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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만] 2화 "자유의 실험으로서의 《장자(莊子)》 읽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2-02 20:06
조회
311


자유의 실험으로서의 《장자(莊子)》 읽기


글/ 규창


1.채울수록 공허해지는 아이러니

현재 나는 주택청약 하나, 1년과 2년 단기 적금 하나씩 총 3개의 적금을 들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적금을 3개씩이나 드는지 ‘현자 타임’이 올 때가 있다. 나는 공부라는 활동으로 연구실을 유지하고 구성한다는 명목으로 매달 활동비를 받는다. 여기에 더해 간혹 글로벌 펀드에서 지급받는 원고료를 합한 것이 나의 한 달 생활비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직장을 다니는 또래 청년들이 받는 월급에 비하면 적지만, 공부를 지속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내 명의로 된 집을 사려면 이런 소규모 적금으로는 어림없다. 한 달에 적금 10만원이라봐야 1년이면 120만원, 10년이면 1,200만원... 그 사이에 목돈이 들어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아무튼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를 얻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적금을 들어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집이 아니라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자기 위로 정도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과 ‘빚투(빚내서 투자)’가 유행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허리띠를 아무리 졸라매도 월세살이를 면할 수 없다. 티끌을 모아도 태산이 되지는 않는다. 한동안 유행했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시들해진 걸 보면, 아무리 ‘노오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조적으로 외친 자기 위로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확행에서 투기로의 변화에는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나 똑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깔려있는 게 아닐까. 내가 적금을 부으며 느끼는 공허함과 투기에 집착하는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사실 다른 게 아닌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허하고도 불안한 ‘준비’에 끝이 있을까? 설령 티끌모아 태산을 이뤄 건물주가 되기라도 한다면, 혹은 투기로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불안감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시공간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진 철학자가 있다. 이름은 장자(莊子). 이미 그 시대에도 괴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식량을 빌려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당시에 학식이 대단하다는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강대국의 군주들이 부와 권력을 미끼로 그를 재상으로 스카웃하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장자는 “가난하지만 고달프지 않습니다”라며 단호히 제안을 거절한다. 그에게는 밥벌이를 지속해야 한다는 부담이 다른 삶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장자에게 자유와 만족은 부나 권력 같은 것으로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자는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내가 느낀 장자의 삶은 ‘가난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난과 무관하게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부와 권력이 필요하다고 믿을 때, 그는 부와 권력이 정말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반문했다. 그에게 삶을 자유롭게 만드는 실천은 무엇이었을까? 장자를 따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2.사유하지 않음의 무례함

장자의 이야기는 자유롭게 살아갈 특정한 조건에 대해 정의하는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움의 조건이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장자는 특히 ‘아웃사이더’들의 삶에 주목한다. 쓸모없이 버려진 나무부터 시작해서 꼽추, 발 잘린 절름발이, 언청이 같이 그로테스크한 신체를 지닌 불구자들,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괴짜들이 장자가 주목하는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버려진 자, 불행한 삶의 표본으로 낙인찍힌 마이너한 존재들로부터 자유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주목하는 ‘비정상인들’은 ‘정상인들’과 비교하면 제각기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선에서 결함으로 인식되는 것들이 자유로운 삶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가령, 〈인간세(人間世)〉편에 등장하는 지리소(支離疎)는 불구이기 때문에 전쟁이 터져도 징집되지 않고, 불구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여러 지원을 받는다. 여기서 장자는 단순히 불구자의 삶이 더 낫다거나 상황에 따라서 불구자의 삶도 나을 수 있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낙인찍었던 존재들의 삶은 실제로 우리가 판단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일반적인 판단 척도로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의 삶도 그렇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소유와 무관하다. 모든 삶은 그 자체로 독특하고, 그 점에서 자유를 실천하는 문제는 동일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삶을 불안하게 느낄 때면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떠오르고, 매달 따박따박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부자유할 거라고 믿는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뭐라고 특정할 만한 원인이 따로 있지 않다. 이러한 관념의 연쇄는 지금 여기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을 보여줄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원하는 대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자유라 믿는 부적합한 관념이야말로 자유롭지 않은 삶의 원인이다.


