글의 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글의 전개 과정도 비약 없이 꼼꼼했던 것 같고 ‘내 삶을 노동시간으로 채우지 않기’라는 실천적 결론에 무리 없이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장점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콩알만한 비근한 문제에서 출발해서 고원한 차원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콩알만한 문제 하나조차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비근한 데에서 출발하되 비근한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코멘트 하셨습니다. 순간순간 눈앞에 놓인 문제들을 모면하는 방식의 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셨죠. 그리고 또 채운샘은, 지현샘이 예전에 담당하셨던, 4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주식투자의 불안을 노자 독서로 다스리고 주짓수와 요가로 신체 단련을 하는 개인투자자 얘기를 하시며 “왜 장자(노자)는 소위 ‘소외계층’들에게 읽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부의 재분배만을 요구하고 사회가 자신의 삶을 뒤흔들게 되는 일을 그 자체로 문제 삼지는 않죠. 노자나 장자의 사유와 접속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소외계층’은 소외계층대로, ‘상류층’은 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번뇌를 생산하는 시대. 어쩌면, 어떤 조건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길을 고민했던 장자의 사유는 우리와 접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운샘은 동양고전을 반동적이지 않은 방식(힐링, 자기개발 등이 아닌)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에세이에 대한 당부

그리고 에세이에 대한 당부가 이어졌습니다. 우선 장자 외편에 대한 학자들의 분류에 크게 휘둘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각각의 편들이 지닌 색깔에 유의해야 함을 강조하셨죠. 원석같은(?) 내편의 사유들이 외편에서 갈라져나온 방식들을 보면 장자 후학들이 내편의 어떤 부분들을 중요하게 여겼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화/담론화 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채운샘은 외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선별해서 그러한 키워드들이 장자 내편 중 어떤 부분을 발전-변형시킨 것인지를 보고, 외편을 통해 내편을 다시 보는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장자의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에세이쓰기의 과정으로 삼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3. 천운

천운 1장에는 우리를 압박하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채운샘은 이런 구절들이 재밌으시다고…. 채운샘은, 자연의 법칙성을 강조하고 그로부터 구체적인 사안들을 유추하는 방식이 확실히 황로학파적 색깔이라고 하셨습니다. 장자 내편에는 자연의 법칙성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죠. 그러나 채운샘은 이들이 이끌어내는 법칙성이라는 것들이 장자 내편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령 4장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도는 “일정한 방향 없이 자유롭게 유전”하며 “만물에 대응하여 다함이” 없습니다. 만약 도가 기계적 법칙성에 의해 작동한다면 응물(應物)할 수 없겠죠.

2장에 대한 채운샘의 설명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남쪽으로 멀리 떠나온 나그네의 눈에 韓나라의 冥山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유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2장에서 장자는 至仁無親을 이야기하는데, 최고의 인은 親과 孝의 차원을 초월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 여행을 떠난 나그네의 비유가 다소 엉뚱하게 삽입되어 있죠. 채운샘은 이 비유가 孝라는 가치는 특정한 조건을 떠나서 모두에게 보편적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冥山은 韓나라라는 바운더리 안에서는 가장 높은 것이지만, 남쪽으로 조금만 떠나와도 여행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장자는 孝나 仁 등은 조건 속에서만 작동하는 행위윤리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니체도 『반시대적 고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체는 관습이나 여론에 얽매이는 것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죠. “몇 백 마일만 가도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견해에 얽매인다는 것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가”

