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404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01 14:25
조회
497
如理實見分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못 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몸의 모양은 곧 몸의 모양이 아닙니다.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자, 세 번째 문장의 卽非가 오늘의 뽀인트입니다 ^_^
왜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는가, 여래가 설한 그 몸의 모양이란 사실 몸의 모양이 아니기(卽非) 때문이다…
구문 형식으로 이해해봅시다. “A 卽非 A 是名 A” --> A는 A가 아니다, 이를 A라 한다.
블랑쇼가 쓴 문장 같기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한 말이죠. 채운쌤은 이렇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가 A라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 너, 오늘, 개나리, 슬픔… 그런데 그렇게 부르는 순간에도 그것은 나, 너, 오늘…이 아닙니다.
들뢰즈는 A로 호명되기기는 했으나 현실화된 A와 더불어, 동시적으로 실재하는 A, A′, A″…의 힘을 사유했지요.
내가 이러저러한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의식에서 포착된 나이지만, 미처 의식되지 않더라도 엄연히 실재하는 다른 힘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사물들은 그런 힘들의 운동의 결과 현상된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부르는 이 순간에도 그 나와 더불어 수많은 다른 힘들이 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내가 됩니다. 풀잎을 풀잎이라고 부르는 순간 또 다르게 됩니다.
나무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 푸른 순을 내밀고, 피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주름을 만들지요.
우리는 결과물만을 인식할 뿐이라 이를 순, 주름이라 말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순과 주름이 아니라 매번 쉼 없이 꿈틀대는 어떤 힘들일 겁니다.
그 중에는 순이 되지 않으려는 힘, 어떤 다른 것이 되려는 힘, 발산이 아니라 수렴하는 힘이 함께 하겠지요.
말하자면 순은 순 아닌 힘들과 즉(卽)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상된 A는 다른 A들과 卽하면서 동시에 非라 할 수 있습니다. 筍 卽非 筍.
이를 포착해 순, 주름이라고 호명하는 거지요. 是名 筍.

이 같은 卽非가 보여주는 것, 그게 곧 空이랍니다.
A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A는 결코 A라 한정할 수 없다는 것, 왜냐하면 A는 다른 것들과 더불어 시시각각 달라지므로.
그러므로 오직 서로 기대어 존재하고 달라지는 것들만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게 空사상이지요.
하지만 존재하는 것을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 곧 언어인지라 일상에서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는 다만 현상된 것만을 실체로 간주해 지시합니다. 사과. 바로 그 사과.
이처럼 명사 앞에 한정사까지 붙여서 우리는 A를 B와 구분하고, A′, A″…와도 구분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억겁의 인연이 아니라 그와 독립적이고 실체적인 A 하나가 오롯이 존재하는 양.
이 같은 언어에 균열을 가져오고 언어를 의심케 하는 것, (언어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언어를 다르게 사유하고 사용하는 것, 이게 불교의 언어이고(언어는 방편이다!) 실은 문학, 특히 시의 언어인 듯합니다.
A라고 말하지만 A라는 상으로부터 떠나기. 이행하는 A들을 보기.

한 가지 더 이야기하지요.
마지막 문장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데, 여기서 붓다가 수보리에게 이르길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본다”고 하고 있지요.
형상이 형상이 아닌 것이라는 말은 이제 조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 때도 여전히 ‘본다’는 사실이 희한합니다.
형상을 보는 것이 시각에 얽매인 것이라 한다면, 마지막에 붓다가 ‘봄’이라 이르는 것은 그럼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색신이 아니라 법신을 보는 것, 이는 눈을 떠나고 현상을 떠나야 가능한 건가요?
하지만 문장 자체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는 단서가 없지요. 어디까지나 見 한 글자뿐입니다.
채운쌤 설명은 이렇습니다. 글자 그대로, 보는 겁니다.
지각 체계를 떠나 어디 다른 곳, 다른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세계 바깥에 어떤 실체를 상정한 것이 됩니다.
기독교에서 권고하는 것이 이와 같지요. 육체로부터 떠나야 지고한 것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에서 이렇게 되면 無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실상 불교에서 문제로 삼는 바는, 눈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들이 실은 언어 및 그를 통해 세운 체계 안에 구겨 넣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 한정사는 언어의 것이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종국에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상을 보되 그것이 흐르고 움직인다는 것을 함께 볼 때 우리는 색신이 곧 법신임을 깨닫게 된답니다.
채운쌤 표현에 의하면, ‘구체적 세계’ 속에서 空을 보기!

…실은 제일 인상적인 것이 이 구절이었던지라, 나머지 6, 7분은 하나하나 의미를 새기기보다는 문장 의미만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채운쌤 말씀에 따르면 이제 중요한 내용은 얼추 다 나왔고 다음부터는 반복이라고...
우리 같은 중생은 반복 학습 없이는 숙지가 안 되는고로, 앞으로도 열심히 반복 또 반복하며 뜻을 새겨보아요^^;

다음 시간에는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2부 함께 공부합니다. 발제는 수정쌤.
간식은, 락쿤쌤인데 제가 말씀드리는 걸 잊었네요. 내일 만나 말씀드립지요~
그럼 다음 시간에!

正言希有分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 진실한 믿음을 내오리까.”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 滅後 後五百世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부처님께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가 멸도한 후 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말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 一念生 淨信者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께서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한 순간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 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런 뜻인 까닭으노 여래가 항상 말하길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을 뗏목으로 비유함과 같이 알라”하노니 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無得無說分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하는가.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알기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결정적인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셨다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전체 2

  • 2016-04-02 20:16
    ㅋㅋ기차 안에서 쭉~ 읽어나가다가.. 제 이름이 있어 깜놀^^확인했어요! 간식!!
    지난번 과제 때, 육안으로 보기와 마음을 분리했었어요. 복습 또 복습하고 갑니다아~^^

  • 2016-04-02 20:34
    정성이 가득한 후기!! 한 주일 동안 흐려진 정신이 다시 번쩍 드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