장자에 따르면, 존재의 긍정이나 삶의 자유는 특정한 조건의 충족에 달려 있지 않다.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판단 척도로 측정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존재자의 세계다. 불구로 규정된 신체가 정상이라 규정된 신체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형벌을 받아서 발이 잘린 죄인이 형벌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도덕적인 사람보다 존재적으로 열등하다고 할 근거도 없다. 어떠한 형태를 갖고 태어나든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아가든, 모든 삶은 도(道)라는 우주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어떤 삶만이 우월하다고 특정할 수 없다. 장자는 우리가 일반적인 판단 척도 속에서 놓친 것들에 주목한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되새길 수 있다. 세상을 포착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선에는,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우주의 원리를 본성으로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만의 자유를 구성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함축돼있다.


일반적인 판단 척도를 의심하지 못하는 인식의 무능력은 삶을 시시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겪어야 할 문제는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지리멸렬한 연애, 온갖 정념이 난립하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살아가는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까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수두룩하고, 이러한 문제들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라는 척도가 아니라 척도에서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인 것이다.


모든 존재가 지닌 운명이 다르듯 각자의 조건 속에서 구성해야 할 자유 또한 다르다. 모든 문제를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한 무례다. 삶에 대한 무례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 우리의 공허함과 불안감은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하려 하지 않은 채 조건을 탓하는 이러한 무례로부터 기인하는 게 아닐까?




3.자신의 존재를 변주(化)하기

장자의 철학을 따라가다 보니, 자유를 꿈꿀 때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알겠다. 필요한 것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삶을 일반적인 판단 척도로 환원하지 않는 풍부한 상상력이다. 장자의 사유가 집약된 〈소요유(逍遙遊)〉를 보자. 사실 장자는 자유에 대해 말한 바 없다. 그러나 <장자>에 나오는 모든 이미지와 에피소드가 사실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유로운 삶은 오직 끊임없는 존재의 변주(化)에 달려있음을 알게 된다.


〈소요유〉에서 장자는 두 가지 시선을 제시한다. 하나는 곤(鯤)에서 붕(鵬)으로 화(化)하여 저 멀리 아득한 곳까지 날아가는 붕의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매번 똑같은 나무에서 똑같은 높이에 오르려고 애쓰는 매미와 작은 비둘기의 시선이다. 곤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바꾸기 위해 ‘붕으로의 화’라는 존재적 도약을 감행한다. 이 도약에는 그침이 없다. 붕은 “바다의 수면을 3천 리나 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리하여 북쪽 바다 상공을 떠나서 6개월을 계속 날아간 뒤에 비로소 한 번 크게 숨을 내쉰다.” 붕은 자신이 살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는 도약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것은 장자가 어떤 일반적인 판단 척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무수한 마이너한 존재들에 주목한 것과 같은 종류의 노력이다.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이러한 붕의 노력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르되, 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붕은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판단 척도를 의심하지 못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이들의 시선에서 붕의 노력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머무르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 힘이 드는가? 여길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것은 안정이 검증된 삶을 내팽개치는 무모한 일이다.


장자는 두 종류의 시선 중 무엇이 더 나은지 얘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말하는 것처럼 눈앞에 놓인 안정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를 감수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끝내 자유롭지 않다. 이것이 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매미와 작은 비둘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믿는 가치를 의심하지 못한다. 즉, 느릅나무나 다목나무를 뒤로 한 채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갈 시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장자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은 전부라 생각되는 그것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느릅나무와 다목나무는 당장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반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삶을 시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족쇄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삶의 문제를 돈과 연결하는 나와 또래 청년들 또한 이러한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 아닐까?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다 보면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풍족한 삶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동댕이쳐지든 풍족해지든, 불만족과 결여와 불안이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이러한 삶이 부자유한 게 아니라 이런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부자유한 것이 아닐까. 내가 놓인 세계를 기꺼이 바꾸고자 하는 인식의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결코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없다. 존재의 변주를 시도하지 않으면, 매순간의 실존도 감당할 수 없다.



