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14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19 12:01
조회
418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은 항상 대립되는 것의 쌍으로 작동합니다. 대표적으로 리좀과 나무가 있겠고, 선적인 것과 점적인 것, 소수적인 것과 다수적(표준적)인 것 등등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12고원에서는 국가 장치와 전쟁기계가 이러한 대립 쌍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들뢰즈‧가타리의 구도에서 대립 쌍의 한 쪽은 다른 한쪽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램분자적인 것은 분자적인 운동에 의해 형성되며, 또한 분자적인 운동은 그램분자적인 것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가 전쟁기계를 이야기할 때 이들은 단순히 국가에 대립하는 어떤 힘, 어떤 운동에 주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라는 것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요? 채운쌤은 국가란 일종의 추상기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가는 어디에 있나요? 헌법이 국가일까요?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국가일까요? 푸코의 연구나 안티오이디푸스에서부터 이어져 온 들뢰즈‧가타리의 미시정치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국가 권력이 거시정치의 차원에 국한되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어딘가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작동하게 하고 국가에 협조하는 힘은 도처에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국가를 작동시키는 권력들은 공적인 기관들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교회에서, 심지어 거리 곳곳에서 작동합니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국가를 바로 그러한 미시적 권력들을 공명시키는 공명상자, 그것들을 중앙 집중화하는 잠재적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는 추상기계일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볼 때 국가는 특정한 시스템이나 제도와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 자체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번 고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국가란 항상 그것의 외부와 함께 작동한다는 것이었죠. 들뢰즈‧가타리는 국가를 역사의 어떤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에 저항하는 힘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 항상 존재해 왔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가의 역사적인 탄생 이전을 어떤 자연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중앙집중화하고 흐름들을 수로화하고 홈을 파는 작업을 하는 국가적인 힘과 홈 패인 것을 무화시키는, 그것에 저항하는 힘이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저항하는 이 힘을 전쟁기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왜 전쟁일까요? 저는 전쟁이라고 하면 항상 국가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이 떠올라서 이것이 국가에 저항하는 힘이라고 하니 조금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채운쌤은 푸코의 논의를 통해서 이것을 설명해 주셨는데, 푸코는 사회를 전쟁모델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사회는 늘 힘의 불균형성에 의해 작동하는, 지배하려고 하고 지배당하는 힘들의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국가일지라도 그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모순과 전투야 말로 집단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상태를 지속적으로 불러오는 힘을 전쟁기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가 장치와 전쟁기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들뢰즈‧가타리의 모든 대립 쌍들이 그렇듯, 국가장치와 전쟁기계도 항상 동시에 존재합니다. 국가장치는 단순히 전쟁기계와 대립한 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부화하고 그것에 의해 거듭나며 유지됩니다. 중국이나 유럽 등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국가는 항상 침략해오는 외부적인 힘을 자기화하면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국가가 전쟁기계를 내부화하면서 작동한다면, 전쟁기계는 항상 국가에 포획되지 않는 힘을 만들어가며 고유한 역량을 구성합니다. 채운쌤은 빨치산을 예로 드셨는데요(채운쌤의 어릴 적 장래희망이었다고!?), 빨치산은 중심으로부터의 통제에 의해서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군인과는 달리 어떤 명령 없이도 자신의 고유한 전투능력을 구성하죠. 군인은 어떤 구획되어진 틀 안에서 규정된 역량을 발휘하는 반면 빨치산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환경에 맞게 자신을 바꾸어가는 변신능력을 자신의 역량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장기와 바둑 사이에도 성립하고 야구와 축구 사이에도 성립합니다. 두 경우 모두 전자는 획일적인 코드화에 의해서 각각의 말과 선수가 운동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미리 주어진 규정이 없이 위치를 바꾸어가고 역할을 바꾸어가며 각각의 돌과 선수가 배치에 따라 다른 역량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들뢰즈‧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유목민과 관련시킵니다. 이들에 12고원에서 제시하는 두 번째 공리에 따르면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입니다. 유목주의의 이미지는 여기저기서 많이 차용되고 있죠. '노마드'라고 검색하면 관련된 상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의 이미지로 차용될 때의 유목주의는 머무르지 않고 이동하는 것으로 표상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유목주의는 이동을 핵심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들은 유목민과 정주민을 구분하는 동시에 유목민과 이주민을 구분하고 있죠. 이주는 항상 어떤 공간의 자원이나 에너지를 고갈시킨 뒤에 이루어지죠. 그러니까 정주와 이주는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주민은 항상 이주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때는 인간이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가더라도, 즉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이동하더라도 여전히 정주민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목민은 오히려 비슷한 몇몇 곳을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은 채로 순환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유목민이야말로 이동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므로 정주민과 유목민을 가르는 것은 이동의 유, 무가 아닙니다. 둘 모두 필연적으로 이동을 할 테지만, 각각의 이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주민(이주민)의 이동을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유목민의 이동을 '속도'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운동은 외연적이고 상대적으로 비교 가능한, 점적인 이동을 가리킵니다. 즉 무엇인가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였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이동을 다른 것들과의 비교 속에서 빠르거나 느리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유목민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속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속도가 비교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홈 패인 공간을 무화시키는, 매끈한 공간을 열어 놓는 탈영토화의 운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속도는 점과 점 사이의 이동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것 자체의 변이를 내포하는 절대적 운동을 가리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무기와 도구를 비교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분법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배치의 문제입니다. 무기와 도구는 그 자체로 전쟁기계와 국가 장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배치에 의해서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배치가 가장 크게 교란시키는 것은 바로 정서, 정념입니다. 수치심을 느끼며 예속된 상태에 있던 농부가 농작물을 베던 낫을 들고 반란을 일으킬 때,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그의 정념입니다. 국가 장치에 예속되어 있던 군중이 자발적 예속을 그치는 것은 바로 정동에 의해 촉발될 때입니다. 최근 본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다니엘은 복종을 요구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복지제도에 저항하여 관공서의 벽에 낙서를 합니다. 비록 그는 곧바로 경찰에 붙잡히고 말지만, 그의 행동은 그를 비롯한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의 정념을 다른 방향으로 촉발시켰을 것입니다. 자발적 예속의 상태에 있던 정념이 스스로를 변이시키는 정동(변용태, affect)으로 이행하는 것은 배치의 변화를 수반하며, 배치의 변화는 이와 같은 정서의 변화와 동시적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전쟁기계를 말할 때 그것은 국가의 바깥이나 국가 이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어떻게 국가 안에서 국가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전쟁기계의 역량을 풀어놓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기계의 역량은 항상 배치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겠죠.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에 저항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저항은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실체화된 국가에 맞서는 것으로도, 아니면 국가에 대해서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도 불충분해 보입니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필요한 일일 수 있겠지만 항상 국가 장치에 의해 다시 포획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특정한 배치에 의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생산되는 정념을 바꾸어 내는 것, 정동에 의해 촉발되어 새로운 배치를 구성해내는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제가 무슨 말을 떠들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전체 3

  • 2016-12-19 13:19
    잘 나가다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한 마디 - "제가 무슨 말을 떠들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

  • 2016-12-19 14:32
    진짜 잘 나가다가 급 마무리 ㅋㅋㅋㅋㅋㅋ / 어렸을때 약간 바둑을 배웠는데 이런저런 철학에 등장하는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 ㅋㅋㅋ 아니면 지금이라도 살살 다시 돌을 들어볼까나...?

  • 2016-12-20 18:23
    이분법적 구분에 늘 헤맸는데... 글 초반에 정리해주니 고맙네^^ 차분하게 쓴 글이라 덩달아 차분하게 읽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