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2 수업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1-09 00:14
조회
324
161102 절차탁마 후기

8번째 고원은 짧으면서도 단편소설 세 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전보다 쉽겠거니 하고 방심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천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대충 ‘이런 것이겠거니~’ 하고 뭉갰던 ‘선線’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線들의 철학’을 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하지만 고도로 추상화된 선의 철학을요.
토론을 하면서 대체 선이 무엇인지 질문을 여러 번 했습니다. 왜 선이라고 했을까? 사물을 선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무엇일까? 채운쌤은 ‘선’과 ‘선분’은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하셨어요. 이른바 선은 운동성, 시작과 끝이 없는 개념인 반면 선분은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분 AB’로 표현되는 개념이라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런데 들/가는 구분하여 챕터 8과 챕터 9를 썼다고 합니다. 이번에 읽은 것은 선에 대한 것이고요. 이러한 개념들은 일종의 렌즈, 연장입니다. 어떤 렌즈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존재는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고요. 철학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연장처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연장, 렌즈로서 존재하는 개념 선.
선에 앞서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개체’, ‘주체’, ‘점’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특정한 기준에 따라 그 자리를 부여받은 것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다음에 그 사이를 선분이 가로지르게 됩니다. ‘선분 AB’는 ‘선’이 아니라 점 A와 B를 잇는 것입니다. 결국 A와 B의 자릿값이 중요하고, 이 시작과 끝이 없으면 그 점들 사이를 잇는 ‘선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일단 주체인 ‘나’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다른 점에 대한 관계를 잇든가 욕망을 갖든가 하는 것입니다.
클레는 모든 것은 독특한 자기 선을 그린다고 말합니다. 선이란 운동성을 내포한 개념으로, 존재는 즉 운동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이란 이런 점의 고정성에서 시작하는 것에 반대하는 개념입니다. 선을 그린다는 것은 화면에 운동성을 도입하는 것으로, 주변에 어떤 선이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공간은 다시 만들어집니다. 즉 점과 달리 선이라고 한다면 어떤 조건이나 공간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릿값을 부여받는 점들, 주체의 선험성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운동들, 각각이 그리는 리듬과 그것들이 얽히면서 자기가 변하거나 선이 삐져나가거나 하는 운동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채운쌤은 들리니의 선을 보여주셨습니다. 들리니는 자폐증 아이들의 선을 분석했는데요. 그 그림에는 규정성을 부여받은 사물들을 습관적으로 도는 선들이 있고, 또 거기서 이탈하여 ‘집’, ‘사람’ 같은 점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 ‘방황하는 선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관습적인 선을 그리면서 그런 선들을 흩어버리는 선도 같이 그립니다. 그럼으로써 목적지와 출발점을 갖지 않는 선들의 지도를 그리는 것입니다.
들/가가 파악한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단편은 인물들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며 그의 성격이 사건 속에서 아주 특이한 지점에서 내뿜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편은 교훈을 구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사건, 시작도 끝도 없는 중간적인 시간 자체를 보여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우리가 과거형으로 묻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을 경험하는 중에는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이미 주체가 있고, 그것이 행위 한다고 보는 점적인 사유와는 다릅니다. 존재가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습관적인 선들, 그리고 거기서 삐져나가는 선들이 있습니다. 들/가는 단편소설을 분석하면서 세 가지 선을 말합니다. 잘 짜인 영토 위의 견고한 분할선. ‘커플’의 선. 자기가 주체화되기 위해 필요한 대상인 사랑하는 사람. 즉 개체 A와 B의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라는 주어진 기준에 따라 자리에 있는 존재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항체계를 교란하는 유연한 분할선(분자적 분할선)이 있습니다. ‘커플’과 비교되는 ‘분신’의 선. 자기의 증식. 주체가 나라는 존재를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고 진동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아닌, 나와 나의 분신의 관계. 나보다 어쩌면 나를 더 또렷이 기억하는 분신이 있고 나를 두렵게 하고 진동하게 하는 분자적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그리고 도주선. 더 이상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이 존재합니다. 두 번째 선이 다시 영토로 가는 선이라면 도주선은 지속적인 탈영토화, 실험하는 선입니다. 들/가는 이 세 가지 선이 합성하고 상호내재적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선들은 각각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이고 언어의 기만이라는 것입니다.
들/가는 도주선을 ‘발명’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도주선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도망이 아닙니다. 습관적인 선과 거기를 삐져나가는 선들이 있고, 존재가 행위로서 존재한다면 도주선의 발명은 그 습관적인 선을 그리는 운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 패턴을 멈추고, 구도에 갇히지 않는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은 도주의 찬스이기도 합니다. 매일 영토의 원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영토성을 이탈하는 계기의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을 통해 과거를 끄집어내어 시간을 복합적으로 만들고 다른 배치 형성의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배치의 형성. 마지막으로 채운쌤은 글쓰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어떤 일을 겪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다가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묻는데, 그 지각 불가능한 생각과 마주하여 도주, 탈영토, 배치형성의 계기로 만드는 것이 쓰는 행위라고요. 쓰는 것은 언어로 생각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지각 불가능한 현재 속에서 질문하고 쓰고 싶어지는 것이 글쓰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글쓰기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면서 주체화, 의미화에 걸려 넘어질 위험과 마주하며 계속해서 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아나는 자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자로 인해 세상 또한 도주하게 됩니다. 그것이 들/가가 말하는 도주선, “세상을 달아나게 하는” 선인 것입니다.
전체 2

  • 2016-11-10 09:05
    저는 그 그림을 봤을 때 그냥 전선을 여기저기 걸친 것 같았는데 ㅋㅋㅋㅋ 여튼 '선'이라는 개념은 왠지 자꾸 눈이 가네요~

  • 2016-11-10 10:43
    욕망-기계, 다양체, 선 이런 것들이 다 같은 것을 말하는 듯 하먼서도 각각의 개념으로 설명할 때 다르게 보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네요. 역시 들/가가 괜히 어려운 말들을 만든 건 아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