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곰이 가져온 것 : 근원을 더듬어가는 발자취"[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2-05 09:28
조회
234
새로 시작되는 '곰&나 사이'는 연구실의 삼십대 청년 혜원이가 올 한 해 신화학, 생태학,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관련 글들을 번역하고 씨앗문장으로 글을 써나가는 연재코너입니다. 제2, 제3의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만물의 상호연결성'을 저 무의식적 지평에서 다시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닐까요? 포스트 코로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코너가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곰이 가져온 것 : 근원을 더듬어가는 발자취 (2)



곰이 가르쳐준 것


하타나카 : 지금까지 대칭성의 체현자인 곰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9.11과 3.11 이야기로 돌아오죠. 지금 일본은 생태계가 변해 곰이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는데요, 이건 언제부터였을까요?

나카자와 : 옛날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타나카 : 그렇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역시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곰은 캐릭터화 되는 동시에 영적 동물이 아닌 위험한 동물(害獸)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나카자와 :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현상은 화분증(花盆症)* 유행과 관련됩니다. 식림(植林) 문제죠. 전후(戰後) 일본은 국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활엽수를 자르고 침엽수로 바꿔 심어서 그것을 목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삼목 아래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죠. 게다가 활엽수가 없어지자 도토리가 적어졌습니다. 최근 10년간 활엽수를 침엽수로 바꾼 폐해가 위험수위까지 이르렀습니다. 화분증이 국민병이 된 것도 이 10년 사이죠. 게다가 애초에 목재를 수출하거나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식림사업을 추진했는데, 일본정부는 어느 시점부터 목재 수입 자유화를 시행했습니다. 정말 너무하죠(웃음). 비슷한 이야기로, 세토우치(瀬戸内)에** 귤나무 재배를 원조하겠다는 말을 하고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오렌지 수입 자유화를 해버렸어요. 가미노세키(上関) 원자력 발전소 유치에 대해 반대하는 야마구치(山口)현 이와이섬(祝島)이 왜 그렇게까지 반대하는지 들어보면, 그때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말 같은 건 정말 신용할 수 없죠(웃음). 이와이섬의 한 아주머니는 “정부가 말하는 것에 전부 반대하면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국가는 침엽수에 관해서도 오렌지에 관해서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목재 수입 자유화 후, 국내에 기껏 심어놓은 삼목에 대한 어떤 조치도 없었습니다. 산 소유자에게 모든 역할을 떠넘겼죠. 간벌목(間伐木)한*** 목재는 팔리지 않고, 목재를 운반하는 인건비는 막대하니, 다른 수가 없죠. 그대로 방치된 숲은 점점 황폐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삼목은 보수력(保水力)이 약해서 그걸 심은 땅의 지반은 헐거워집니다. 수해가 발생하죠. 예전에 시마네와 야마구치에서 격심재해****로 지정됐던 대홍수가 있었는데, 큰 요인은 역시 식림 문제입니다.

 *꽃가루 알레르기라고도 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봄철 알레르기 질환. 꽃가루, 특히 삼나무 꽃가루에 의한 재채기, 콧물, 두통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 역자
**세토우치(瀬戸内) : 가고시마 현에 위치한 해안 연안 지방. - 역자

***나무를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솎아서 벌목한 나무 - 역자
****격심재해법에 따른 극심한 재해, 태풍·호우·지진 등에 의한 극심한 재해. 격심재해법은 그에 대응하기 위해 재해의 등급을 나누고 대비 조치를 지정한 것. - 역자


하타나카 : 거기다 도토리나 호두도 없어지는, 무자비한 일이죠.


