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주역과 노자 45장 ~ 53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6-30 17:00
조회
291
날이 후덥지근하니 기운이 쭉쭉 빠지네요. 불현듯 노자의 하상공주가 생각났습니다. 왕필은 노자를 정치적으로 풀고 있는데, 기의 관점에서 노자는 어떻게 읽힐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하상공주를 보다보면 더위와 추위를 수련의 과정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하상공주도 언젠가 강의해주시지 않을까 스리슬쩍 기대를 해봅니다.

 

45.

大成若缺, 其用不弊 ;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어딘가 찌그러진 듯하니, 그 쓰임이 고갈되지 않고, 완벽하게 채워진 것은 어딘가 비어있는 듯하니, 그 쓰임이 다하지 않는다.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것 같고, 큰 솜씨는 졸렬한 것 같고, 크게 말 잘하는 것은 어눌한 것 같다. 빨리 움직이는 것이 추위를 이기고, 차분히 있는 것이 더위를 이기니, 맑음()과 고요함()이 천하의 정()이다. (맑음()과 고요함()으로써 천하를 바로 잡는다.)

 

45장은 도(道)가 끊임없이 생생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대성(大成)은 41장의 대기만성(大器晩成)과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결(缺)은 그릇의 일부가 찌그러진 모양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폐(弊)와 궁(窮)은 ‘다하다’, ‘고갈되다’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물을 따라 이루어지고, 하나의 상으로 모이지 않으니 어딘가 비어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쌤은 도(道)의 쓰임이 완전(大)할 수 있는 것은 결(缺)과 충(沖)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직(直)과 굴(屈), 교(巧)와 졸(拙)은 동양미학이 어떤지를 엿볼 수 있는 글자입니다. 우쌤은 자연은 원래 울퉁불퉁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완벽한 대칭이야말로 인공적인 것이고, 동양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단(異端)이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에서 예술작품에 대해 칭찬할 때 ‘고졸(古拙)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서툰 것 같고, 소박한 것 같고, 어딘가 틈이 있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고졸하다’라고 평가한다고 합니다. 저는 예술에 대해서는 까막눈이고 본 적도 없지만, 어딘가 찌그러진 듯한 모양이 있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완벽해진다는 것 같습니다.

눌(訥)은 『논어』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말을 신중하게 하는 사람에게 눌(訥)이란 글자를 쓴다고 합니다.

조승한, 정승열(躁勝寒, 靜勝熱)을 정승조, 조승열(靜勝躁, 寒勝熱)로 바꿔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건 음(陰), 고요함이 먼저고 그로부터 양(陽),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주역적 사고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쌤도 예전에 이렇게 생각하셨지만 요즘에는 그냥 ‘조승한, 정승열’ 그대로 봐도 괜찮겠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청정위천하정(淸靜爲天下正)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왕필은 ‘청정(淸靜)이 천하의 정이다.’라고 해석했고, 다른 판본에서는 ‘청정(淸靜)함으로써 천하를 바로잡는다.’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왕필의 정(正)은 장자와도 통할 여지가 있습니다. 장자를 보면 정색(正色)같은 것이 있어서 정(正)을 본연의 무엇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장자가 본연의 무엇을 인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중에 장자 강의하실 때 들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46.

天下有道, 卻走馬以糞 ;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矣.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전쟁에 나간 말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전투용 말이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 만족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큰 재앙이 없고, 명예와 돈을 얻으려 욕심내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없다. 그러므로 충만감의 족함을 알아, 항상 만족한다.

 

각(卻)은 ‘물러나다’, ‘그치다’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각각’이란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분(糞)은 ‘거름을 주다’라는 의미로, 전쟁이 그친 뒤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짓는 것을 뜻합니다.

융(戎)은 오랑캐를 뜻하기도 하지만, ‘크다’ 혹은 ‘전쟁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우쌤은 융복(戎服)이라는 전투복이 있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교(郊)는 국경, 교외로 전쟁이 일어나는 들판을 뜻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한계를 알아 만족을 아니, 바깥의 명예나 돈을 구하지 않고, 각각 자기 내면을 닦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이에 대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지족지지(知足知止)하게 되면 전쟁이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족지족(知足之足)에서 지족(之足)은 충만감을 뜻합니다.

 

47.

不出戶, 知天下 ; 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들창으로 엿보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안다. 나가는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그 앎이 점점 줄어든다. 따라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이치를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을 알며, 하지 않아도 이룬다.

