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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알바생 “훈이의 일기”] 2화

작성자
김훈
작성일
2020-09-27 18:14
조회
372


규문의 최고령 인턴 4n세 훈샘이 내년 공부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 출장을 떠났습니다.
훈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 훈 샘이 읽고 계신 책 이야기까지 다양한 썰들을 가볍게~ 풀어볼 예정입니다. 
무려 주 2회! 매주 수, 일 저녁 6시에 연재될 예정이니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_비정규 알바생 “훈이의 일기” 2화

2020년 9월 25일 금요일

전라도 영광에서 5일간의 측량을 마치고 순창으로 이동했다. 막노동 용어로 그동안 네대가리 반을 한 것이다.(하루 일하면 ‘한대가리’라고 한다. 차로 이동만 했을 시에는 ‘반대가리’라고 해서 일당에 반을 준다. 총 일한 5일 중 첫 날은 영광으로 이동만 해서 반대가리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추석 전까지 9일간은 줄곧 일하게 된다. 즉 한대가리는 12만원, 이동만 할 시에는 반대가리 6만원, 우천 시에는 무급이다. 추석 전까지 할 여덟대가리 반을 계산하면 102만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5일간의 추석 연휴가 끝나면 제주도에서 약 2주간 더 일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구두로 계약한 알바기간이다. 나는 말버릇처럼 지인들에게 ‘떼돈 벌어 오겠다’라고 말한다. 먹고 재워주니 고스란히 돈이 모이데다가 일을 마치고는 오후 3시부터 가까운 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한 달여 정도 일해서 겨울 몇 달을 날 수 있다면 나에겐 어마어마한 돈이니 떼돈이다. 일용직 알바치고 이만한 횡재도 없다.

측량 보조는 3m의 금속 재질로 된 긴 막대(스타프)를 오른 어깨에 짊어지고 왼손에는 스타프를 세울 때 필요한 발판을 든다. 그리고 등에 물과 화장지, 간식.., 등이 든 가방을 메고 걷는다. 스타프(7kg), 발판(3kg), 간식 가방까지 몸에 들고 걷는 총 무게는 대강 십여 킬로 정도다. 장기간 걷기 때문에 어깨, 목, 허리, 허벅지, 종아리 어디 안 쑤신 데가 없다. 특히 오른쪽 어깨는 수건으로 감싸도 스타프를 메는 요령이 몸에 밸 때까지는 붓고 쓰라린다.

하루 걷는 측량 구간은 왕복 3km 정도로 총 6km를 걷는다. 그리고 그 구간을 걸으며 30m ~ 50m마다 발판을 깔고 스타프의 두 다리를 펼쳐서 그 위에 세운다. 그런 다음 스타프 뒷면에 붙은 수평계의 작은 물방울이 중앙에 오도록 조절해 맞춰주면 된다. 이것이 내가 하는 측량 보조의 대략적인 일이다.

기계수의 장비는 ‘수준측량기’로 30m~50m의 이동할 때마다 양쪽 스타프 중간에 장비를 세우고 스타프 표면의 바코드를 읽어 높이 값을 계산한다. 대한민국 전 국토의 직선거리 3km의 망 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국가측량기준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의 높이 값을 ‘수준측량’으로 구한 다음 ‘GPS 측량’의 평면 값을 구해 컴퓨터로 돌리면 국가측량기준점의 데이터가 산출된다. 여기서 ‘수준측량'이 내가 하는 알바다. 이렇게 산출된 데이터는 지도, 차량 GPS 등등.., 공공의 측량 기준점으로서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국가 지리원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신호수가 있다. 두 명의 신호수는 도로 양쪽에 오는 차량을 통제하고 먼저 앞서가 파란색 락카로 스타프와 기계수가 멈춰 세워야 할 위치를 미리 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열악한 측량회사들은 신호수를 쓰지 않거나 한 명만 쓴다. 지리원 법규상 수준측량원은 5명이지만 원청은 입찰 받은 금액의 50% 이상을 가져가고, 영세한 하청 업체에게 모든 일을 떠맡긴다. 한마디로 손도 안되고 코를 푸는 격이다. 사정이 이러니 하청업체는 인건비에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알바 하는 곳은 총 4명으로 신호수가 한 명이 있다. 그 덕에 차가 많은 국도나 산업도로에서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다.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다섯대가리 반을 했다. 어제부터 오른쪽 발목이 걸을 때마다 저리고 아팠다. 아마도 스타프를 오른쪽으로 드니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려서 그런 거 같다. 좀 불편하더라도 왼쪽으로 들어보려고 애썼다.