나카자와 : 식량이 부족한 곰은 마을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는데, 마을로 내려오면 냉장고가 있습니다. 냉장고를 열면 맛있는 것이 잔뜩 있죠. 그래서 마을로 내려오다가 살해되고 맙니다. 곰이 내려오지 않게 하려면 산의 도토리를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벌목한 목재를 운반해 나가야 합니다. 목재를 사용한 여러 제품을 일본인이 자발적으로 이용해야 하죠. 지금 건축자재 대부분은 수입목재입니다만, 적어도 젓가락이나 민예품, 가구 같은 것은 일본 목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삼목을 잘라내고 활엽수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의 10년은 걸릴 작업이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왜 일본 목재가 아니라 수입 목재를 사용할까요? 관세 문제가 있죠. 지금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가 상징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거기서 유발된 신자유주의적 경제 문제가 아랍세계와 그 밖의 나라들 사이에 격차를 만들고, 9.11 테러로 이어집니다.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것은 사실 이런 심각한 문제와 이어져 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인이 직감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했던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직감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바다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난폭한 모습을 보이고, 상냥하고 자비롭던 자연이 돌변하여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각 사건의 규모는 다르지만 본질은 이어져 있습니다. 인간세계로 온 곰을 사냥협회 사람을 시켜 쫓아내자고 말하는 것은, 17m의 제방을 세워 해일을 막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연의 힘이 인간세계에 개입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인은 동일본 지진을 통해 직감하는 동시에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하타나카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바다와 숲은 일본인에게 신앙의 대상이고, 평상시에는 풍요로운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하지만 때때로 곰(혹은 화분증도. 웃음)이나 해일이라는 모습으로 인간세계를 향해 이를 드러내니까요.
그래서 나카자와 씨는 이전부터 보다 확실히 ‘대칭성’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일본의 대전환』(集英社新書)을 간행하셨고, 니소노모리 심포지움을 진행하셨으며, 코다이라(小平)시 도시계획의 도로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 1974~) 씨와 함께 ‘도토리와 민주주의’라는 이벤트를 여는 등 결코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착실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계십니다.

나카자와 : 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물론 큰 문제입니다. 원자력 발전 문제는 숲 문제와 경제 문제, 생태계 문제까지 포함하며 현대가 안고 있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체성을 3.11 동일본 대지진을 통해 일본인은 체험했지요. 이 모든 문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결국 ‘자연’이 문제라는 겁니다. 일본이 자연을 향해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젊은이를 비롯해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생각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U턴하여 농부나 어부가 되거나, I턴하여 대량생산 대량소비적 생활을 재검토하며 여러 행동을 하는 것이죠. 그것을 ‘탈원전’이라는 한 가지 이슈로 집약하는 것은 정치적 전략입니다만, 확실한 건 3.11 당시 일본인이 직감했던 것은 무엇 하나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한 번 3.11때 직감했던 문제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죠.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니소노모리나 코다이라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오늘 우리가 오쿠타마(奥多摩)의 침엽수를 간벌해 활엽수를 심고 도토리를 늘리는 프로젝트를 말하기도 했지만, 탈원전까지 포함한 이야기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경’에서 ‘자연’으로

하타나카 : 고쿠분 씨와의 대담집 『철학의 자연(哲学の自然)』이라는 제목에도 ‘자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숲이나 바다 같은 자연을 가리키는 동시에 ‘자연주의’ 문학유파를 나타낼 때도 사용하는, 일본인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말입니다. 한편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환경’이라는 말이 학술적, 사상적, 그리고 비즈니스적인 말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자연’과 ‘환경’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나카자와 : ‘자연’이 탈모된 것이 ‘환경’이겠죠(웃음).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연’이라는 말에는 털이 있어서,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보화가 되지 않는 시적(詩的, poetic) 차원을 품고 있는 진정한 말이죠. 개념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타나카 : 생생한 감촉이 있네요.

나카자와 : 그에 비해 ‘환경’은 과학개념으로, ‘자연’이 갖고 있는 시적 차원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산업, 광고, 정책에 친화적이고 접속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그처럼 매끈매끈하고 얄팍한 것이 아닙니다. 3.11때 일본인이 본 것은 그야말로 ‘자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물다양성’ 같은 말로 이 엄청난 문제를 보려고 합니다. ‘생물다양성’은 ‘환경’처럼 방부처리된 ‘자연’으로, 이런 말을 쓰는 인간은 ‘자연’을 얕잡아보면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타나카 : 인간의 이해 범주에 두려고 하죠.

