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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만] 3화 "성형(成形)에서 성덕(成德)으로"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2-17 19:57
조회
317

성형(成形)에서 성덕(成德)으로



글 / 규창


1.군살 없는 몸에 대한 강박

연구실에서 공부하다 보면, 근육이 조금씩 빠지고 군살이 조금씩 붙는다. 각종 운동으로 활동량이 많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앉아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부가 조금씩 편해지고 엉덩이 힘이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내가 유지해왔던 날렵한 몸이 점차 푸근한 몸이 되는 것은 꽤나 충격적이다.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아랫배가 불룩해졌고, 얼굴은 동글동글해졌다. 오랜만에 집에 가면 살이 좀 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공부에 편해지려면 몸에 군살이 붙는 것은 감수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생긴다. ‘살쪘다’고 느끼면, 왜 조건반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몸을 관리하기 시작했던 것은 군대 훈련소에서 미식축구를 했던 친구를 만나서부터였다. 그 친구는 옷을 벗지 않아도 이미 덩치에서부터 운동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옷을 벗으면 느낌 이상의 실물을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 머리만 한 팔뚝과 나의 두 종아리를 합친 굵기의 허벅지를 보았다. 나는 수시로 그의 전문적인 지도를 받으며 매일 밤 그 친구의 운동에 동참했다. 훈련소 시기가 끝날 무렵 나의 몸은 어느 정도 근육질이 되었다. 운동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몸을 관찰하는 일은 꽤 즐거웠다. 나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보람차기도 했다. 이후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몸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이 몸 관리에 열성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계획을 세우면서까지 몸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해 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노력이 ‘관종’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모델이나 연예인, 보디빌더 같이 외형이 밥벌이 수단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누가 자기 몸을 공들여 관리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몸 관리’는 단순히 건강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키지 않는가? 몸 관리의 아이콘인 비는 영화 ‘닌자 어쌔씬’을 찍기 위해 체지방 0%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관리했다고 한다. 엄청난 강도의 운동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소금 한 알 첨가되지 않은 아몬드, 연어, 닭가슴살, 삶은 계란만을 먹었다고 하니, 어찌 보면 이 과정은 자기 극복의 과정이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비의 ‘조각 같은’ 몸은 그의 성실성의 징표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심 부정적이었지만, 기왕 몸 관리를 시작했으니 저런 몸 한 번은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자기 관리의 시대다. 잘 가꿔진 몸은 여타의 스펙 못지않은 능력으로 평가된다. ‘몸을 만든다’는 표현도 보다 구체화되어 이제는 ‘몸을 업그레이드한다’, ‘몸을 설계한다’ 등 좀 더 적극적으로 몸을 성형(成形)하는 표현들이 사용된다. 조금만 검색해도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 새로운 삶을 획득했음을 증언하는 영상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운동하기 전(before)’에 비해 ‘운동한 이후(after)’에 마치 더 나은 삶을 얻은 것처럼 얘기한다. “몸 관리는 우리의 삶을 업그레이드한다.”


그런데 아무리 몸을 관리하더라도 내 몸을 긍정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몸 관리의 원동력은 관리가 결여된 몸에서 비롯되는 열등감이다. 현재 나의 몸을 덜 관리된 몸으로 대상화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만큼 몸을 성실하게 관리해야겠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다리가 빈약하면 스쿼트나 런지 등의 하체 운동을, 뱃살과 허릿살이 붙으면 유산소 운동을 했다. 유튜브에 다양한 운동 영상이 올라왔으니 그것들을 참고하며 조금씩 나를 업그레이드해갔다. 하지만 이상하다. 현재 나의 몸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전혀 문제없다. 배가 나오고 있지만, 오히려 외부와 접속하는 능력은 이전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공부를 시작한 뒤로 계절마다 겪었던 감기도 없어졌다! 어쩌면 몸 관리는 애초에 내 몸을 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왜 계속 몸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2.성덕(成德) 없는 성형(成形)은 공허하다

장자는 ‘보기 좋은’ 외형을 획득해야 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기형으로 태어났거나 형벌을 당해 불구가 되었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들에 주목한다. 여기서 그가 그리는 ‘불구’는 운동이나 의학으로 극복 가능한 결함이 아니다. 발뒤꿈치가 잘리고 입술이 잘렸으며 콰지모도처럼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불쾌한 기형의 신체처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몸이다. 그런데도 장자는 이들을 어떤 결여도 없는 존재로 그린다.


