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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천도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7-14 11:50
조회
134
안녕하세요. 에세이가 벌써 코앞이네요. 주제를 슬슬 정해야 하는데 뭘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ㅎㅎ;; 마음이나 본성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와서 그걸 가지고 써볼까 했는데, 외편은 그걸 통치와 엮어서 얘기하는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흔히 도가의 철학을 현실도피의 철학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도피는 여전히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떠해서 그곳을 떠난 것이지 현실과 무관하게 떠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행적, 사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것이 출현할 수 있었던 그 시대의 배경을 같이 살펴봐야 합니다. 채운쌤은 괜히 그 시대의 역사를 같이 보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텍스트와 그 시대의 역사를 같이 보는 중요성을 몰랐던 저는 뜨끔했습니다. ㅎㅎ;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말도 사실은 당장 자기의 어떤 조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다르게 살고 싶은지 자신이 처한 조건을 열심히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해내면 그러한 조건들의 근거가 되는 지금 시대를 나름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그동안 쓴 것은 개발새발이네요.

「천지」편 11장을 보면 자공과 초나라 노인의 대화, 초나라 노인을 비판하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장에서 주목할 단어는 기심(機心)과 탁생(託生)입니다. 기심은 문명의 이기를 쓸 때 형성되는 마음입니다. 노인이 기계의 편리함을 알면서도 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의 편리함을 아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심(機心)이 생기면 타고난 본성을 잃어버린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타고난 본성은 뭘까요? 내편에서는 성(性)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단어로 덕(德)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덕(德)이 아닌 굳이 성(性)을 쓴 까닭은 분명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일 텐데, 잘 모르겠네요.

초나라 노인의 따끔한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세계가 깨지는 충격을 경험한 자공은 성인의 도를 탁생(託生)이라고 합니다. 탁생(託生)은 삶을 세상에 맡기는 것입니다. 삶을 세상에 맡긴다는 것은 삶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자 13장을 보면 “총애와 욕됨을 모두 놀라듯이 대하고 큰 걱정거리를 내 몸처럼 여기라.” 그리고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은 지켜야 할 자기 몸이 있기 때문이니, 내게 몸이 없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아마도 노자의 이 구절이 탁생(託生)과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것은 그렇다면 외편에서 얘기하는 성(性)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노자에게서 본성을 뜻하는 단어를 찾는다면 박(樸)이나 소(素)라고 할 수 있지만, 노자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노자와 연결시킬 수는 없네요. ^^;; 과연 본성이 무엇인지, 언제 그것을 잃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지키는지 등등 에세이 주제가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흔히 「변무」, 「마제」, 「거협」, 「재유」를 무군파로, 「천지」, 「천도」, 이번 주에 읽을 「천운」을 황로학파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재유」를 봤을 때, 앞에는 무군파답게 아나키즘적인 색채가 보인다면 뒤에는 황로학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채운쌤은 에세이를 쓸 때 학자들이 규정한 무군파와 황로학파의 차이를 참고해서 편을 파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규정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학자들이 규정한 것은 나름 그들의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각 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한 다음에 그 분류에 맞게 그 편을 파악할지 아니면 다르게 파악할지에 따라 에세이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무군파는 마음, 타고난 본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노니는 말을 묶는 것 등의 비유를 통해 문명의 이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옭아맨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군파는 문명에 대한 장자의 사유를 계승한 것 같습니다. 황로학파는 무군파보다 더 현실적으로 통치를 사유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는 내편에서 봤던 유머러스하고 날이 선 듯한 목소리를 찾아보기란 어려웠습니다. 대신 유가, 묵가, 법가의 얘기가 막 섞여있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특히 이번 「천도」가 그랬습니다. 그냥 이도저도 아닌 얘기들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채운쌤은 외편을 그 자체로 보지 말고 내편과의 관계에서 보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장자의 사유로는 얘기될 수 없는 논의들이 어떻게 장자의 철학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어떤 점에서 장자의 사상으로 볼 수 있는지를 따져야 했던 것입니다. 황로학파는 유가와 법가, 묵가의 논의를 기존 장자의 얘기와 묶어서 얘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황로학파는 내편의 「덕충부」나 「대종사」, 노자의 『도덕경』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장자나 노자와는 절대로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법가의 철학도 보입니다. 채운쌤은 이러한 혼합에 대해 황로학파가 나름대로 그 시대의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표현방식을 보면 이미 전국시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왜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 중요철학은 법가이고, 유가와 도가는 왜 통치철학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것은 자신들의 철학을 분석하고 그 결점을 다른 사상들과의 혼합으로 극복해낸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하나의 주제로 편을 꿰뚫을 수 없었던 황로학파의 얘기들은 이런 작업을 통해 탄생한 것 같습니다.

