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21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22 13:56
조회
371
이번 주에는 13번째 고원 <기원전 7000년 – 포획장치>를 읽었습니다. 13번째 고원은 바로 앞의 12번째 고원인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와 연결되는데요, 12번째 고원에서 저자들이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에 대해서 주로 다뤘다면, 이번에는 국가를 포획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보며 자본주의 분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채운쌤은 우선 일본의 들뢰즈 연구자인 고쿠분 고이치로를 인용하시며 '배치의 선차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실용주의적 권력분석을 행하고 있을 때도 그 권력 발생의 기원에 있는 욕망의 배치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맑스주의적인 분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분석이 생산양식을 이야기하고 계급을 문제 삼을 때, "지배/피지배라는 도식을 부활시켜 '욕망이 자기 자신의 억제를 욕망한다'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들이 계급이나 생산양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배치가, 배치와 내포적인 관계에 있는 욕망이 그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우선 지난 시간에 다뤘던 전쟁기계와 유목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은 유목민과 정주민의 차이는 이동의 유무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반대로, 유목민이야말로 떠나지 않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정주민인 우리들은 항상 더 좋은 곳을 꿈꾸며 떠나죠. 자식교육을 위해 이사를 가고, '탈조선'을 말하며 '선진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나 유목민은 사막과 스텝을 버리지 않는 자들, 자신들의 문제가 사라진 어떤 공간을 꿈꾸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와 마주하여 매번 역량을 새롭게 구성해 갑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부딪혀, 환경과 더불어 역량을 새롭게 구성해나갈 때 그들은 고유한 속도를 갖게 되는 것이겠죠. 이런 점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저자들이 언급했던 제자리에서 여행을 떠나는 분열증자는 유목민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이에 비해 정주민들은 일종의 온실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주민들은 바깥의 환경과 관계하지 않을 수 있는, 그것을 회피해갈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드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예로 우리의 신체는 에어컨 없이는 여름의 더위를 견디지 못하죠. 환경과 더불어 변이할 수 있는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들이 문명에 길들여진 신체를 죄악시하고 사막이나 스텝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는 현실 바깥을 욕망하지 않는 것, 우리에게 발생한 문제가 없어진 곳을 꿈꾸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의 논의가 프로이트·맑스뿐만 아니라 니체의 문제의식과도 만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번 주에 읽은 13고원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이번 고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은 '포획장치'라는 개념입니다. 국가는 뭔가를 죽이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장치이기 이전에 포획하는 장치입니다. 국가가 누군가를 처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포획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포획일까요? 사냥과는 다르게 포획은 자발적으로 먹이를 얻기 위해 오게끔 해야 하죠. 이번 장의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새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포획장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국가를 포획장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때 저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특성일 것입니다. 포획장치가 포획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욕망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포획장치는 자기가 스스로를 잡히도록 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확인했던 부분이지만 들뢰즈·가타리는 국가를 합리적 이성이 발달해 점진적으로 형성한 시스템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중심화하는, 홈을 파는 메커니즘이며, 항상 그것을 저지하는 외부적 힘(전쟁기계)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언제나 존재해왔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에서 원시사회는 교환 없는 전쟁도 전쟁 없는 교환도 아닙니다. 저자들은 13고원에서 이러한 관점을 국가의 발생과 그것의 진화과정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의 발생에 의해서 비축이 생겨나고, 그것을 누군가가 전유함에 따라 국가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배워왔죠.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비축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게 저자들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앞에서 말한 배치의 선차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비축은 그 자체로 잉여가 되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배치(국가)가 있고난 뒤에야 비축은 잉여가 됩니다. "스톡은 토지, 노동, 화폐로, 이 스톡들이 영토로, 도구로, 교환으로 포획될 때 잉여(지대, 이윤, 세금)이 발생"(채운쌤 강의안)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양식이나 생산력의 문제 앞에 '기계적 과정'을 위치시킵니다. 즉 흐름들이 영토화되고 탈영토화되는 기계적이고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생산양식 또한 출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욕망들의 배치에 의해 특정한 조건들이 형성될 때 사회구성체 또한 형성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맑스주의 역사관의 난제였던 동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왜 아시아는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화 되지 않았을까? 