“인기지리무순(闉跂支離無脤)이 위령공(衛靈公)에게 유세하자 영공이 기뻐하였다. 그 이후로 온전한 사람들을 보면 목이 가늘고 길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옹앙대영(甕㼜對癭)이 제환공(齊桓公)에게 유세하자 환공이 기뻐하였다. 그 이후로 온전한 사람을 보면 목이 가늘고 길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덕(德)이 뛰어나면 외형(形) 따위는 잊어버린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일러 정말 잊어버렸다고 한다.”(闉跂支離無脤說衛靈公, 靈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甕盎大癭說齊桓公, 桓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장자가 말하는 잊어버려야 할 것은 외형(形)이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덕(德)이다. 장자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앎이 없듯이 객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는 외형도 없다. 위령공과 제환공이 불구자들에게 감화된 이후 보통 사람들의 외형을 밋밋하게 느꼈듯이, 외형에 대한 인상은 덕(德)에 의해 언제든 전복될 수 있다.


덕은 자신의 독특한 신체를 긍정하는 역량이며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매력이다. 사회의 판단체계를 진리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덕을 잊고 외형에 집착하기 십상이다. 무순(無脤), 즉 입술이 없는 ‘언청이’는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장애가 있는 존재다. 장자가 살던 시대에서 유세는 정치로 나아가는 핵심적 관문이다. 한비자가 따로 〈세난(說難)〉이란 글을 쓸 만큼 고도의 소통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 유세다. 그런데 ‘언청이’가 당대 최고의 제후에게 성공적으로 유세를 했다. 외형은 소통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사지가 멀쩡해도 소통하는 데 있어서 애를 먹을 수 있다. 반면에 인기지리무순처럼 신체 일부가 손상되어도 소통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德)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아름다움(美)이 아니라 통(通)이고, 외형(形)이 아니라 덕(德)이다. 오히려 특정한 외형에 집착하면 할수록 불통(不通)이 된다. 몸무게, 신체적 둘레 같은 측정 가능한 수치로 신체를 규정하면 할수록 예쁜 몸에 집착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살쪄 보인다 싶으면 몸을 돌이키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게 되는 불안감은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이 ‘열심히’는 신체가 보내는 온갖 신호들을 무시해야만 실천할 수 있는 성실한 태도다. 왜냐하면 당장 내 신체는 관리가 필요한 상태니까!


하지만 몸을 이미지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신체를 지각하는 감수성의 불구를 의미한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새벽에 깨어나고 밤에 잠든다. 몸에 필요한 것은 근육을 키우는 단백질이나 스테미너를 증진하는 음식이 아니라 때에 맞는 생활이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는 때다. 이를 무시하고 운동하면 몸은 불통이 되고, 불통한 몸은 두통을 비롯한 여러 증상을 동반한다. 신체를 사회적 척도에 맞춰 성형하지 않으면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불구자였던 셈이다.


장자에 따르면, “나는 천지(天地) 사이에 형체를 의탁하고, 음양(陰陽)에게 기(氣)를 받은 존재다.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다.(〈추수(秋水)〉)” 우리 모두는 천지의 부단한 운동 속에서 고유한 기질과 리듬을 부여받았다.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나고, 마리오는 버섯을 먹으면 덩치가 커지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뽀빠이나 마리오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지각색의 존재를 일률적으로 판단할 척도와 법칙은 없다. 천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모든 것은 큰 산에서 성장하고 풍화하는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와 같다. 따라서 천지의 운동과 무관하게 무작정 외형만 업그레이드한다고 ‘통하는 신체’가 되는 건 아니다.


스피노자는 “실로 아직까지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관계 속에서 다른 삶을 시도할 역량이 언제든 잠재돼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몸의 건강함은 근육량이나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과 접속하더라도 탈이 나지 않는 소화력에 비례한다. 건강한 몸은 다양한 것들에 접속하고 변이하는 시도 속에서 구성된다.


장자가 바라보는 고유한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몸은 음양이 갈마드는 천지의 부단한 운동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된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기가 원활하게 순환한다는 뜻이고, 병들었다는 것은 기가 막혔다는 뜻이다. 《도덕경(道德經)》에서 이상적인 신체가 갓난아기 같이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몸으로 그려진 것도 기가 원활하게 순환하는 몸에 대한 비유다. 그런데 각종 욕망에 중독됨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이미지만 추구할수록 몸은 딱딱해진다. 즉, 외형에 집착할수록 기가 막히고, 기 막힌 몸은 “분쟁을 일으켜 날마다 마음 속에서 싸운다.(〈제물론〉)” 도가에서 각종 호흡법과 섭생을 통한 수련을 중시한 것은 사회적 욕망에 휩쓸려서 기가 막히고 타자와 반목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다른 식의 먹기와 말하기, 잠자기 등 일상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수련했던 것은 천지와 소통하기 위해서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역량은 이러한 수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고유한 삶의 스타일은 그들의 남다른 마음의 역량을 증언한다. 고유한 삶의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과 자신의 신체를 부단히 수련하며 변이하는 과정, 마음을 단단하게 단련하는 과정은 분리되지 않는다.




