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1.1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1-07 14:52
조회
541
마지막 수업인 줄로만 알았으나 담주에 보너스처럼 한 주 수업을 더 남겨둔 채 <에티카>와 <화엄경> 읽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
에티카랑 다섯 권짜리 화엄경을 모두 완독하고 읽을 때마다 글을 쓴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요 ㅋㅋㅋ
아마 우린 못해도 상위 0.01%일 거예요.
아직 남은 날이 좀 더 있지만 좌우지간 모두 수고하셨어요.

다음 시간에는 나눠드린 프린트물(까르마 C.C.츠앙 <화엄철학> 253~298) 꼭 읽어오시고 가져오셔요.
고걸로 딱 두 시간, 세미나 없이 수업 진행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에세이 주제로 할 만한 문제들을 여럿 얻어들었습니다.
가령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신비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든지.
아니면 스피노자가 에티카 5부에서 말하는 자유 개념과 화엄경에서 보여주는 보살의 자유는 어디에 접점이 있을까?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근대적 앎의 체계인 지식과 어떻게 다른가? 등등.
어찌되었든 각자 두 학기에 걸쳐 두 개의 텍스트를 병행해 읽으면서 가장 미스테리하다거나 인상적이라거나 한 지점을 문제화해오시는 걸로.

마지막 수업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전생에 자신이 부처의 유모로서 부처를 기르고 보살폈다는  룸비니 숲 신의 이야기에 대한 채운쌤의 설명이었습니다.
유모란 한 어린 존재를 먹여주고 재워준 존재, 그러니 룸비니 숲 신이 모신 부처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부처에게도 어찌되었든 유모가 필요합니다.
그저 한 사람이 온전히 제가 잘난 덕에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장성하기까지 그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겹겹의 인연 조건들, 태어나기 전부터 현재까지 그와 깊게 만나거나 얕게 만나고 스쳐가고 혹은 그를 내팽개친 모든 존재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 만물이 다 나의 유모이고 어머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테지요.
그러니 내가 좋다고 선하다고 여기는 것만이 내 유모도 아니며, 그렇다고 거꾸로 내가 나쁘다고 악하다고 여기는 것만이 내 유모인 것도 아닙니다.
그저 셀 수 없이 많은 유모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보살은 중생의 차이는, 이 사실을 그가 온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이 내 어머니임을, 지금 여기에 자신을 있게 한 존재라는 측면에서 자신을 키워준 자임을 아는 자랍니다.
그렇기에 보살행이란 잘난 인간이 못난 인간에게 건네는 도움의 손길과 계몽의 말일 수가 없습니다.
깨달은 자가 다시 세계 안으로 철저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거기 그의 어머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그의 유모이고 선지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를 뼈저리게 아는 순간, 내 곁에 있는 모든 존재가 내 선지식이라는 것, 도반이고 스승이고 어머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도 보살처럼 살 수 있게 되겠지요^^

채운쌤이 말씀하신 보살의 지혜란 실상 이런 것이니, 이 지혜와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상통하는 부분을 생각해보면 좋겠지요.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신에 대한 사랑이란 세계에 대한 믿음이고 무한 긍정이라고 합니다.
내게 닥친 일들을 가지고 행과 불행으로 나누어 가치매김하면서 감정을 일으키는 자는, 세계(=우주=자연=신)의 법칙에 무지한 자입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란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준비된 일 혹은 그 반대의 일 같은 것도 없습니다.
신은 오직 끊임없이 만들어낼 뿐입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할 뿐입니다.
이를 깊이 이해하고 긍정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기 감정에 휩쓸리고 자기가 만든 표상에 갇혀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예속된 삶이라 말했었지요. 자기 감정에 따라 일어난 일을 판단하고 세계를 판단해버리는 자는 지독히 수동적인 자라고 말입니다.
불교적 개념어로는 이를 탐진치라 번역할 수 있겠네요.

재미있게도  불교도 스피노자도 우리가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말할 때, 보살들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라, 믿음이랍니다.
스피노자는 이 믿음 위에서 실제로 인식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수동성에서 벗어남을 몸소 증명해보이지요.
우리가 읽은 <에티카>가 바로 그 증거물일 겁니다.
질투, 복수심, 연민 따위의 감정들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형성되는지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그 감정이 결코 실체일 수 없음을, 내 신체를 둘러싼 특정 조건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다시 그보다 강한 감정에 의해 밀려가 사라지는 현상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인간은  더이상 그 감정에 같은 방식으로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되지요.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수동성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5부 정리3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수동적이기를 멈춘다."
얼마 전에 쪼끔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로 발끈 화가 나버렸는데, 그 순간에 이 화가 어디서 어떻게 난 것인지, 내가 지금 어떻게 화를 내고 있는지가 보이면서, 순식간에 화가 풀리고 다른 감정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 그 이행을 볼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아주 기뻤지요.
뭐랄까, 이제 저도 조금은 그 '신심'이라는 게 생기는 듯한 기분입니다ㅋㅋ
인식을 통해자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말, 자유로유질 수 있다는 말, 이는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었어요.
자기 신체의 변용에 대해 보다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려는 노력, 아울러 신체를 다양한 마주침 안에 놓아둠으로써 능동적으로 관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 이게 곧 배움이고 수행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오직 배우고 수행하는 그 과정 안에서라야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공지를 위해 책을 다시 펼쳤다가 제가 낙서처럼 "선재동자는 지금도..."라고 흐리게 써놓은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저한테 선재동자는 자유를 위해 인식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대명사처럼 느껴집니다.
스피노자도 그러니까 선재동자인 셈 ^^
우리도 기왕 공부하겠다 맘 먹은 거, 선재동자가 되어야 할 텐데요. 그죠?  (그러니 일단은 에세이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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