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2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2-16 13:36
조회
350
지난 시간에는 전쟁기계 개념을 배웠습니다. 핵심이 되는 사항 몇 가지만 정리해볼게요. 자세한 후기는, 언제나 그렇듯, 건화군이 ^^

하나, 전쟁기계는 전쟁이 아니라 국가의 외부를 구성하는 ‘되기’를 수행한다.

전쟁밖에 모르는 기계라서 전쟁기계가 아니죠. 들뢰즈+가타리도, 채운쌤도 몇 번씩 강조한 사항입니다.
전쟁기계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되기의 창출. 국가적인 것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달아나는 힘이야말로 전쟁기계의 본령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아카데미가 아닌 곳에서 공부하는 실험, 혈연가족이 아닌 이들과 마을을 꾸리는 실험, 사회‧문화적 젠더 포지션을 흔드는 연애 실험(응?) 등등을 통해 국가적인 것, 상식과 양식에 부합하는 제도 및 관습들에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목소리와 질문을 끌어내는 것, 그게 전쟁기계죠.
그러므로 전쟁기계는 제도적으로 명명 가능한 이름이나 지위가 있을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전쟁기계는 존재론적으로 변신하는 자, 척도를 거부하는 자, 이름을 거부하는 자니까요.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친구들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고유한 리듬으로 강밀도를 표현하는 존재, 그게 전쟁기계입니다.
그러니 국가에 저항한다고 해서 망명을 하고 안 하고, 이런 건 여기서 문제가 안 되지요. 다만 국가 안에서도 국가적인 것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는 힘, 국가 안에서 국가적인 것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전쟁기계의 역량이 됩니다.
세금 납부를 거부한 소로우, 의료제도를 거부한 일리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전쟁기계!

둘, 유목민은 정주민=이주민처럼 點 사이를 이동하지 않고 앉아서 유목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주민과 이주민을 크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정주민이란 더 나은 환경을 찾는 데 성공한 이주민에 다름 아닙니다.
더 많은 연봉을 찾아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청춘,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이 동네 저 동네를 옮겨 다니는 부모, 더 그럴싸한 파트너를 찾아 이 상대 저 상대와 맞선보는 남녀, 이들은 모두 그런 의미에서 이주민이고 일시적 정주민입니다.(동시에 바로 그렇게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주민이기도…)
저자들은 점과 점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들과 대비해 유목민은 선을 그린다고 표현하는데요,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달리 종착역 없이, 자신들이 통과하는 모든 곳을 일종의 중계점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 최상의 장소 따위의 이데아를 좇아 정처 없이 세상을 헤매는 것을 유목으로 볼 수 없겠죠. 유목은 최상의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의 에너지 / 조건들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그것과 더불어 그 장소의 고유한 리듬을 창출할 수 있는 존재, 말 위에서 잠들었다가 금세 전사가 되어 질주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유목민이랍니다.(앉아서 유목하기!)
고로 한창 텔레비전에서 ‘디지털 노마드’ 운운한 소리는 들뢰즈적 유목의 의미와 아주 다르지요. 다만 국가적인 것이 파놓은 홈을 따라 공간을 이동하는 자는 유목민이 아니라 정주민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목민은 전쟁기계의 한 극을 담당한답니다.

셋, 전쟁기계는 속도를 창출하고 정동을 무기로 삼는다.

속력에 대비된 속도 개념이 아주 인상적이었죠. 채운 쌤에 따르면 속도는 고유한 변신 역량을 의미하는바 척도가 되는 것을 가져올 수 없으므로 비교가 불가능하답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속도 개념은 강밀도와 결부지어 이해하심 좋을 것 같습니다. 개체의 변신 역량, 탈영토화의 역량, 이를 보여주는 것이 개체의 고유한 속도라는 사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속도가 클리나멘의 발생과 함께 만들어진다고 한 것 같습니다. 기존에 그려오던 선에서 비껴나 새로운 선을 그리기 시작할 때, 하여 질적 변이를 일으킬 때, 그때 특유한 질적 속도가 발생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국가적인 것, 외부의 힘들을 내부화하려는 힘들에 맞서는 전쟁기계는 언제나 속도를 창출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때 전쟁기계의 무기가 되는 것이 정동이랍니다.
수업 시간에 채운쌤께서는 우리가 홈 패인 공간에서 일정하게 코드화된 삶을 받아들일 때는 일정한 감정을 생산한다고 설명하셨죠.
어떤 일 때문에 들뜨거나 실망하고, 누군가 때문에 기쁘거나 불쾌하고… 우리는 늘 이런 감정들을 일정하게 겪으며 하루하루를 삽니다.
그런데 때로 감정들이 교란될 때가 있대요. 그것은 배치물과 도구들이 변환을 맞이했을 때라는데, 바로 이때가 크건 작건 혁명의 순간일 수 있겠지요.
슬퍼하며 한숨짓던 농민이 낫을 드는 순간, 나라의 말을 하늘의 명처럼 떠받들던 노인들이 주민증을 태우는 순간, 감정은 교란되고 주체는 하나의 정념에서 다른 정념으로의 이행 그 자체를 겪게 됩니다. 채운쌤은 바로 이때가 정동이 생산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입력된 정도에 대해 코드화된 반응을 생산하는(감정) 회로를 벗어나 코드화되지 않은 것이 생산되는 순간, 오직 속도가 문제되는 순간, 이게 정동이 표출되는 때라고.
그래서 모든 ‘되기’는 정동을 동반한다지요.
작가가 여성-되기에 이르는 순간, 투사가 동물-되기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신의 고유한 속도를 창출하면서 정동을 생산한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비로소 그는 규정 불가의 존재, 無位의 존재, 고정된 주체성을 벗어나 空에 이른 존재가 된다고!

 

자, 다음 주에 읽을 13고원은 12고원에 이어(명제 10부터 시작하네요)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들 복습 잘 하시고 13고원 재미나게 읽어오시길^^
간식은 전연미쌤+홍명자쌤께 부탁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전체 1

  • 2016-12-19 14:02
    유목민에 대한 설명이 오~! 하는 감탄사를 뽑아내네요! 단지 정착할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창출하는 것. 그런데 이때 자신만의 리듬은 되기와 연결되나요? @.@;; 정착민과 이주민을 남들이 결국 정착지에서 남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삶의 양식을 모방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까요? 모르는데 너무 막 던지는건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