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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4-12 13:56
조회
167
170415 동사서독 공지

장자는 어쩐지 우리가 이미 아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생명을 잘 길러야 한다든가 이 험한 세상에 쓰이겠다고 나서기보다는 차라리 '쓰이지 않는 쓰임'을 길러서 천수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든가 하는 말 같은 것이요. [양생주]의 시작인 “우리의 생은 한계가 있는데 앎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우리 생이 유한한데 비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많다는 말처럼 읽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게 읽더라도 여전히 장자가 한계 없다고 하는 앎이 무엇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이때 ‘知’는 무엇인지, 생명을 기르는 知와 그렇지 않은 知는 따로 있는지. 이때 후자의 知는 인위적인 것이고 생명을 기르는 것은 다른 것인지 등등. 한가지 글자만 파더라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가려는 존재입니다. 현재를 사는데 왜 이런 현재를 사는지, 혹은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지금 현재가 있기까지는 어떤 과거가 있어왔는지. 인간은 자기가 시공을 넘어갈 수 없음은 물론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의 생각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보려고 하죠. 그래서 인간은 ‘인간학’인 역사를 만들었다고 푸코가 말한 바 있고요. 장자는 이런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것을 추구하면 위태롭다는 것을 [양생주]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탐욕스럽게 만들어서 ‘지금만 살면 된다’가 아니라 지금 누리는 것을 더 확장하여 미래까지 이끌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그때 인간은 위태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자신이 하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자연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내가 행위 하는 것에 대해 따라붙는 결과나 의미를 생각한다고 한들 자연은 연기조건 속에서 부득이하게 행위 하니까요. 이런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이 ‘무력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다는 것은 잉여를 남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인연조건에 조응하는 것이죠. 이때 행위는 그저 행위로서 정당화가 될 뿐 과거나 미래로 인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우사는 외발로 나옵니다. 그가 형벌을 당했든 아니면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든 중요한 것은 그 외발인 사실을 우사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건 단지 자신이 한쪽발이 없다는 사실에 순응하고 결손이 있더라도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발은 외발인 채로 정당화되고 또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장자>에서 가장 놀라운 죽음에 대한 통찰 또한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드러납니다. ‘懸解’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듯한 인생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고 읽히기도 하지만 그저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와 같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연에 무력함을 느끼거나 혹은 거기에 너무 놀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고 또 삶에 대해 비관하면서까지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세]를 왕보는 현실 정치에 대한 중니와 안회의 대화에서 정치를 하는 자로,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온 자로 서서히 시점이 옮겨간다고 보았습니다. 이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기. <장자>에서 정치는 어떤 것인지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것이 과제입니다.
그리고 [덕충부] 읽고 공통과제 써 오시고요.
후기는 재원언니
간식은 락쿤쌤, 지현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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