2장의 후반부는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는데요, ‘어버이를 잊고 어버이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한다’는 등 알기 어려운 구절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채운샘은 이를 관계의 고착성에 대한 비판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대종사」편의 상망(相忘) 개념에서도 나타나는 주제지만,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채로 공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아닐까요? 채운샘은 가장 뻑뻑한(!) 관계는 매번 서로를 의식하고 챙겨야 하는 관계임을 말씀하시며, 관계의 고착성에서 벗어나고 또한 타인(어버이?) 또한 우리와의 관계에 고착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를 잊고 산다’고 장자가 말하는 차원은 서로에 대한 무시도 무관심도 아니며, 존재만으로 충만하게 해주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한다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3장에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채운샘은 누군가 이 장을 「제물론」의 인뢰/지뢰/천뢰에 관한 구절과 비교해서 에세이를 써 보아도 재밌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장에는 黃帝의 연주를 감상하는 세 가지 단계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때의 음악은 道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수 있겠죠. 첫 번째 단계는 두려움입니다. 붓다는 깨달음 얻고 나서 자신의 깨달음을 남들에게 전하는 일에 대해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상과 연기라고 하는 자신의 깨달음이 대중들에게는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임을 붓다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연주(=道)는 최초에 지금까지의 사고를 깨트리는 두려운 마주침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다음 단계는 怠라는 글자로 표현되며, 교재에는 ‘나른함’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계입니다. 채운샘은 이를 감각기관의 구속이 열리는 상태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만물이 떨기로 자라는 것처럼 이리저리 뒤섞여서 서로 쫓아다니며 모두 크게 즐거워하면서도 그렇게 만든 음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려집니다. 채운샘은 이를 스피노자가 3종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인식의 도약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도약이 세계로부터의 초월로 드러나지 않고, 세상 안에서의 자유자재로 드러난다는 점이 중요할 것 같네요.

또한 채운샘은 마지막 단계에서 음악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셨습니다. 실제로 존 케이지 같은 음악가는 피아노에서 시작해 온갖 사물들이 내는 소리에 열리는 단계로 나아갔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침묵에 이르렀다고 하죠. 음악가에게 침묵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떠나는 일인 동시에 모든 소음이 음악임을 긍정하게 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가들에게는 이러한 침묵의 차원에 대한 의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키스 자렛, 펫 메스니 등의 앨범을 만든 독일의 음반사 ECM(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의 모토는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라고 합니다.

채운샘은 이어서 “어리석어지기에 道와 하나가 될 수”있다(愚故道)라는 구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듣는 이를 어지럽게 하는 음악을 연주하니 어지러워지기에 어리석게 되며, 어리석게 되기에 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어리석음이란 무엇일까요? 채운샘은 이때의 어리석음이 노자의 無知와, 그리고 소요유편의 大知와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황제가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분별이 없는 차원, 감각기관에 의존한 분별을 벗어난 차원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겠죠. 도는 우리의 규정성을 매순간 벗어나기 때문에 만물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物의 차원을 초월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도를 형용할 수 없는 것은 물에 응함을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구도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양태는 실체 안에 있으며, 실체에 의존해 있지만 반대로 양태의 차원을 벗어나서 실체를 말할 수는 없죠. 마찬가지로 만물의 모든 근거는 도이지만 물을 떠나서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차원, 즉 만물이 의존하고 있는 도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西施의 찡그린 얼굴을 따라하는 추녀처럼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물의 차원에 매몰되어 “찡그린 것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찡그린 얼굴을 따라하게 될 것입니다.

‘仁義는 텐트다’ 5장에는 “인의는 옛 선왕들이 잠시 묵었던 임시 처소”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채운샘은 여기에서 루쉰적 태도를 발견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쉰은 오늘의 자신이 붙들고 싸운 올바름이 내일도 여전히 올바름으로 남아있으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오늘의 싸움에 온 힘을 다하게끔 했죠. 그래서 루쉰은 혁명군들과도 반동분자들과도 정인군자무리들과도 싸웠습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의 방황’을 있는 힘껏 실천한 것이지요. 채운샘의 설명에서 장자적 逍遙를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가치들을 텐트로 삼기 위해서는 순간을 유보하지 않는 치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세이는 외편을 먼저 읽고, 외편의 키워드를 통해 내편을 다시 본 뒤 장자의 사유가 자신에게 가장 강하게 전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쓰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주 토요일 10시에 살아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2

  • 2017-07-17 01:41
    “몇 백 마일만 가도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견해에 얽매인다는 것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가”.... 니체도 참, 저런 말을 저렇게 콕 꼬집어서 하다니...ㅋㅋ 지현의 '미리 에세이'는 규문의 미풍양속으로 추가하는 거스로! 그나저나 베짱이 거나가 이렇게 빨리 후기를 올리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ㅋㅋ

  • 2017-07-17 15:16
    당일 후기라니 미풍양속의 전파인가요~ 니체의 저 말은 참 아프네요. 촌스럽게 견해에 얽매이고 마는 1人으로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