라다크에서는 여든 살의 노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80년간의 순례를 마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산 만큼의 세월이 고스란히 순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사는 라다크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고되고 힘들다. 히말라야의 산으로 둘러싼 마을과 마을 혹은 마을과 시내로 가는 길은 늘 험난하고 멀다. 하지만 풍요로운 도심에 살고 있는 나의 육체는 편하다.

작년 봄에 서울 부모님 집을 떠나 적은 돈으로 제 짐을 부리고 살려니, 마침 선배가 소개해 준 허름한 시골집이 제격이었다. 애초에 시골에 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골에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건축과를 나온 탓에 톱질과 망치질은 자신 있었다. 가진 돈을 탁탁 털어 2달 동안 집을 수리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나름 구색을 맞춘 집이 됐다. 그리고 집 주변으로 텃밭이 넓어서 고구마. 생강. 옥수수, 토마토.., 등을 심었다.

이곳은 경상도 영주 시내에서 좀 멀리 떨어져 버스가 하루에 두 대만 다니는 곳이다. 그래서 차가 없으면 집수리하다 공구가 하나만 부족해도 윗집 형님에게 부탁해야 했다. 평소 대중교통이 편리한 도심에서는 차가 사치라 여겼던 내가 얼마 전에는 자동차 면허증을 땄다. 지금 생각해보면 편리한 도심의 삶에 젖어 뭔가에 홀린 듯,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왔던 것 같다. 돈 벌고 쓰는 일 외에는 나이 마흔이 넘긴 나이임에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을 떠난 것도 처음이고 내 집을 사서 수리한 것도 처음이다, 시골에 사는 것도 처음이고 텃밭을 일궈 농사를 지어보는 것도 처음이다. 차 면허증도 처음이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처음이었다. 시골은 몸이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들 투성이지만 도심에서 얻을 수 없는 정신적 만족이 있었다. 또한 의지만 있다면 이런 정신적 만족을 도심에서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비기너스 세미나에서 이반 일리치의 <전문가들의 사회>을 읽을 때, ‘스스로 선택한 내핍생활이 어떤 즐거움과 이점을 주는지..,’라는 짧은 문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돈과 시간이 생기면 나는 줄곧 낯선 나라의 여행을 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여행보다는 몸이 고되고 피곤해도 정신적 만족이 큰 순례를 해보고 싶었다. 시골에서처럼 도심에서도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의 추천으로 감이당의 세미나를 다니기 시작해서 그 연을 따라 규문까지 오게 됐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듯이 측량 알바도 순례라는 관점으로 보면 일이 마냥 고되지는 않다. 일리치가 내핍생활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고됨이 나에게 오히려 즐거움과 이점을 준다. 돈 주고 먼 나라 순례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돈도 벌면서 순례길을 걷는 것이다. 예전에 ‘순례’라는 다큐에서 예수처럼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걷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내 측량 알바도 십자가를 지고 걷는 것처럼 스타프를 지고 걷는다.
전체 18

  • 2020-09-27 18:42
    아이고 재미지다 재미져.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하고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일 끝나고 나서 고된 몸으로 글을 쓸 때 힘들면서도 즐거웠을 훈샘이 그려지네요.

    • 2020-09-27 21:17
      고된 몸으로 쓰고 있지만 즐겁게 하고 있는 거 맞습니다. ㅎㅎ

  • 2020-09-27 22:12
    토욜부터 두 번째 글이 왜 안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애독자 2 ㅎㅎ
    스타프를 지고 걷는 순례 알바... 몸은 고되도 마음이 즐거우시다니 내핍 가운데 내공이 단단하신듯! 내일 여섯 대가리 반도 화이팅입니다.