 

주석을 참고하면, ‘사물에는 핵심이 있고 물에는 주관하는 것이 있으니, 비록 가는 길이 다르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하는 것이 비록 100가지라 해도 하나에 이른다.(…) 옛 도(道)를 잡아 지금을 다스린다.’고 했는데, 이것은 결국 14장의 도기(道紀)와 연결됩니다. 14장에서 인간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도(道)와 감각기관에 의지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성인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규(闚)는 ‘엿보다’라는 뜻입니다.

유(牖)는 밖으로 여는 문으로 들창문입니다.

미(彌)는 ‘점점’이란 뜻입니다. 기출미원, 기지미소(其出彌遠, 其知彌少)에 대한 주석으로 ‘나갈수록 멀어지고 미혹된다.’라고 했습니다.

주석에서는 성인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일을 이룰 수 있는 이유로 ‘그것을 따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이것을 ‘저절로 그렇게 해주다’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48.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배운다는 것은 날마다 보태는 것이고, ()를 따르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무위(無爲)에 이른다. 무위(無爲)하지만 되지 않음이 없다. 항상 이치를 따라 움직임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니, 일을 만들어내면, 천하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우쌤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을 수행의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위(無爲)는 수행의 과정 끝에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경지이고, 여기에 다다른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주어는 성인입니다.

취천하상이무사(取天下常以無事)는 29장과 연결됩니다. 29장을 참고하면, 취(取)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치(治), 위(爲)와 통용됩니다. 우쌤은 무사(無事)를 무위(無爲)로 바꿔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무사(無事)는 항상 인(因)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무사(無事), 무위(無爲)입니다. 47장과 연결하면 저절로 다 이루게 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쌤은 29장과 너무 연결돼서 혹시 48장은 29장의 주석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하셨습니다.

 

49.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歙歙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성인은 자기 고집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선한 사람을 나는 선하게 여기고, 불선한 사람도 또한 선하게 여기니, 선을 얻는다. 믿음직한 사람을 믿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 역시 믿으니, 믿음을 얻는다. 성인은 천하에 머물면서, 숨을 들이마시듯 자연스럽게 백성의 마음과 일치시켜서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백성은 모두 자신이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살고, 성인은 백성을 어린아이로 여겨 끌어안는다.

 

여태껏 상심(常心)은 무심(無心)과 비슷한 맥락에서 얘기됐는데, 여기서는 자기 고집, 백성에게도 자기 관념을 투영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성인이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 것을 두고 ‘항상 이치에 따라 움직인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48장의 취천하상이무사(取天下常以無事)의 주석이기도 합니다.

선한 사람과 믿음직한 사람 모두 도(道)에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성인이 선하지 않은 사람과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 모두 품고 가는 것이 중요한데, 우쌤은 27장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27장을 보면, “성인은 항상 사람을 구하지, 버리지 않고, 물을 구하지, 버리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성인은 천하만물 중에서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안고 갑니다. 습명(襲明), 명(明)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무엇도 배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무엇을 배제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도(道)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德)은 얻는다(得)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흡(歙)은 36장에도 나왔는데, 숨을 들이마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흡흡(歙歙)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숨을 들이마시듯 자연스럽게, 무엇도 배제하지 않은 채’란 뜻입니다.

혼(渾)은 차별 없이 다 스며드는 도(道)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우쌤은 ‘백성의 마음에 차별 없이 스며든다’를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일치시킨다’로 바꿀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注)는 물을 대는 것으로 ‘집중하다’라는 뜻입니다.

해(孩)는 ‘어린아이’라는 뜻인데, 주석을 참고하면, ‘모두 어린아이처럼 조화롭고 무욕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즉, 성인은 백성 하나하나를 모두 어린아이처럼 여겨서 그들을 안고 간다는 뜻입니다. 앞의 구절과 연결하면,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선하지 않은 사람과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 모두를 안고 감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50.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被甲兵,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나오면 살고, 들어가면 죽는다. 수명대로 사는 게 열에 셋이고,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게 열에 셋이다. 죽을 장소로 옮겨가는 사람 역시 열에 셋이다. 왜 그런가? 삶을 연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를 섭생을 잘 하는 사람은, 땅을 걸어도 외뿔소와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 가도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으니, 외뿔소가 그 뿔로 찌를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손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무기가 그 칼날로 벨 곳이 없다. 왜 그런가? 사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우쌤은 출생입사(出生入死)를 이 장의 표제어로 꼽으셨습니다. 그리고 『홍범』의 고종명(考終命), 하늘이 내려준 명대로 살아가다 마치는 것과도 통한다고 하셨습니다.

