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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전 역사의 탄생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7-23 21:14
조회
141
 

안녕하세요. 모두들 강의 어떠셨는지. 역사무식이인 저로서는 우쌤 덕분에 중국 역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지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우쌤은 『서경』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중국 역사에서 정사와 야사에 대한 이야기, 야사 중에서도 야승, 패사, 외사, 사사에 대한 이야기, 편년체와 기전체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공식적인 기록물인 정사에는 개인이 사적으로 기록한 야사도 포함돼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사마천의 『사기』입니다. 『사기』도 처음에는 사마천 개인이 공식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물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사마천이 원래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선제시대에 이르러서 이것이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으면서 정사가 되었고 그때 『사기』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뿐만 아니라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이번 시즌에 읽을 책들 모두 엄밀히 따지면 야사에 속합니다. 공자가 역사 교과서로 쓰기 위해 편집한 『서경』 역시 야사에 속하는데, 다만 그것은 정사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공자의 저서 중 무엇도 정사로 인정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경』, 『시경』, 『역경』은 원래 경(經)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경전으로 읽히면서 경(經)이 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시험의 단골문제로 출제됐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기록이 왜 정사로 인정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경』은 인물들의 말을 위주로 기록한 기언체(記言體)로 쓰였다고 합니다. 기언체의 반대로는 사건을 위주로 기록한 기사체(記事體)가 있습니다. 기사체(記事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춘추』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사건이 명확히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기언체의 작품이든 기사체의 작품이든 말과 사건 중 어느 하나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을 중심으로 서술했느냐 아니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서경』은 요순시대와 하은주 삼대에서 왕위가 바뀌는 것에 주목해서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입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째는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한 선양입니다. 둘째는 무도한 군주를 쫓아내거나(放) 벌하는 것(伐)입니다. 셋째는 혈족에게 물려주는 세습입니다. 하지만 우쌤은 기록된 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선양과 방벌은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그려지지만 어쩌면 그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요와 순, 우의 아름다운 선양 이야기는 사실 부족전쟁을 승자가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무도한 주왕을 벌하고 대신 천하를 차지한 무왕의 이야기 역시 승자의 관점에서 꾸며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출토되는 기록이나 물건들을 보면 주왕은 생각보다 무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화를 선도한 대단한 임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주지육림과 같은 폭정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처음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왕의 정벌 역시 어떤 의로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왕은 주나라를 차지하고 죄수를 석방하고 충신의 묘를 수복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다고 하지만, 기록을 보면 계속 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은나라의 문화 수준이 엄청 높았고, 무왕은 그저 은나라보다 강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은나라를 차지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쌤이 도끼 들고 쳐들어갔다고 얘기하시는 게 계속 생각납니다. ㅋㅋㅋ 주왕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얘기되는 걸왕도 사실은 그렇게 폭군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걸왕이 폭정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단지 주왕과 걸왕을 같이 묶어서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탕왕은 걸을 추방하고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나는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을까 두렵다.”

그 다음으로 재밌었던 얘기는 탕의 손자 태갑과 이윤의 이야기입니다. 태갑은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창업한 탕왕의 손자입니다. 태갑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 방탕한 생활을 하자 이윤이 태갑을 정신 차리라고 추방시키고 3년 동안 동궁에 감금시켰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온 태갑은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정신을 차렸고, 이윤은 태갑에게 나라를 돌려줬다고 합니다.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로는 문왕과 강태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과 자신의 조카를 도와 나라를 진정시켰던 주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윤이 부덕하다는 이유로 태갑을 쫓았던 이야기를 나중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썼다고 합니다. 저는 역사를 잘 모르니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한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례를 해석하기에 따라 역사가 엄청 다르게 읽히고, 그런 점에서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춘추 좌전』을 읽습니다. 간식은 하동쌤과 정수쌤에게 부탁드렸습니다. ㅎㅎ 모두 더위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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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4 23:34
    그토록 신봉하는 거룩한 계보에 감춰진 흑역사라니, 역사란 놈, 참 아조 부정해 버리기도 그렇다고 순진하게 믿고 따를수도 없고~~. 그래서 늘 문제가 되는 거겠지? 그 문제를 어떻게 문제화할 건가를 우린 배우고 있는 거겠고. 그나저나, 규창이 참, 부지런도 하구나~~^^ 근데, 내용 중에, '이윤이 부덕하다는 이유로 태갑을 쫓았던 이야기를 나중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썼다고 한'다는 거 맞나 확인해 볼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