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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4-16 18:39
조회
200
170422 동사서독 공지

참고영상: 더 플랜

https://youtu.be/aGGikPMNn2w

위 영상은 전자 개표가 얼마나 허술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우리는 기계와 숫자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도 믿을 수 있다고 여기죠. 왜냐하면 나 자신은 마음작용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도대체 믿을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그것이 기계와 숫자를 믿는다고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장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은 거울처럼 다른 사람을 비춘다고 했습니다. 이 거울 비유는 장자뿐만 아니라 유교에서도 불교에서도 합니다. 맑고 흠결 없는 거울을 닦으라고요. 심지어 선종에서는 닦을 거울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 거울은 다름 아닌 마음입니다. 장자의 말은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 마음이라는 건 대체 무엇이기에 유불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매달리는 것일까요?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믿을 만한 존재를 외부에 만듭니다. 그게 신이고 진보이고 지금 현대에는 과학입니다. 니체는 인간이 신의 자리를 없앤 적이 없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믿을만한 존재를 바꿔 왔다고요.
인간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믿을 수가 없죠. 특히 지금처럼 이미지가 넘쳐나는, 이미지만이 전부인 시대에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정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는 더더욱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눈앞에 빤히 드러나 있는 것을 못 보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보게 만듭니다. 그런 소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제법 많습니다. 픽션에서뿐만 아니라 ‘리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TV 쇼도 눈앞에 빤히 드러나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사례를 우리한테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다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을 실증해 주는 외부의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장자는 成心과 常心을 말합니다. 나는 어떤 지식을 지금의 나 자신에게 붙이는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리 만들어진 견해, 성심이 있으면, 다른 것을 만날 때 그 성심을 작동시켜 판단한다는 것. 그래서 사과 비슷한 것을 봐도 미리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사과’라는 성심을 작동시켜 사과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물의 차이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내게 있는 기존의 신경 체계 또한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건 배워도 배운 게 안니 것. 공부는 그 신경체계가 작동하는 것에 틈을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 비슷한 것이 눈에 들어오면 늘 하던 대로 성심을 따라 ‘사과’라고 바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로 판단내리는 것을 멈추고 사유하는 것이 공부라는 것. 그것이 常心입니다.
常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이라는 뜻으로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글자입니다. 동양에서 영원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변함없는 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하는 것만이 있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항상됨’이라고 한다면 사물의 변화를 내 관념이나 기존의 인식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차이를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올바른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마음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차이를 동일화하느냐, 차이를 차이로 보느냐 이것은 모두 마음에 달린 것이죠.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은 이미 성심, 티끌로 덮여 있습니다. 그럼 이걸 다 닦아내고 나서야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마음이 주는 현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장자는 말하는 걸까요?
그런데 거울을 닦고 난 다음에는 바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망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덕충부에 나오는 불구자들과 다름없이 세상을 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불구자들은 덕이 충만한 자들로 소개되지 않던가?! (그래서 조별토론에서는 불구의 형상이 덕의 증표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여러 번 나왔던^^) 맑은 거울은 결국 무엇일까요? 신도가는 “육체의 내면” 문제를 말했습니다. 이때 장자의 말에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 그는 육체와 마음의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장자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육체에 걸려 넘어지듯 우리의 관념 또한 형해화 되어 우리를 걸려 넘어뜨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관념이 형해화 되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내 선판단에 대한 비판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불구자도 불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29일은 주역 강의가 없는 관계로 긴~ 보충수업이 있을 예정입니다. 미리 공지합니다^^

다음시간은 [대종사] 읽어옵니다.

후기는 공부를 위해 3일이나 휴가를 내셔서 미풍양속에 기여하신 지현쌤^^

간식은 규창, 혜원

암송 있습니다~ 그리고 벌금 안 내신 분들 다음 시간까지 내시고 새출발 합시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2

  • 2017-04-16 21:32
    제가 후기 쓰면서 놓친 부분이 많습니다.
    혜원씨가 남긴 글을 함께 읽어주세요.
    그리고 저에대한 수식어는 거두어 주세요. 제발~

  • 2017-04-17 11:09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외부에 믿을 수 있는 대상을 만들었다는 게 계속 기억에 남네요. 느낌으로는 어떤 철학도 다 자기로부터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장자를 읽는 것도 텍스트에서 맴도는 게 아니라 자기 문제로 가져와서 사유해야 하는데 계속 장자가 내린 결론에만 눈이 가네요. 하하;; 그가 비유들을 통해서 어떻게 사유하는지 열심히 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