생지(生之)와 사지(死之)에는 각각 그 앞에 출어(出於)와 입어(入於)가 생략돼있다고 하셨습니다. 생지(生之)는 부여받은 수명만큼 사는 것이고, 입어(入於)는 부여받은 수명만큼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기생생지후(以其生生之厚)는 부여받은 명 이상으로 살고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以)는 인(因)의 의미고, 생생지후(生生之厚)에서 앞의 생(生)은 ‘연장하다’, ‘늘리다’(長)라는 의미입니다.

섭생(攝生)에서 섭(攝)은 ‘대신하다’, ‘아우르다’ 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기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우쌤은 섭생(攝生)과 양생(養生)은 생을 기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양생(養生)에는 인위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섭생(攝生)을 잘 하는 이는 가지고 태어난 생(生)을 연장하지 않기 때문에 사지(死地)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지(死地)가 없다는 것은 사지(死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쌤은 소의 뿔이나 호랑이의 손톱, 무기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들은 인간이 욕심을 낼 때 동반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섭생(攝生)을 잘 하는 이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위협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是以萬物莫不尊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故道生之, 德畜之 : 長之, 育之, 亭之, 毒之, 養之, 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가 만물을 낳고, ()이 그것을 기르고, 고유의 개체성이 그 형태를 이루고, 그 조건이 그것을 완성하다. 그러므로 만물 중에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다. ()를 높이고, ()을 귀하게 여기니, 시키지 않아도 항상 스스로 그렇게 한다. 따라서 도()가 그것을 태어나게 하고, ()이 그것을 기른다. : 자라고, 키우고, 안정시키고, 성숙하게 하며, 양육하고, 보호한다. 생겨나게 하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만들면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기르면서도 주관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덕(玄德)이라 한다.

 

畜은 ‘쌓다’로 읽으면 “축”이지만, ‘기르다’로 읽으면 “휵”입니다.

물(物)은 사물이 가진 고유한 개체성으로, 주석을 참고하면, 물(物)에 의해 각자의 형상이 정해집니다.

세(勢)는 사물이 놓여있는 시공간의 조건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도(道)가 낳고, 조건에 의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사물이 생겨나는 이유와 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두 도(道)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이치에 따르면 각각의 사물은 적합하게 된다’라고 합니다.

우쌤은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道之尊, 德之貴)이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막지명이상자연(夫莫之命而常自然)에서 명(命)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키다’라는 의미에서 사(使)와 통용됩니다.

정(亭)은 ‘편안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독(毒)은 ‘독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성숙하다’, ‘익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覆은 ‘뒤집히다’로 읽으면 “복”이지만, 여기서는 ‘보호하다’ ‘덮다’라는 의미에서 “부”로 읽었습니다.

우쌤은 長之, 育之, 亭之, 毒之, 養之, 覆之(장지, 육지, 정지, 독지, 양지, 부지)를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장지육지, 정지독지, 양지부지) 네 개씩 묶어서 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장(長), 정(亭), 양(養)과 육(育), 독(毒), 부(覆)는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은 10장에도 나왔습니다. 우쌤은 뒤로 갈수록 겹치는 내용이 많을 것이라 하셨는데, 아마 이것도 그 장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겹치는 것에 대해 누구는 잘못 섞인 것이라고 하면서 빼지만 우쌤은 그대로 읽어도 괜찮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현덕(玄德)에 대해서는 10장에서도 설명하셨지만, 미묘한 작용, 시간에 따른 변화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52.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 旣知其子, 復守其母 ;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천하에 시초가 있어서, 그것을 천하의 어머니로 삼는다. 이미 그 어머니를 얻었으면, 그 자식을 알고, 이미 그 자식을 얻었으면, 다시 그 어머니를 지키니,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는다. 욕망의 구멍을 막고, 욕망이 드나드는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고생하지 않는다. 욕망의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추구하면, 몸이 다할 때까지 구원받지 못한다. 작은 것을 아는 것이 명()이고, 약함을 지키는 것이 강()이다. 빛을 써서 다시 그 명()으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으니, 이를 일러 자연스럽게 사는 것(習常)이라고 한다.

