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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6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6-29 19:13
조회
195
이번 주에는 말년의 푸코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라는 책을 언급하시며 강의를 시작하셨는데요, 거기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여러 작가들의 말년의 작품들을 분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화롭고 평온한 작품들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들과 모순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파국’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이라고 하죠. 사이드는 몇몇 작가의 말년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파국’이 오만을 버리고 오류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숙한 예술가의 지표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채운샘에 따르면 푸코의 말년 저작에서도 이러한 파국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규율권력과 생명권력, 그리고 통치성 개념을 거쳐 온 푸코는 말년에 이르러서 ‘우정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시대 이래 수세기 동안 우정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관계의 양식”이었으나, 16~17세기 사이에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 18세기부터는 동성애가 문제로 떠올랐는데,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두 과정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정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중요한 일일 때에는 아무도 남자들 사이의 사랑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푸코는 성이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진 사적인 것이 되고 동시에 통치의 대상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과, 사회적 관계의 양식으로서의 우정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동시적인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정의 소멸은 우리가 권위에 기대지 않은 각자의 성의 윤리와 관계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데 무능력해져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예속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요? 아마도 푸코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정의 문제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권력을 분석하던 푸코는 말년에 이르러 일상의 영역으로 후퇴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채운샘이 푸코의 말년에서 파국을 느낄 수 있다고 말씀하시진 않았겠죠. 지난 시간 채운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푸코는 항상 혁명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란 혁명의 경험을 통해 푸코는 ‘정치적 영성’이라는 가능성을 목도했고, 이에 따라 그의 관심은 달라졌습니다(대상화하는 권력 → 주체화하는 권력). 말년의 푸코는 이러한 이전의 문제의식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법과 제도 바깥의 혁명을 고민했던 것입니다. 푸코가 보기에 시민사회는 국가와 동시에, 그 바운더리 안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어쩌면 권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새롭게 주체화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화를 위해서는 생활양식의 창조가 필요합니다. 푸코는 “어떻게 나의 삶을 심미적 에술작품의 재료로 삼아 나의 실존과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니체가 삶의 무의미를 유희했던 그리스인들에 대해 ‘실존의 미학적 정당화’라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푸코가 말하는 실존의 미학화는, 주어진 의미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실존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이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예술작품에는 모델도 법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가에게는 고도의 훈련이 요구되고 스스로를 답습하지 않기 위한 자기 자신과의 능동적 관계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푸코는 그리스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를 어떤 대안으로 삼고자 하지도 않았고, 황금시대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채운샘은 푸코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문제화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푸코는 그리스인들의 새로움을 세계사적 영웅성에서 찾지 않고, 그들이 실천적 훈련을 통해 ‘외부’를 구부리는 방식에서”(채운샘 강의안) 찾았습니다. 그리스 사회에서 윤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종교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였습니다. 그리스 사회에서의 성적 엄격성은 법이나 종교적 죄악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역량과 능동성의 문제였습니다. 어떤 이의 성적인 과도함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의 죄를 꾸짖거나 법에 근거하여 잘못을 논하는 대신 그의 무능력을 비웃었다는 것이죠. 그리스 사회에서 성폭행범은 가장 타락한 자가 아니라 가장 나약한 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리스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적 통치이며 모든 자유인 남성은 정치에 관계하게 되기 때문에 성적인 문제는 주체의 비밀스러운 욕망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기통치 여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윤리는 무언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속에서 능동적으로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푸코는 어떤 해답이 아니라, ‘다르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통치성 개념을 다루며 푸코가 사유한 것처럼, 코드는 항상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들을 동반합니다. 또한 그리스 사회가 보여주는 것은, 윤리가 생겨나는 지점은 코드에 수동적으로 복종할 때가 아니라, 코드를 구부려낼 때라는 점입니다.

푸코는 ‘쾌락의 활용’을 고민합니다. 실존을 미학화하고 코드를 구부려내는 것,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쾌락의 다른 활용을 발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속되는 것은 쾌락으로부터 차단되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만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쾌락을 조종하죠. 채운샘은 ‘과로자살’을 예로 드셨습니다. 단순한 ‘과로사’가 아니라, 승진과 더 많은 돈에 대한 욕망에 의한 자발적인 과로에 의한 죽음을 과로자살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다른 쾌락의 활용을 발명하지 못할 때, 우리의 쾌락은 일정정도 자살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쾌락의 용법을 발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는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구성해나갈 것이 요청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새로운 쾌락의 활용에는 항상 주체의 변이가 수반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스스로의 욕망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 이상으로 신체를 가꾸고 양생에 힘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양생의 노력도 자신의 윤리를 스스로 담론화하고 자기만의 에토스(행동거지)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채운샘은 푸코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발견한 ‘자기배려’가 동시에 ‘자기지배’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자기배려는 주체의 변이로서의 고행이 함축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나아가 푸코는 새로운 윤리적 공동체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주체의 변이에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자명할 것입니다. 다만 이때의 타자는 제도적 관계 안에서 만나는 타인들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주침들은 어떠한 새로운 것도 구성해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쾌락의 용법을 발명하는 문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제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방식의 관계들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따라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의 자기배려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고, 반대로 새로운 마주침들 없이는 누구도 주체의 변이를 통한 자기배려를 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함께 생활하고, 자신들의 시간, 식사, 방, 여가, 슬픔, 믿음 등을 서로 나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가족, 직업, 강제된 우정 등의 제도적 관계를 떠나서 ‘벌거벗은 채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인터뷰, <생활방식으로서의 우정에 관하여>. 1981, 채운샘 강의안 재인용)

어떤 공동체를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을 묶고 있는 목표나 이념이 아니라, 그들이 벌거벗은 채로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요? 푸코가 상상한 새로운 윤리적 공동체는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벌거벗은 채로 함께 있음으로써 새로운 것들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공동체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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