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104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1-02 12:32
조회
615
일단 모든 분들, 올 한해도 힘든 일 성가신 일들 참 많으시겠지만 모쪼록 함께 재미난 공부하며 그럭저럭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보아요~
그리고... 공지가 너무 늦어진 점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_=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욥;

기억을 더듬어 지난 수업 이야기를 좀 해보지요.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아마 다들 비슷하셨던 것 같은데) 배움을 구하는 선재동자의 태도, 그리고 선지식과의 관계였습니다.
불교적 가르침보다도 선재가 보여주는, 배우려는 저 마음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에 대한 채운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 선지식은 아무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무조건 가르쳐주는 자가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가르쳐주는 자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선재가 가르침을 구했으므로 선지식들의 말이 가르침으로 다가온 것이며, 선재 스스로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낸 것이라 봐야 한다.
보살의 보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채운쌤 말씀에 의하면 보살은 중생 하나하나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쪽집게처럼 알아내 그걸 주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건 아가들 기도 속 산타할아버지한테나 가능한 일;)
여기서도 주는 자보다 받는 자의 역량이 훨씬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남들에 제아무리 그것이 좋은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 한들 우리는 결국 우리 역량/욕망만큼만 어떤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물인들 받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받을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은 그 자신이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는 만큼 결국 구하기 마련이고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선재는 그 모든 낯선 시선과 경험과 말을 감당할 수 있었고, 감당하길 원했으므로 그 머나먼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족족 배울 수 있었지요.
어쩌면 선재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런 선재와 만났기에 몸을 파는 여인과 모래를 가지고 노는 어린애와 폭정을 일삼는 왕 등이 그 인연장 안에서 보살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어린아이와 온갖 장사치들 앞에서도 한결같은 선재의 저 태도를 배우는 자가 가져야 할 어떤 조심스러움, 사려깊음 같은 걸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가진 표상들과 그간 쌓아놓은 배움을 접고 눈앞의 존재와 만나지 않으면 그로부터 배움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공부하는 데 있어 나한테 필요한 건 들여다보는 책에 대해 주석을 다는 일보다도, 저런 마음가짐이 아닐까... 이번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눈앞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내 선지식으로 삼고, 그로부터 배우려는 마음, 그런 관계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선재와 선지식 사이의 만남은 그런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선재의 여일함도 이 지점에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여일함/항상성이 차이를 생성한다 하셨는데, 얼핏 들으면 이상한 말이지요.
항상성과 차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거꾸로 말하면 보다 이해가 쉽습니다. 방일함은 동일성의 추구입니다.
누구든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바짝 긴장하고 날이 서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게 되지요.
하나의 메뉴얼을 확립하고 자신이 만든 패턴에 익숙해지면서 몸이 절로 그렇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 자체가 동일한 탓에 쉬이 지루해지고 해이해진다고 여기지만, 실은 일을 그렇게 동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아주 열심히 패턴을 확립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번 다른 것이 싫고 귀찮으므로(그랬다가는 매번 처음과 같은 에너지를 투여해야 하니까) 애써서 그것에 패턴을 부여하는 거죠.
고로 게으름은 달라지길 거부하는 내 의식이 현행화된 것.
덕분에 이제부터  의식은 반쯤 잠든 채로도 얼마든지 맡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눈앞의 존재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구하는 선재에게는 게으름이나 피로가 찾아올 기회가 없지요.
모든 것이 스승이고 모든 것이 부처의 설법이므로 방일할 틈이 없고, 그렇게 깨어 있으므로 매번 무언가를 새로 깨치고 버리면서 존재의 변신을 도모합니다.

어제 모처럼 휴일을 맞아 재미난 SF소설을 읽었습니다.
J.G.발라드(크로넨버그의 영화 <크래쉬>의 원작소설로도 유명합니다)의 지구종말 3부작 중 한 권인 <크리스털 세계>가 그건데요, 제목 그대로 종말 즈음해서 이상징후로 사물들이 크리스털화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집과 수풀도 아주 영롱한 크리스털에 덮여버리는데, 이를 암세포에 비유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암세포처럼 자가증식하는 크리스털은 모든 것을 자기와 똑같은 것으로 만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만들지요.
아직 산 사람들도 거기 압도돼 이상한 짓을 일삼습니다.  작중화자는 이를 '시간의 종말'이라 진단하더군요.
지구 종말의 증거는 지구상 시간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같아진다는 것, 더이상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암세포에 뒤덮인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파시즘적 현상이며 시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죽음으로 내달리는 길입니다.
요즘 <차이와 반복>을 읽고 있어서 더 흥미로운 작품이었는데, 아무튼 여기서 핵심 모티프는 동일성의 반복, 극도의 피로감 등이더군요.
방일한 자는 사실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리는 자, 에너지를 아껴 피로와 거리가 먼 삶을 살 것 같으나 실은 가장 피곤에 찌든 자, 다른 말/다른 마음을 받아들일 역량이 없는 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방일한 자들이 지천에 널렸다는 건 확실히 지구 종말의 징후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_-;

하지만 스승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사리불과 목건련 등을 방일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이건 제가 그쪽 공부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뭐라 잘 설명이 안 되네요.
가장 뛰어난 제자들이라 스승을 대신해 설법도 했다던데 그럼에도 그들이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건 아직 때가 안 되서인 걸까요 -_-?
전에 읽은 구절에서는 선근을 익히고 가꾸지 못한 탓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이해 안 가는 건 매한가지.
선재와 사리불은 또 뭐가 어떻게 다른가... 이것도 워낙 열 제자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놔서...;;
이게 다 수업 중 함께 읽은 복사물에서 그 한 구절 "사리불이나 목건련과 같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함께 들었어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가 눈에 밟혀서 그래요 킁.
사리불은 자신이 이해 못한 것조차 몰랐을까, 아니면 이해 못한다는 사실만은 알았을까. 그랬을 때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자, 암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난 수업 시간도 알차고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뭐 이리 식상한 표현을...; ㅋ)
이제 대망의 마지막 수업만을 남겨두고 있어요.
모두 아시다시피 화엄경 끝까지+에티카 끝까지 읽어오심 됩니다. 공통과제는 화엄경 가지고 써 오시는 걸로.
마지막 수업이라 뒷풀이를 하면 좋겠지만, 두 책을 다 끝내는 자리라 어찌 될 지 모르겠네요.
좌우지간 우리는 이번 주도 여일하게 보냅시다. 월욜에 만나요.
간식은 미영쌤~
전체 2

  • 2016-01-02 12:42
    <크리스탈 세계>라... 땡기는 군! 어느덧 불교n도 막바지! 자, 이제 슬슬 에세이 준비하셔야지요?^^

    • 2016-01-02 14:03
      드리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