3.기(氣)가 통하는 몸을 위하여

꾸준히 몸을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는 조각 같은 몸은 사실 ‘기가 막힌’ 몸이다. 몸 관리는 조각 같은 이미지를 목표로 몸을 관리할 뿐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변이하는 시도가 결여돼있다. 근육의 딱딱함은 자폐적인 신체성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헬스장을 운영하던 어느 트레이너가 코로나로 실직한 이후에 먹방 유튜버로 전환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의 꾸준한 몸 관리는 근육을 형성하는 데 이르게 해줬을지 몰라도 고유한 삶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했다. 음식의 자극적인 맛에 탐닉하는 것과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몸을 만드는 것은 동일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에 보편적 삶과 구별되는 고유한 삶의 스타일 같은 것은 없다. 꾸준한 몸 관리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잠재된 변이 능력을 불구화하는 데 성실한 것일 뿐이다.


작년에 오금희(五禽戱)라는 기체조를 배웠다. 오금희는 고대 중국의 명의 화타가 호랑이, 곰, 원숭이, 사슴, 학의 자세를 관찰하여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금희는 아무리 반복해도 근육이 생기지는 않는다. 대신 기존의 경직된 몸에서 벗어나 습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호흡하고 움직이도록 만든다. 오금희는 기본적으로 매우 느리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몸을 숙였다가 세우는 동작을 느리게 하려면 호흡을 매우 길고 천천히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몸을 쓰는 방식, 호흡의 리듬을 관찰하고, 집중해야 한다.


반복하면 할수록 동작이 익숙해져서 큰 무게에 ‘도전’하게 만드는 피트니스와 달리, 오금희는 반복하면 할수록 동작들이 어려워졌다. 처음에 오금희를 할 때는 동작을 익히는 데 바빴다. 하지만 반복하다 보니,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동작과 동작을 연결하고 어떤 동작에서 어떤 부위에 힘이 들어가고 빠지는지 신경 쓰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꽤나 불균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불균형한 몸은 동작과 동작을 연결하는 일정한 리듬을 해친다.


장자적인 맥락에서 몸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살림의 현장이다. 장자에게 몸을 살리는 과정과 나를 살아가게 하는 네트워크에 활발하게 접속하는 과정은 분리되지 않는다. ‘나’를 불구화하지 않는 자유의 실험은 이 우주자연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네트워킹하며 사회적 척도에 갇히지 않는 실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장자가 양주와 다른 길을 걸어간 이유를 알 수 있다. 양주는 위아주의(爲我主意), “털 하나를 뽑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를 주장한 사상가다. 물론 이는 단순히 자기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는 자기 몸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몸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양주에게 몸이란 개별적인 ‘나 하나’에 불과하다. 반면에 장자에게 ‘나’ 혹은 ‘몸’이란 나를 살게 하는 네트워크, 즉 자연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나의 몸과 타자의 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란 네트워크 속에서 만물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장자에게 ‘몸을 관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리는 기본적으로 몸을 개별적 대상으로 상정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며 덕을 형성할 수 있을까? ‘예쁜’ 몸이 아니라 나만의 건강한 몸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이게 내게 남은 과제다.


전체 5

  • 2021-02-18 00:26
    외형적 예쁜 몸이 아닌 만물의 네트워크와 소통하는 몸이라니요. 침이 꼴깍.. 그런 몸이 느끼는 감각의 세계란 어마무시하겠네요. 규창샘의 남은 과제에 대한 고민이 담길, 다음 썰에서 그런 몸을 만들 수 있는 팁이 소개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 2021-02-19 06:47
    자본주의에 물든 저로서는 장자적인 맥락을 따라가기가 어렵네요~ 현재로는 '장자'를 만났다는데 의미를 두겠습니다. 언젠가는 '장자'를 씹고 뜯고 맛볼 수 있겠지요?

  • 2021-02-19 22:54
    조각같은 몸은 기가 막힌 몸이라니! 기막힌(^^)문장이네요. 기막힌 몸은 소통을 멈춘 몸, 부러워할 게 아닌데 ᆢ규창쌤의 기막힌 문장은 쏙 들어와 박힙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1-02-21 16:58
    뜬금없지만 (사실은 최근에 읽고 있는 거라서) 일리치가 생각나네요. 자신의 몸을 특정한 영양소나 열량과 같은 요구사항들을 지닌 '시스템'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실명사로 쓰이는 '생명'(life)이라는 말이 자기 자신과 타인,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시선을 내포한 타락한 표현임을 지적했던. 몸을 하나의 개별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만물의 상호의존적 네트워크의 일부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 몸을 관계성 속에서 보지 못하면 피상적인 건강과 외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 밖에는 답이 없는 것 같네요.

  • 2021-02-26 06:38
    조각 같은 몸매를 만든다고 얼굴들은 할아버지가 되어 텔레비젼에 나오는 스타들이 생각나네요. 요즘 친구아들도 딸도 그런다고하니, 쏟아지는 미디어속에서 내 삶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건강도 지키며 성덕으로 가고 있는 규창샘 멋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