    • 2020-09-28 19:12
      오늘까지 일곱대가리 반~무사히 마쳤습니다. ㅎ
      부족한 글인데 다들 응원해주니.. 그저 쑥쓰럽고 고맙고 파이팅 되네요.
      일기는 수요일과 일요일날로 수정했습니다. ~^

  • 2020-09-27 22:50
    선생님...시간좀 지켜주세요.. 토요일 6시에 얼마나 들락날락했다구욧!!!ㅎㅎㅎㅎㅎㅎ
    모쪼록 무사히 일 해내시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육체의 피로가 대단하실텐데 글쓰시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마음의 균형을 잃지마시고 끝까지 건강하게 대가리들을 마치시길...

    • 2020-09-28 19:17
      ㅎㅎ 아무래도 토요일에 쓰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수요일과 일요일로 수정했습니다. 더는 기다리지 않게끔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고 즐겁게 쓰겠습니다~^

  • 2020-09-28 08:41
    규문의 새로운 르뽀형 글쓰기네요~ 매우 새롭고 흥미진진합니다^^ 영주라니! 귀농해서 부석사옆 사과밭을 일구는 친구부부가 있어 저도 종종 가는 곳이라 반갑네요^^

    • 2020-09-28 20:15
      르뽀형 글쓰기라 생각지 못했었는데.. ㅎ
      흥미진진했다니.. 다행입니다.~!!
      영주라고 하면 다들 생소해 하더라구요. 그런데.. 영주에 친근한 분이 여 계셨군요. ㅎ

  • 2020-09-28 10:47
    훈샘~
    얼굴 본지도 오래되었는데, 일기가 마치 세미나 할때처럼 생생한 말로 읽히네요.
    알바기간 동안 건강 챙기시고, 샘의 떼돈벌기를 응원하며, 다음 일기도 기다릴게요^~^

    • 2020-09-28 20:08
      떼돈 벌어오겠습니다. ㅎ
      말처럼 잘 읽힌다니, 쓸때마다 어떻게 하면 꾸미지 않는 진솔하고 쉬운 글이 될 수 있까. 고민했던 것이.., 다행이네요 ~^

  • 2020-09-28 14:07
    훈샘의 고된 순례길이 행복을 주는건 책 읽기 공부가 함께하기 때문이겠죠. 샘의 글을 읽는 사람들과도 함께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응원합니다~한권의 책이 되기를~^^

    • 2020-09-28 20:29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ㅎ 개인의 삶이 그런 관계성을 이해할 때 고된 일도 즐거운 일로 변화는 것 같습니다. ^

  • 2020-09-28 16:30
    스타프를 지고 걷는 순례길이 흥미진진합니다. 일하는 얘기도 재밌고, 훈쌤의 영주집 이야기도 재밌네요. 숙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궁금해집니다! 써주실 게 많네요! 벌써부터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글에서 훈쌤의 목소리가 들리네요. ㅋㅋㅋ 신기합니다.

    • 2020-09-28 20:38
      제가 평소 말하는 투가 글에서 베어나서 그럴까요. ㅎ 재미있다니 정말정말 다행입니다. 쑥쓰럽고 나름 걱정을 했는데.ㅎ
      그리고 쓰다보니 쓸거리가 점점 불어납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 일하는 중에 생기는 많은 변수들, 숙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등등.., 말입니다. ^

  • 2020-09-28 21:02
    이러다 연옌병 나는거 아님?ㅋㅋㅋ 댓글 달지말고 맞춤법이나 어케 좀 해바바!! 그와중에 김훗이 몹니까 김훗이. 맘대로 업뎃 날짜 바꾸고 말이지! 글고 눈웃음 하나랑 둘은 구별 기준이 무엇인고?

    • 2020-09-28 21:39
      도저히 맞춤법이;; 헤갈립니다. 맞춤법는 연휴동안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아직 연옌병 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ㅎ
      바꿔다기보다 제가 잘못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 쉰다고 해서 일요일 쓰는 걸로 생각했거든요;;

  • 2020-09-30 18:42
    좋은 글이란 건 꼭 맞춤법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전달력과 공감이 훨씬 중요하죠. 자칫 그런 걸 신경쓰다 본질을 흐리지 마시고 묵묵히 편하게 글 쓰시길 응원합니다.

    • 2020-09-30 19:08
      전달력과 공감 그리고 맟춤법도 틈틈히 훈련하면서 묵묵히 내공을 쌓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