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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이 번역]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기르기[4]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1-29 16:43
조회
116
5. 친족을 위한 공유

어떻게 타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애니미즘은, 우주의 일원으로의 우리 자신을 존재들의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한다. 우리의 행위는 다른 존재와 우리 자신을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가능하게 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계들이 구현되어 있는 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애니미즘적 관점에 따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비인간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친족이라고 보는 것이다. 친족으로서 그들은 우리를 돕고, 우리가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지만, 또한 자신들도 성장하고 잘 번성해나갈 수 있는 방식으로 대우받기를 요구한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은 두 가지 영역에서 전개된다. 상호의존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biosphere)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 경험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살아있음을 다시금 실감하고, 그것을 성공적인 관계에 대한 주요한 통찰로서 음미하게 해준다.

나는 이 새로운 두 가지 자세를 ‘생기 불어넣기(enlivement)’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류세를 위한 시학(詩學)’, 다시 말해 우주의 생산성을 지속하는 풍요로운 상호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이러한 생산성의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다양한 존재로 구성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개인의 행동은 세계를 만드는 일과 같을 정도로 중대하다. 따라서 물질적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공유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교환과 분배는 물자 부족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모두를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활동이다. 공유재는 자원이 아니라 일련의 관계다.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를 돌보고, 그 모두에 의해 지지되며, 결국에는 우주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 창조의 집단적 과정이다.

공유지/공유재에 관한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는 이렇게 말한다. “공유재는 유기적 전체성과 관계성으로 정의되는 삶의 영역이다. 그것은 분리를 그 특징으로 갖는 근대적 세계관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근대적 세계관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상호관계들에서 개인을, 우리 신체와 정신을 분리시킨다.” 이 분리를 가로질러 판데믹 시기인 바로 지금 공유적 실천들이 꽃피고 있다.

사람들은 팬데믹의 시작과 더불어 수많은 공유활동이 자연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노인들을 위해 장보는 일을 자원하는 이웃 네트워크부터, 생산품목을 변경하여 마스크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재단사들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다양하다. 볼리어가 주지하듯, 이러한 행동들을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이타적 활동으로 보아선 안 된다. 이는 오히려 공동체를 위한 배려를 보여주고, 그러한 배려야말로 인간 행동의 자발적인 원동력이 된다.

서구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현상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재앙적인 상황에 처하면, 홉스가 상상한 ‘자연상태’와 같이 무자비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자신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말한 것처럼, 어려운 시기에 증가되는 상호의존성은 당사자들에게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기쁨을 느끼게 한다.

서구적 시선에서 이는 믿기 힘든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반면 애니미즘적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인간이 비인간 친족들을 돌볼 때 느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정원의 식물들이나 가정의 반려동물들, 멸종위기 동물들을 돌볼 때 느끼는 감정들 말이다. 서구적 맥락에서 이러한 정서들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애니미즘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규범이 된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기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이는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환대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접근이 아니라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애니미즘적이다.

모든 존재와의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세상을 하나의 공유지로 규정하는 것, 이 공유관계를 나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살아있음으로, 나아가 우주의 진정한 특질로서 경험하는 것. 이 두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관여하는 물질대사 과정은 곧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겪는 정서적 경험이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만, 우리는 사물들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친족으로서의 타자와의 교류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있다.

자신과 마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은 이렇게 답했다. “이 바위가 나입니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속해있음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은 한 존재로서의 경험, 가족이나 어느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의 경험,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욕망의 경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는 살아있는 타자, 즉 나무 사람, 재규어 사람, 강 사람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활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상호의존적 관계가 필요로 하는 의식들의 실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딘가를 보호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우리는 먼저 상대에게 우리를 받아줄 것을, 접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해야 한다.

애니미즘은 종(種)들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규범이자 문화이다. 애니미즘은 우리에게 어떻게 ‘자연물(natural objects)’을 더 잘 다룰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생명을 주는 이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동안 시행되어온 지속가능성에 대한 실천들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식물학자이자 작가이며 아메리카 인디언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훌륭하게 설명한다.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들을 살아가게 하라. 그러면 지구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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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2 15:53
    오... 멋진 말로 마무리되는 군요. 마지막 인용문에서는 갑자기 이게 인(仁)가? 싶은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ㅋㅋ감정에 대한 대목에서는 스피노자와 시몽동의 정서도 떠올랐고요. 여러 가지가 떠오르는 번역문이었습니다! /확실히 개체를 관계로 보고, 관계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윤리가 매력적인 것 같아요. 가끔씩 저한테는 '보호'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문장들에서 '참여', '살아가게 하라'는 식의 다른 말이 쓰이더라고요. 그런 문장들을 볼 때마다 낯설어하니, 개별자적 사고가 얼마나 강하게 배어있는지 알게 됩니다. 동양의 사유를 확장할 다른 단서를 찾은 것 같네요. 이 글 덕분에 애니미즘적 사고를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