「천지」편 12장은 내편의 사유를 통치철학으로 해석해낸 결과입니다. 여기에는 성인과 덕인, 신인이 등장합니다. 원풍은 순망에게 성인의 통치를 묻습니다. 이에 순망은 성인의 통치를 적재적소에 인재를 꽂아 넣는 정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유가에서 얘기하는 이상적인 무위정치와 거의 흡사합니다. 이어서 덕인과 신인을 물어보는 데, 이들은 성인과는 다른 차원의 인물로 그려집니다. 채운쌤은 이 세 인물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단계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정치의 세 측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편을 봤을 때 나타나는 장자의 주요한 사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化)입니다. 곤이 붕이 되고, 붕이 계속해서 자신이 있는 곳을 떠나듯이 장자의 사유는 어딘가에 안주하지 않는 철학입니다. 「천지」 12장에 나오는 세 인물은 그런 장자의 사유를 정치에 접목시켰을 때 나타나는 철학입니다. 성인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제시해놓고, 덕인과 신인이라는 외부를 같이 얘기합니다. 채운쌤은 어떤 정치를 생각해도 항상 그 외부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통치철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편 15장에는 본성을 해치는 자들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진리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데, 화자는 이런 이들에 대해 새장에 갇혀있는 데도 자유를 얻었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얘기합니다. 장자에게서 어떤 기준이나 보편가치 같은 것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대로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라고 하는 선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편화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공통점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윤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천도」편과 이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도」편의 핵심을 꼽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무위통치일 것입니다. 「천도」의 화자는 무위통치에 대한 비유로 거울을 말합니다. 거울은 사물을 다 비추지만 절대로 비춘 대상과 동화되지 않듯이, 무위통치란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변화하게 만드는 정치입니다. 아마 이런 통치를 가장 구체적으로 풀어낸 것이 8장 같습니다. 8장에는 사성기와 노자가 나옵니다. 사성기는 노자를 찾아가 그를 비난했지만, 다음 날에는 자신의 마음이 변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노자는 “재주의 지혜가 뛰어나거나 신성한 사람의 경지를 나는 스스로 벗어났다고 생각하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늘 그렇듯 떳떳하게 승복하는 것”을 항복(恒服)이라고 얘기합니다. 채운쌤은 노자를 어떤 경지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사람, 앎을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규정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남이 그에 대해 뭐라고 해도 그것을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에게 남의 얘기에 대해 아니라고 할 만한 앎이 있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남의 얘기 또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입장에서야 내 앎이 진실이고 상대의 앎은 거짓이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상대의 앎이 진실이고 내 앎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채운쌤은 생각해볼 지점을 몇 개 던져주셨습니다. 「천도」편 2장을 보면 허즉정(虛則靜)~~ 이런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무엇인지 각각의 글자를 하나씩 해석해나가야만 장자의 철학을 사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_ _)
전체 2

  • 2017-07-14 13:39
    학자들의 분류에는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참고하라고 한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분류했는지 맥락을 이해하면 외편이 좀 잡힐 거란 얘기였음. 자기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서 <장자>의 편들을 배치해보는 게 더 재미있겠지요? -채운

  • 2017-07-14 19:13
    아따야, 많이 바빳을 것인디 소상히도 썼구나. 큰 도움이 되겄다~~^^. 내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