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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동사서독 장자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7-04-12 10:54
조회
254
소요유와 제물론이 생을 넘어가는 차원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양생주는 생명의 문제를 다루었고, 이번에 본 인간세는 ‘인간의 생’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 안회와 공자가 등장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아무래도 장자가 유가에 대한 의식은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가장 논적이 될 만한 것이 유가라고 느꼈던 거겠죠. 장자 속 ‘가짜’ 공자가 ‘진짜’ 공자가 행했을 법한 윤리와 가치들을 뜯어말리고 있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어요. 유가에선 지식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백성들을 위해서나 다름없어요. 모든 것이 백성의 안위로부터 출발하는 유가에게 자기 한 몸을 보존하기 위해 세상을 외면한다는 장자적 발상은 비겁하고 무능력한 것일 수 있을 테고요. 백성을 교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자기의 이름을 더럽혀선 안 되는 유가에 비해 장자는 자신의 이름이나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됩니다. 여기서 유가와 장자의 다른 지점이 확실하게 보였어요.

인간의 지적욕망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요. 인간은 자기가 알 수 없는 영역–과거가 왜 그렇게 흘러왔고, 왜 이런 현재를 살아야 하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등-까지 알고 싶어 해요. 인간의 지적욕망은 자신의 유한한 존재를 넘쳐흐릅니다. 고작 인간 개체 하나에 불과할 뿐인 우리가 역사를 알고 싶어 하고, 생명의 일부에 불과한 주제에 생명 전체의 법칙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요. 알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을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지금만 살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삶을 더 확장시키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싶어 하죠. 인간은 현존의 생이 아니라, 그것을 미래까지 끌어가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가려는 것이고 장자에겐 그 자체로 위태로운 것입니다.

자연은 자신을 넘쳐흐르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죠. 어떤 의식적인 것도, 정당화도 없이 스스로 그러하고요(自然). 꽃과 열매는 그냥 그 자체로 피기도 열리지도 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것에 인간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서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세계의 무의미성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자연에 자신들의 인위적인 의식을 투영하고, 거기에 인과를 만듭니다. 어떤 행위와 작용마다 그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모든 행위함 자체가 연기조건(아직 저는 연기조건이라는 말이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만ㅠ) 속에서 그렇게 행위 할 수밖에 없는 것, 부득이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득이’는 내가 안 그럴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식의 정당화의 용법과는 다른 ‘부득이’예요. 행위함 자체가 부득이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자연이 다른 것을 할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하는 거라고 보긴 어렵죠. 자연의 법칙 속에서 모든 것은 부득이 한 것, 그 자체로 우연인 동시에 필연인 것이고요. 우연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 순간을 경험하는 개체만의 관점일 뿐, 그 개체와 관련된 모든 무수한 개체들 전체의 관계 속에서 그것은 그냥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후회 비슷한 것을 담은 인간의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과거의 그때엔 자신은 오로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겐 자연으로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포정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보았는데요. 니체가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구체적인 연마를 통해 도달한다고 말했다는데, 포정이야말로 그런 예술가의 경지를 보여주는 예였죠. 처음 눈으로 보이는 건 실체적인 세계, 소 그 자체였죠. 하지만 포정은 후에는 눈이 아닌 신(神)으로 소를 대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눈으로 대상을 인식함과 동시에 떠오르는 관념을 배제한 또 다른 어떤 인식능력일 것이에요. 온전한 소만을 본다는 것은 어떤 대상의 동일성만을 보는 것이라고 하면, 3년 후 포정이 다다른 경지는 동일자가 만들어내는 여러 차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것은 어떤 동일자도 무수한 차이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정치로 생각해 보면, 서투른 백정과 같은 왕은 국가라는 전체 덩어리만 볼 줄 알기 때문에 온갖 법의 두꺼운 칼날로 백성들의 뼈와 살을 치죠. 당연히 칼날도 상하고 뼈와 살도 상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칼을 새로 갈아야 해요. 제도를 바꾸기에 바쁘죠. 하지만 솜씨 좋은 백정과 같은 왕은 국가라는 소 전체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결을 볼 줄 압니다. 각 개체들의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어요. 개체들을, 뼈와 근육을 건드리지 않고, 그 사이를 지나가도록 하여서 개체의 온전한 삶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도록 합니다. 모든 사이와 틈을 볼 수 있는 것은 각 개체들을 동일한 것이 아닌 차이들로 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해요. 모든 차이들에 존재하는 틈과 접점, 사이들을 보고 신중히 칼을 사용해야 하죠. 이럴 때 백성들은 정치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정치를 노자에선 무위지치라고 했죠. 법이 개체의 삶을 억압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개체의 차이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이상적 정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를 분해하는 포정의 기술을 보면서 엄청 신기한 경지라고만 생각했고, 이것이 어떤 반복된 수련을 통한 것이냐, 기술이 반복되면 깨달음이 오는 것이냐, 이 경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과연 이런 경지가 있긴 한 거냐, 식의 토론 아닌 토론만을 무려 2주째 했던(새삼 글로 치려니 정말.. 수준이 떨어지네요...) 것이 민망해집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멋진 해석이 나올 수 있네요. 허허.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틈’인 것 같은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것 사이의 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변화와 차이의 영역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어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변이할 수 있는 능력이 관계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동일성이 아니라 그 사이와 사이, 서로 다른 차이들이 변화하는 국면마다 새롭게 적응하며(고정되길 거부하고) 관계를 지속시킬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요즘 듣는 거의 모든 수업에서 한결같이 느끼고 있는 것은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진실’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가치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기존의 것들이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새로운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기분이 계속 드는 저에겐, 장자의 신기하고 놀라운 발상들이 좋은 공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네요(기대를 하는 사이에 벌써 한 달이 훌쩍@@). 이제 얼마나 강도 높게 읽고 얼마나 끈질기게 사유하느냐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휘리릭 휘리릭 가벼운 소설 읽듯 그냥 스토리로 즐거움을 소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려면요.

