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4.15 동사서독 강의 후기
작성자
김지현
작성일
2017-04-16 21:21
조회
199
玩心으로 읽는 장자
이번 주에는 제 5장 덕충부에 대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덕충부에는 불구의 몸을 갖고 있는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가 각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우리 조에 계시는 현옥 선생님께서 먼저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외형보다 내면의 덕이 더 중요하다는 뻔한 결론을 장자가 얘기했을 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건화씨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아름답지만 부도덕한 사람과 외모는 추하되 훌륭한 내면을 갖고 있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서도 그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굳이 불구자들을 여러 명 등장 시킨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채운 선생님은 ‘불구자’들이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며, 실존의 유한성을 ‘불구의 몸’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육체가 불구인데 정신이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는 차라리 외부의 작용에 반응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신 즉,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상을 만들어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신을 믿던 인간은 이제 그 자리에 ‘과학’, ‘컴퓨터’ ‘숫자’를 앉혀놓고 의지합니다.(김어준씨가 제작한 다큐 ‘더 플랜’은 우리가 정확하다고 믿는 시스템이 얼마나 허점 투성인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유한한 존재이면서 그 유한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 이 모순된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공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거울’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거울을 통해서 비춰진 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거울은 사물을 고스란히 비추지 못하고, 기존의 앎 즉 ‘成心’이 작용하여 왜곡된 지식을 만듭니다. <논어>에서도 거울이 등장하는데요, 구절을 잠깐 옮겨 적어보겠습니다. ‘如鑑之照物 硏媸在彼 隨物應之而已’, ‘거울에 물건을 비출 적에 아름답고 추한 것은 저기에 있고, 사물에 따라 응하는 것과 같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거울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연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成心’ 없는 거울을 가진 안연의 경지가 되어야 ‘不遷怒(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 것)’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거울은 안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저마다의 成心을 만나고 거기에 미세한 균열을 만드는 과정, 그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기존의 관념 체계는 익숙한대로 작동할 것이고, 이 작동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른 식의 사유’ 입니다. 공부를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생각의 틈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안하던 행동을 하면 기존의 관계에 반드시 틈이 생긴다고 합니다. 공부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고 사유한 만큼 기존의 것들은 허물어질테니까요. 우리는 기존의 앎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닦고 또 닦는 과정이 공부의 전부입니다.
격몽 스쿨에서 <논어>를 배우고 있는데요, 정말 악착같이 일관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알고 싶으면, 격몽스쿨로 오세요. 신규 모집중입니다.) 이에 반해 장자는 했던 얘기를 다음 문장에서 뒤집어 놓는 비균질적인 텍스트 임이 분명합니다. 인간세 편의 ‘섭공자고’를 보면, 정치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범 사육사’처럼 본성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놓고, 다음 문장에 등장하는 ‘말 사육사’는 말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우발적인 사고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성을 잘 살펴서 목숨을 보존한 사례를 더 보여줘서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제시한 의미를 통째로 흔들어버리지요.
비균질적인 에피소드를 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혼란만큼 자유를 준 셈이지요. 오늘 <논어>에서 완심(玩心)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완(玩)’은 장난감 완구할 때 그 완(玩)인데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조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은물 교재’가 떠올랐습니다. 색깔도 모양도 다른 구슬을 실에 꿰는 것인데, 그것처럼 장자의 에피소드를 챕터 무시하고 저마다의 기준으로 배열해서 에세이를 써봐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제 5장 덕충부에 대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덕충부에는 불구의 몸을 갖고 있는 왕태, 신도가, 숙산무지가 각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우리 조에 계시는 현옥 선생님께서 먼저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외형보다 내면의 덕이 더 중요하다는 뻔한 결론을 장자가 얘기했을 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건화씨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아름답지만 부도덕한 사람과 외모는 추하되 훌륭한 내면을 갖고 있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서도 그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굳이 불구자들을 여러 명 등장 시킨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채운 선생님은 ‘불구자’들이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며, 실존의 유한성을 ‘불구의 몸’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육체가 불구인데 정신이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는 차라리 외부의 작용에 반응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신 즉,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상을 만들어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신을 믿던 인간은 이제 그 자리에 ‘과학’, ‘컴퓨터’ ‘숫자’를 앉혀놓고 의지합니다.(김어준씨가 제작한 다큐 ‘더 플랜’은 우리가 정확하다고 믿는 시스템이 얼마나 허점 투성인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유한한 존재이면서 그 유한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 이 모순된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공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거울’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거울을 통해서 비춰진 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거울은 사물을 고스란히 비추지 못하고, 기존의 앎 즉 ‘成心’이 작용하여 왜곡된 지식을 만듭니다. <논어>에서도 거울이 등장하는데요, 구절을 잠깐 옮겨 적어보겠습니다. ‘如鑑之照物 硏媸在彼 隨物應之而已’, ‘거울에 물건을 비출 적에 아름답고 추한 것은 저기에 있고, 사물에 따라 응하는 것과 같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거울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연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成心’ 없는 거울을 가진 안연의 경지가 되어야 ‘不遷怒(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 것)’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거울은 안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저마다의 成心을 만나고 거기에 미세한 균열을 만드는 과정, 그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기존의 관념 체계는 익숙한대로 작동할 것이고, 이 작동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른 식의 사유’ 입니다. 공부를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생각의 틈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안하던 행동을 하면 기존의 관계에 반드시 틈이 생긴다고 합니다. 공부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고 사유한 만큼 기존의 것들은 허물어질테니까요. 우리는 기존의 앎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닦고 또 닦는 과정이 공부의 전부입니다.
격몽 스쿨에서 <논어>를 배우고 있는데요, 정말 악착같이 일관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알고 싶으면, 격몽스쿨로 오세요. 신규 모집중입니다.) 이에 반해 장자는 했던 얘기를 다음 문장에서 뒤집어 놓는 비균질적인 텍스트 임이 분명합니다. 인간세 편의 ‘섭공자고’를 보면, 정치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범 사육사’처럼 본성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놓고, 다음 문장에 등장하는 ‘말 사육사’는 말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우발적인 사고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성을 잘 살펴서 목숨을 보존한 사례를 더 보여줘서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제시한 의미를 통째로 흔들어버리지요.
비균질적인 에피소드를 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혼란만큼 자유를 준 셈이지요. 오늘 <논어>에서 완심(玩心)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완(玩)’은 장난감 완구할 때 그 완(玩)인데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조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은물 교재’가 떠올랐습니다. 색깔도 모양도 다른 구슬을 실에 꿰는 것인데, 그것처럼 장자의 에피소드를 챕터 무시하고 저마다의 기준으로 배열해서 에세이를 써봐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스템이 허점 투성이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해도 사람이 일하는 현장을 얼마나 연구해 보았는지... 외국학자들이 울나라의 투표시스템이나 투표용지에 대해서 알긴 하는건지... 왜 그런 수치가 나왔는지 사람들과 부딪쳐는 보았는지.....사이버세계는 현장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듯하여 아쉽고 4년동안 작업한 내용이라는데 전제부터 오류라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해도 사람의 마음의 장을 분명히 흔들어 놓았으니 이런 현실을 또 무시해서는 안되겠죠... 요즘 이런때 철학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해도 사람이 꼭두각시 노릇만 하면서 살수는 없을진대 행위의 정당성 따위는 전혀 필요없는 걸까요?
...아뭏튼 쌤한테 열심히 들은 풍월이라도 있어 한발짝 떨어져보며 이리저리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좋으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