4.자유의 실험으로서의 공부

2021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28살이 되었다. 내가 상상한 28살은 어느 정도 완숙한 나이다. 성숙함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만 할 것 같고, 한참 어린 10대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직 나는 너무나도 미숙하고, 다종다양한 실수를 저지른다. 10대와 20대를 지나는 동안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과감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28살이 된 나와 20살의 나를 비교한다고 했을 때, 경험의 양적 차이는 있겠지만 사건을 겪는 질적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경험은 성숙함을 빚는 재료가 될지언정 그 자체로 성숙함을 형성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 고민을 10년 뒤에 고스란히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쓴맛을 보기 전까지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좇는 나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특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돈으로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삶이 대동소이하듯이, 자신의 판단 척도를 의심하지 않는 삶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미숙함은 바로 이러한 판단 척도를 의심하지 못하는 게으른 인식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장자>를 따라가면서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성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싶다.


다른 한편, 장자를 따라가며 풀고 싶은 세대적인 문제도 있다. 한국 청년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 말하지만, 자신의 나라를 ‘헬’이라 평가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세계가 물질적으로 빈곤하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생각해 보면, 살기 어렵지 않은 시대가 있기는 했던가?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를 생각해보자. 철기문화의 도입으로 생산량이 급증하고 인구가 증가했지만, 사람들은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식량 생산량이 저조했던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줄어들고 물건은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난민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혐오는 더없이 심하며, 매일 무연고자 장례가 있을 만큼 고립되어있다. 여기서 다시 장자의 질문을 음미해보자. ‘왜 사람들은 살기 좋아지면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탐욕스럽게 대립하는 것일까?’ 단순히 풍요로운 조건만을 목표로 해서는 풍요로운 삶을 만끽할 수 없다. 풍요란 경제적 조건에 있는 게 아니라 존재를 사유하고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역량의 문제다.


모든 것에 대해 무기력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지금 청년들의 태도는 이미 몸에 강하게 밴 자본주의적 습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주의의 세례를 진하게 받은 나와 또래들은 모든 문제를 돈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이미 몸에 뱄다. 그러나 자유롭게 사는 일은 존재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존재를 변주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 몸에 밴 습관을 다른 습관으로 밀어내지 못하면, 공허함과 불안함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내가 처한 삶의 조건을 다양하게 문제화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겪어내는 만큼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莊子)》에는 내가 겪을 문제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수많은 실마리가 있다. 취향과 스타일 같은 일상적 문제로부터 생사(生死)라는 실존적 문제까지 나의 존재를 다양한 문제들로 관통하게 하고 싶다. 내게 《장자》를 읽고 쓴다는 것은 성숙함에 이르는 길이자, 자유로운 삶에 대한 실험이다.


전체 7

  • 2021-02-02 21:58
    고귀하고 드문 길 위에 서기로 한 자, 어찌 장애가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ㅎ 규창샘의 글을 읽으며 제 삶을 잠시 들여다 보았습니다. 저또한 다르지 않는 고민들을 해왔고 여전히 그것은 진행형이기도 하니까요. 다양한 방식으로 겪어내는 만큼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마지막 부분의 문장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

  • 2021-02-03 19:41
    읽기와 쓰기가 실험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 장자》를 읽고 쓴다는 것은 성숙함에 이르는 길이자, 자유로운 삶에 대한 실험"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덕분에 이제 삶의 실험을 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 2021-02-04 09:36
    문장이 단단해진 게 느껴지네요. 풀고 싶다는 세대적인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구체화될지 궁금합니다~

  • 2021-02-04 14:12
    아~~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의 변주!!

    이 늠름한 청년이 서른도 되기 전, 벌써 이 문장을 가슴에 담았다니!!

    규창의 용기있는 삶의 실험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 2021-02-05 21:25
    장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네요. ㅎㅎ 언제 그렇게 될지~~~끊임없이 읽고 쓴다면 성숙하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될까요? 글을 읽으며 잠시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글이 편하게 다가오네요~^^

  • 2021-02-06 09:39
    장자형님과의 찐한 만남~~ "가난하지만 고달프진 않다"는 저 문장을 봤을 때 갸우뚱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과 고달픔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쩌면 우리 범인들의 편협함이 아닐지... 그 편협함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선 존재의 변형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새겨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풍토에서든 그 이치만은 같은 것 같습니다! 변화하는 자 휩쓸리지 않으리니!

  • 2021-02-09 04:24
    "장자의 이야기는 자유롭게 살아갈 특정한 조건에 대해 정의하는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움의 조건이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계보학의 핵심을 뚫는 이 문장의 매력! 공부를 하고싶게 만들고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하네요.
    규창쌤을 따라 장자의 사유의 세계로 한발 나아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