나카자와 : 이해한다는 것은 곧 지배한다는 것이니까요. 본래의 ‘자연’은 ‘환경’이나 ‘생물다양성’을 훨씬 초과합니다. 말하자면 ‘언어’가 ‘화폐’보다도 훨씬 큰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3.11 때 일본인이 ‘자연’을 직감했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중요성을 직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일본인은 모두 미야자와 겐지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겐지의 말은 환원불가능한 무엇인데, 그것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자연’을 직감한 이상, 이 체험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사상가, 시인, 문학가에게는 이 체험을 표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고쿠분 씨와의 대담을 ‘철학의 자연’이라 말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하타나카 : ‘자연’은 보다 더 복잡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사상에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철학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고,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다 세분화되어 있어서 원래 의미가 상실된 면도 있습니다. 가령 ‘자연주의 문학’ 같은 것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카자와 : 자연주의와 같은 시기에 등산문학(登山文學)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이게 심상치 않습니다. ‘등산’은 ‘자연’이라는 말을 평평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작금의 후지산(富士山) 등반 붐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인간들이 여기저기서 열을 지어 오르는 후지산은 조금도 자연이 아니죠(웃음). 후지산에 올라간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것뿐이고요. ‘자연’은 성취감을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무한의 주름이니까요.

하타나카 : ‘무한의 주름’이라는 것은 중요한 키워드네요. 산은 높이나 등반 횟수 같은 것으로 환원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숲은 입구도 출구도 중심마저도 없고, 무한히 그곳을 떠돌게 합니다. 파도 역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밀려오다가 물러나는 무한한 것이죠. 이것은 일본인이 본래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 슈겐도(修驗道)*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자연종교인데, 슈겐도에서는 애초에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구로산(羽黒山)은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니고요. 후카타 큐유야(深田久弥)나 타나베 쥬우지(田部重治)와 같이 산악문학을 확립시킨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시작은 일본 알프스**와 같이 높은 산을 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럽풍 등산을 지향했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인가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을 피하고 낮은 산에서 걷는 것을 관철합니다. 『산과 계곡』에 수록된 글을 읽으면 무척 감동적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는 즐거움은 정상의 조망을 즐기는 것이지만, 낮은 산에서 걷는 재미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변해가는 경치라고 말하거든요. 어디든 걸으면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기에 목표를 정하지 않고 걸어도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험하지 않고 완만한 오쿠치치부(奥秩父) 산지를 걷자고 권합니다. 이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듬거리다가 도달한 사상입니다. 등산을 스포츠나 모험에서 해방시키고 철학화한 사상이죠. 슈겐도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등산사상은 최종적으로 자연의 무한한 주름을 지향합니다.

*일본의 원시적인 산악신앙과 밀교가 혼합된 것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초인적인 수행을 쌓아 영적 힘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수행을 한 사람을 야마부시(山伏)라 하는데, 지금도 기이(紀伊)반도의 구마노(熊野)와 도호쿠 지방의 데와산잔에서 실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 역자
**일본 알프스는 주부 지방에 있는 히다 산맥, 기소 산맥, 아카이시 산맥의 별명이다. 메이지 시대에 영국인들이 알프스 산맥과 비슷하다고 해서 명명한 것이 처음이다. - 역자


하타나카 : 곰은 당연히 ‘자연’에 속하며 ‘환경’에서 살지 않지요. 따라서 「빙하쥐의 모피」에 나온 것처럼 인간에게 테러를 가할 만한 존재입니다.


나카자와 : 그렇습니다. 「빙하쥐의 모피」는 현대의 신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도 ‘자연’이라는 말을 무척 심오한 것으로 사용합니다. ‘신화’는 그 ‘자연’에서 용솟음친 것으로, ‘환경’에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습니다.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은 광고입니다. ‘에콜로지’는 희생물이죠(웃음).

하타나카 :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곰이 인간과 닮은 것은 큰 포인트겠군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곰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지 여부입니다. 원숭이나 개는 이해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미묘한 구석이 있죠. 그런데 큐슈쪽 민속학에서 곰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곰을 ‘반달!’하고 부르면 ‘아, 들켰네’ 라고 생각하며 숲으로 돌아간다는 민화가 있습니다.

나카자와 : 「나메코토산의 곰」의 모델이 된 사냥꾼들의 전승 같군요. 일단 개는 인간의 언어를 상당 부분 이해합니다. 의외로 쥐 역시 그렇습니다. 마타기*는 쥐를 무척 경계합니다. 쥐가 사냥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산의 신에게 일러바치기 때문이죠. 그럼 산의 신은 사냥감을 감춰 버립니다. 따라서 마타기는 ‘재즈’를 ‘즈-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독자적 은어, ‘마타기 은어’로 말합니다. 쥐나 개 같이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중간에 있는 동물은 모두 인간의 언어를 이해합니다. 뭐, 어쨌든 항상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문 앞에 있는 어린 사환과 같은 존재죠. 하지만 곰은 산속에서 살고 좀처럼 인간과 접촉하지 않는데도 인간의 언어를 이해합니다. 이러한 전승은 역시 신적 존재, 심연이면서 일상인 신비한 방식으로 인간과 접해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곰 특집을 한다면 캐릭터의 귀여움도 말할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인류 문명의 끝을 질문하는 것과 같은 심각한 문제의 상징으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일본 동북지방의 산간에 사는 사냥꾼들 - 역자
전체 6