생산양식을 기계적 과정의 결과로 본다면 이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각기 다른 사회구성체들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화하려는 힘과 탈주하는 힘의 공존이겠죠. 세미나 중에 수경쌤은 들뢰즈·가타리가 국가를 우리가 상식적으로 갖고 있는 인상에 비해 훨씬 유동적이고 허술한(?)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 같습니다. 저는 국가를 자체로 거의 완전하고 견고한 시스템으로 이해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것이 무너지거나 다른 형태로 이행하는 것은 외적인 힘에 의해서일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고대전제국가에 의한 덧코드화는 동시에 탈코드화 하는 힘을 풀어놓습니다. 야금업자, 상인, 장인 등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초코드화(덧코드화)에 의해 발생한 배제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덧코드화를 곧바로 따라오는 상관물이지만, 동시에 국가를 위협하는 탈코드화된 흐름으로 작용합니다. 국가는 이들의 기술과 상품을 포획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국가에 대해서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바라보는 국가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불균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포획장치의 포획은 '마법적'이라는 점이 중요해 보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포획된다는 사실은 항상 망각되기 때문에 이 장치의 포획은 항상 마법적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마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질까요? 국가가 행하는 포획의 비밀은 포획 당하는 자를 불구로 만들어 포획을 용이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불구는 전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의 전제조건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말이 뜻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이죠. 국가는 포획되는 자를 불구로, 결여상태로 만듦으로써 그를 노예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포획되는 자와 포획하는 자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점인데요, 채운쌤은 "마법적 포획의 치밀함은 무엇보다도 포획자를 포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저자들이 부르주아야 말로 가장 노예적인 계급이자, 자본주의의 유일한 계급이라고 했던 게 바로 이와 통하는 말이겠죠.

그런데 자본주의로 오면 이러한 문제는 조금 양상을 달리하게 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그랬지만, 자본주의는 일종의 끝판왕 같은(^^)느낌이랄까… 아무튼 무시무시한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벗어나는 것을 에너지로 삼은 채로 작동합니다. 외부에서 자기 돌파구를 찾고, 위기를 내부화하며 작동하죠. 코드나 덧코드화가 아닌 유연한 공리계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마법적 포획의 파시즘적인 성격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그리고 <천개의 고원>의 많은 고원들에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파시즘을 전체주의와 구분하면서 파시즘이 국가의 명령 이전에 대중 스스로 작동시키고 감염시키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었죠. 파시즘은 대중이 분자적 운동 수준에서 단일한 어떤 것에 고착될 때 발생합니다. 몰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전체주의의 형태로 드러나더라도 문제는 항상 분자적 운동의 왜곡입니다. 자본주의는 파시즘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죠.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체계입니다. 자본주의는 분자적 흐름들을 열어 놓고 흐르게 하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그것을 '자본의 논리'라는 하나의 중심에 수렴되게끔 만듭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특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형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스스로 욕망하게 되어있고 욕망할수록 예속되는 마법적 포획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강한 무력감일 것입니다. 아무런 실체적인 적도, 분명한 원인도 찾을 수 없는 무기력감. 이때 자본주의의 다음 혹은 자본주의 이후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자본주의는 언제든 공리계를 추가하고 제거해서 자신의 위기, 스스로의 모순을 동력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다시 포획되기 쉬운 방식이겠죠. 들뢰즈·가타리는 중심에 대한, 중심을 교체하려는 투쟁보다는 분자적 운동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다수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권리투쟁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공리계가 셀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너무 특별하고 희귀한 어떤 것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공리계 차원의 투쟁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리 사소한 요구라고 하더라도 항상 공리계가 허용할 수 없는 하나의 점을 갖고 있다"고 말하죠. 그러니 문제는 포획되지 않는 신비한 영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공리계가 허용할 수 없는 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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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24 22:49
    내가 돈에 휘둘리는 자본주의 때문이고 그걸 따르는 국가 때문이야! 이런 생각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럼 그게 아닌 다른 생각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ㅋㅋㅋ 근데 들/가의 말에 따르면 이런 배치들 이전에 욕망(코드화....? 영토화....? 모르는 단어를 쓸 수가 없어서 느낌만 ㅋㅋ;;)만이 있을 뿐이고 그것에 따라 우리가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배치가 있는 것이겠죠. 그러면 문제는 개인vs국가처럼 이항대립의 구도가 아니라.... 아니라..... 아니라면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