 

51장과 연결해서 보면, 모(母)는 만물을 낳은 도(道)를 말합니다. 모(母)를 도(道)로 본다면, 우리는 도(道)에 의해 생겨난 그 자식들입니다. 우쌤은 여러 장과 연결해서 모(母)를 설명해주셨는데, 16장과 연결하면 부귀기근(復歸其根)의 근(根)이 모(母)입니다. 1장의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와도 연결이 됩니다.

기득기모, 이지기자, 기지기자, 부수기모(旣得其母, 以知其子 ; 旣知其子, 復守其母)에서 기득기모(旣得其母)는 51장으로 치면 도생지(道生之)를 아는 것이고, 이지기자(以知其子)는 물형지, 세성지(物形之, 勢成之)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수기모(復守其母)하면 몰신불태(沒身不殆)할 수 있는데, 우쌤은 이를 50장의 생지도십유삼(生之徒十有三)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견소와몰, 수유왈강(見小曰明, 守柔曰强)에서 작은 것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 규정할 수 없는 도(道)를 말하고, 유(柔)는 만물을 낳는 어머니를 말하는데, 이 또한 결국 도(道)입니다. 우쌤은 여기서 견(見)을 ‘보다’보다는 ‘알다’, ‘인식하다’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하셨습니다.

빛(光)에 대해서 고민하셨는데, “빛이 쓰임”에 대해서는 주석을 참고하셨습니다. 주석에서는 ‘드러난 도(道)로 백성의 미혹됨을 제거한다’고 했습니다.

명(明)은 노자 전반에 걸쳐서 여기저기 나오는데, 일단 16장에서 부여받은 명(命)을 회복하는 것(復命)을 항상됨(常)이라 했고, 항상된 도(道)의 흐름을 아는 것(知常)을 명(明)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3장에서 “자신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했습니다.(自知者明)” 우쌤은 여기서 자신을 아는 것을 존재의 근원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습상(習常)은 상(常)에 익숙해짐을 말하는데, 16장을 참고하면, 부여받은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 상(常)이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습상(習常)을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3.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大道甚夷, 而民好徑.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 是謂盜夸. 非道也哉!

 

만약 내가 약간의 아는 것이 있어, 대도(大道)를 행하게 되면, 오직 백성에게 베푸는 것만이 조심스럽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하지만, 백성들은 구불구불한 샛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매우 정돈되어 있지만, 밭은 심하게 황폐하고, 창고는 심하게 비어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차고, 먹고 마시기를 질릴 때까지 하며, 재화가 남는다면, 이를 일러 큰 도둑이라고 한다. ()가 아니다!

 

개연(介然)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介)를 ‘강인한’, ‘단단한’과 같은 의미로 봐서, “만일 나에게 확신할 만한 앎이 있다면”이고, 다른 하나는 ‘미미하다’, ‘약간의’로 봐서, “만일 나에게 약간의 앎이 있다면”으로 해석됩니다.

진고응을 비롯한 다른 판본들은 베풀 시(施)를 ‘왜곡되다’라는 뜻에서 이(迤)로 고쳤습니다.

이(夷)는 ‘평탄하다’, ‘널찍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조(朝)는 궁실(宮室)을 말하고, 제(除)는 깨끗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쌤은 이것을 신축건물로 표현하셨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좋은 것 하나를 만드느라 많은 백성의 삶이 황폐해진다고 했습니다.

복문채(服文綵)에서 문(文)은 ‘무늬’이고, 채(綵)는 ‘비단 옷’입니다. 무늬가 있는 옷이니까 아름다운 옷을 뜻합니다.

리검(利劍)은 ‘날카로운 검’을 뜻합니다.

염(厭)은 싫증이 나는 것으로, 여기서는 ‘먹고 마시기를 물릴 때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도과(盜夸)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큰 도둑’으로 보는 것이 있고, 과(夸)의 ‘자랑하다’라는 의미를 살려서 ‘자랑하는 도둑’으로 보는 것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앞에 있었던 장들이 ‘이런 의미인가?’ 싶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왜 뒤에 와서 떠오르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ㅋㅋ;; 그리고 우쌤의 강의를 듣다가도 정말 뜬금없이 떠올라서 스스로 어떤 연결성이 있는지 생각해봤는데, 강의와는 상관없더군요. 예전에 동사서독에서 노자를 할 때 왜 이런 생각을 못하고, 얘기하지 못했는지 아쉬워졌습니다. 나중에 하상공주까지 다 읽은 다음에 세미나를 기획해야겠다는 큰 결심을 다지고 있습니다.

후기를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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