  • 2021-02-05 10:11
    킬링포인트 정리

    이와이섬의 한 아주머니는 “정부가 말하는 것에 전부 반대하면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U턴하여 농부나 어부가 되거나, I턴하여 대량생산 대량소비적 생활을 재검토하며 여러 행동을 하는 것이죠.

    오쿠타마(奥多摩)의 침엽수를 간벌해 활엽수를 심고 도토리를 늘리는 프로젝트

    ‘자연’이라는 말에는 털이 있어서,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보화가 되지 않는 시적(詩的, poetic) 차원을 품고 있는 진정한 말이죠.

    ‘생물다양성’은 ‘환경’처럼 방부처리된 ‘자연’으로, 이런 말을 쓰는 인간은 ‘자연’을 얕잡아보면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성취감을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무한의 주름이니까요.

    나카자와, 이 분 시몽동과 들뢰즈를 읽었네. 읽었어. 지금까지 뭉게구름 처럼 떠다니는 제 머리 속의 시몽동씨가 잠깐 땅에 내려와 에콜로지와 자신의 사상을 엮어서 나카자와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 해주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진공 상태의 자연인 환경,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전개체적인 장으로서의 자연. 흥미로워.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환경변화가 어떻게 인간에 영향을 미치고, 동물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는 이렇게 한 번에 꿰어지다니 !

  • 2021-02-06 09:25
    9.11은 단지 여러 국가들의 이해 사이에서 일어난 자본주의의 경제학적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관계 맺는 데 실패한(?) 그런 사건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여러 철학에서 배웠지만, 실제로 자연의 리듬과 인간 사회의 정치는 다른 질서 속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사건들을 바라볼 때는 자연과 다른 범주 속에서 이해했는데, 이미 탈모된 자연이 작동하고 있었네요! 자연의 관점에서 우리가 겪는 일들을 다시 살필 때, 정말 많은 문제들을 새롭게 문제제기할 수 있겠네요. 키야~ 재밌네요.

  • 2021-02-06 09:42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보면 소나무 군락에는 햇빛이 잘 들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을 봤었습니다. 어떤 산은 침엽수만 자라서 각가지 낮은 식물군이 자라지 않더군요. 활엽수와 도토리가 사라지고 그 때문에 곰이 마을로 내려오다 죽게된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네요..^

  • 2021-02-06 09:59
    자연은 무한의 주름이고 털이 있는 시적 차원의 개념이다.
    그런 자연이 탈모되고, 시적 차원이 제거된, 방부처리된 자연을 우리는 환경이라 부른다.
    "‘생물다양성’은 ‘환경’처럼 방부처리된 ‘자연’으로, 이런 말을 쓰는 인간은 ‘자연’을 얕잡아보면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이라는 말이 학술적, 사상적, 그리고 비즈니스적인 말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유독 크게 들리는지라, 나카자와 선생님의 말들을 꼼꼼히 읽어보고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네요! 까막눈으로 <철학의 자연>을 읽을 땐 몰랐지만, 나카자와 선생님의 통찰력은 일품입니다. 곰님의 문제도 역시 대칭성의 차원에서 다뤄져야겠군요~~

  • 2021-02-07 17:28
    인간이 부여한 코드나 이미지를 넘어서는 자연의 커다란 실재성! 주옥같은 말씀이네요. 등산문학과 산악문학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흥미하네요~~

  • 2021-02-14 11:18
    그저 등산을 하며 산 꼭대기를 만끽했었는데...그저 등산을 하며 산길이 갈수록 파이네 하고만 생각했었는데...그저 침엽수림이 쭈욱 자란 모습만 멋찌다 생각했었는데...그저 그 밑에 서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만 생각했는데...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한 나의 행동에 사고에 물음을 갖게하는 곰님의 글입니다...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 볼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