기존가치에 대해서 회의만 하고 그것에 그치고 마는 허무주의는 결국엔 기존 가치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능력이기도 합니다. 회의를 하되, 회의가 힘이 되려면 그 회의를 얼마나 꼼꼼하게 하느냐의 문제, 그 회의를 자기 힘으로 되돌리는 문제가 떠오르게 돼요. 여기서 장자가 뱁새와 붕새의 이야기, 나무의 쓸모, 안회와 공자의 등장 등을 통해서 어떤 질문을 어느 지점에서 던지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장자가 회의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기존과 다른 어떤 새로운 영역들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얼핏 보면 또 왠지 아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어설프게 알 것 같은 느낌, 이런 것들이 장자에게서 예리한 문제의식을 꺼내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개념 하나하나를 꼭 붙들고 자세히 따져 물어야 할 것을 채운샘께서 당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계속 이런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공통과제를 읽으신 때문이겠죠! 벌써부터 에세이, 에세이 하고 계신데, 얼른 정신 차리고 집중해보도록 합시다!
전체 5

  • 2017-04-12 14:00
    정리는 윤몽의 힘! 정리를 잘 하는 것도 미덕이다. 그 미덕'만' 발휘하면 미덕이 미덕이 아니게 되지만.^^

    • 2017-04-12 20:14
      정리+생각+생각=굿굿?!

  • 2017-04-12 14:11
    저는 '부득이'라는 말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하하;; 스스로도 장자를 너무 밍밍하게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물론 많이 어렵긴 하지만 ㅜㅜ 한문 실력이 미천하다 할지라도 원문도 함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해석본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

  • 2017-04-13 01:48
    꼼꼼한 후기 고맙슴다!! 저도 부득이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되네요 ..얼마나 많은 자기정당화로 부득이 를 써잡쉈는지 몰라요. 행위함 자체가 부득이하다는 것인데....정말 부득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진짜 부득이한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등등 여러생각이 ....

  • 2017-04-14 00:19
    아우, 나는 재원씨 글 볼 때마다 넘~ 좋아요!!^^ 이게 유심한 마음인건 분명하지만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