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418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14 18:38
조회
454
지난 수업의 키워드 중 하나, 應無所住 而生其心. 알 것 같지만 실은 모르는 수많은 문장들 중 하나지요. -_-

‘정답’은 삶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불교 공부를 할 때 유독 그렇습니다.
가령 실제로 어떤 사건을 맞아 관계가 틀어졌거나 혹은 마음이 상했을 때 우리는, 내가 이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상황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몇 번이고 스스로를 향해 되뇔 수 있습니다.
당위로 스스로를 억압하지 않고, 그렇다고 정신 승리법을 구사하지도 않고, 관계 자체를 아예 버리고 떠나지도 않고서 이 문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막상 일이 닥쳤을 때 그러기가 영 쉽지 않습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원치 않아서요.
쟤는 저걸 고집하는데 어째서 나만 바꿔야 해? 나만 바뀌어야 해?라고 항변하지만, 실은 쟤가 바뀌고 아니고를 떠나 상대에게 지기 싫고 상대의 말을 수긍하기 싫은 겁니다.
이 싫은 마음은 어디에서 올까요? 채운쌤에 따르면 표상에서 온답니다.
이러저러한 것이 옳다, 이러저러한 것이 나다, 무릇 ○○는 이러저러해야 한다… 이와 같은 표상은 실상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경험 세계로부터 우리는 일정한 것을 표상화(='상'을 갖다)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신체와 세계의 접합면(고로 변용된 신체)에 대한 관념들이며 따라서 외부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의 본성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전생에서;)스피노자는 말했던 것 같아요.
이따금 목숨보다 신념을 따지는 인물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실은 신념이 곧 그 자신인 거죠. 신념이란 내가 경험하고 내가 추출한 진리인바, 신념이 곧 나입니다.
그러니까 신념을 부정당한다는 것은 곧 나를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어떻게든 되갚아주고 싶죠.
그래서 비교적 점잖은 마음으로 앉아 있는 세미나 시간이 아니라 실제 싸움에서라면 '표상을 바꾸라'는 말은 가장 불쾌한 언사가 되어 울리곤 합니다.

언제는 불경이 안 그랬냐마는, 이번에 읽은 금강경 9~12分에서는 바로 이 표상을 문제 삼습니다.
표상의 인간은 세계를 그 자체로 ‘감각’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작용하며 흐르고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지은 상에 갇혀(같은 말로 언어에 갇혀서) 세계를 고만고만하게, 자기만 한 덩치로 파악해 그 안에서 개구리처럼 살아갑니다.
이것 하나에 발끈하고, 저것 하나에 신경을 바짝 세웁니다.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필요하게 민감한 정신의 인간이 되는 거지요.
채운쌤은 이것이 곧 '無明'이라 하시네요. 무명이란 곧 무능력입니다. 어떤 무능력? 상을 짓는 것이 곧 무능력입니다.
자기 경험 세계에서 길어 올린 것으로 상을 지은 뒤 그것이 전부라 믿는 자가 곧 무능력한 자이고, 무명의 존재입니다.
반대로 능력은 어떤 것일까요? 매번 상을 짓되 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 표상으로 다 담겨지지 않는, 이 흘러넘치는 세계를 경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곧 능력입니다.

만약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정답'으로 외고 있는 자라면 그는 능력자가 아니라 무능력한 자가 됩니다.
상을 떠나야 한다,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라고 또 하나의 상을 지어 떠드는 것에 불과한 셈이니까요.
지난 시간 채운쌤 말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마디를 이 맥락에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상을 짓지 않는 것 말고는 달리 해야 할 것이 없다!”
수없이 상을 짓는 것으로 한 생을 다 보내는 우리네, ‘기억증’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우리와 멀리 떨어진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상을 움켜쥐는 일만 없어도 우리 삶은 얼마나 가볍고 시원하고 편안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9~12分에서 수보리와 붓다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받을 果 또한 달리 없다, 果가 있다고 표상하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이 된다. (채운쌤은 이에 대해 수행하면서 내지 공부하고 있는 과정 그 자체가 곧 果이지 그 바깥에 달리 果가 있지 않다고 풀이하셨죠)
단 하나의 상에도 얽매이지 말고 흐름 안으로 들어가라.

 

9. 一相無相分 (하나의 상도 상이 아님)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하는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은 성류에 든다고 하지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다함은이름이 일왕래로되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 名阿那含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다’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오지 않는다 하오니 실로는 오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는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라 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심이나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 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 도를 얻었다’라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려니와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하셨습니다.

 

10. 莊嚴淨土分 (정토를 장엄함)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얻은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 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應無所住 而生基心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습니다.”

 

11. 無爲福勝分 (무위복이 수승함)

須菩提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여러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수이겠습니까.”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얻을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고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에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12. 尊重正敎分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 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그리고 또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 등이 다 응당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거늘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어찌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경을 다 수지하고 독송함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한 법을 성취하리라.

若是輕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곧 부처님과 존중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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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다시 에델만의 책.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오시고요, 발제는 든든한 은하쌤께서 해주시겠슴돠.
지난 시간 후기는 조만간 미영쌤께서 & 간식은 완수쌤.
그럼 모두들 다음 주에~~

 
전체 1

  • 2016-04-15 10:24
    수업을 빼먹었더니 공지,후기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장점이 있군요ㅋㅋ
    복습해 가겠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