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30(꺅! 벌써!)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1-25 15:09
조회
339
지난 시간에는 열 번째 고원에서 ‘되기’라는 해괴한 개념을 배웠습니다.
뭔가가 된다는 것이 어째서 철학적 개념일 수 있는가 싶지만, 사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란 익히 알 만한 어떤 것이 되는 게 아니라(나는 커서 선생님이 될래요, 성공한 직장인이 되는 열 가지 방법, 씩씩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차라리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는 점에서 아주 놀랍지요.
그들이 말하는 되기란 사회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속한 수많은 영토들을 벗어나는 것, 지니고 있던 이름을 버리는 것. 그러므로 무언가를 손에 쥐는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해체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요컨대 되기란, 견고한 주체를 벗어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개인적으로 유독 동물-되기라는 개념이 흥미로웠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동물-되기는 쥐나 말을 흉내 내는 따위의 일이 아니라는데, 채운 쌤께서는 이를 인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 설명하셨죠.
가령 디오게네스의 개-되기처럼 인간적 사유, 인간이라는 지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쉴 새 없이 휙휙 바뀌며 매번 생산되면서 전체 우주를 구성하는 이 세계를 오직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규명하고 규정하려는 파시즘적 시선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이게 곧 동물-되기랍니다.
고로 고도의 철학이 동물-되기일 수 있으며, 작가들의 부단한 창조 행위가 동물-되기일 수 있죠.
세계와 존재를 다르게 감각하면서 매번 그와 더불어 새롭게 되기에 이를 수 있는 역량을 끌어올리는 자, 그는 매번의 동물-되기를 감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답니다.

여성-되기도, 흑인-되기도, 아이-되기도 마찬가지지요. 다수성을 점하고 있는 견고한 그램분자적 절편성(남성, 백인, 성인…)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모든 시도들을 들뢰즈+가타리는 ‘되기’라 불러요.

그런데 애초 존재가 어떻게 ‘되기’에 이를 수 있을까? 이미 하나의 기질과 역사를 소유한 채 세상에 머무는 존재가 어떻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으시는지? ^^;;
사실 들뢰즈+가타리의 이야기가, 읽을 때야 맞는 말처럼 보이기는 해도, 실제 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뭔가 허황되고 너무 이상적인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존재가 바뀌었다기보다는 그냥 변덕을 부리느라 여기서는 이 모양 저기서는 저 모양, 이 순간에는 이 모양 저 순간에는 저 모양이기 일쑤죠. 그뿐인가요. 나이 들어서 또 공부 좀 해서 이제 좀 바뀐 것 같다 느껴졌다가도 어떤 순간에 가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기 일쑤에요.  이러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그런데 확인하셨다시피 저자들은 처음부터 출발점을 다르게 잡고 있죠. 저자들에 의하면 ‘내가’ 바뀐다, ‘내가’ 된다… 이런 건 애초 말이 안 된답니다. 왜냐고요? 나는 ‘나’가 아니니까요.
니체는 인간을 유기체가 아니라 차라리 물리적 힘들의 복합체 같은 것으로 간주했었죠. 그의 눈에 인간은 ‘힘들의 격전지’ 정도였지, 결코 힘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들뢰즈+가타리 역시 인간을 복수적 존재로 간주합니다. 아니, 세계 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지요. 이를 두고 채운 쌤은 ‘자연은 규정을 모른다’고 표현하셨고요.
하늘, 나비, 비행기… 는 인간이 언표 활동을 통해(다시 말해 대상을 추상화하는 능력을 통해) 그렇게 규정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일체가 결코 아닙니다.
하늘이 하늘이기 위해 접속해야 할 수많은 조건들, 그리고 그 조건들을 해석하는 하늘 고유의 코드화 방식, 그에 따라 매번 상이하게 표현되는 것들, 인간이 이를 뭉뚱그리고 평균내서 ‘하늘’이라 부를 뿐이지요.
나는 나를 나라고 부르지만 바로 이 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경유해야 하는지를 일찌감치 니체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이 아주 잘 보여주었지요.
<천의 고원>의 저자들은 이를 ‘다양체’라 부르고 있답니다.
자, 다양체이기에 인간은 ‘되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양체로서의 인간이 다양체로서의 책과 만나 새로운 도주선을 그리면서 동시에 나와 접속한 책이 새로운 도주선을 그리게 만드는 것, 요컨대 인간과 책이 하나의 블록을 형성해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 열 번째 고원은 이를 ‘되기’라 부르고 있는 거지요.
고유한 리듬(이를 특이점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을 통해 이 새로운 만남을 해석하면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것, 바로 이게 되기랍니다.

고로 되기는 하나의 생성에 다름 아닙니다. 생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곧 되기!
그러므로 모든 되기는 접속을 통해 이뤄지고, 동시에 모든 되기는 언제나 새로운 접속을 불러온답니다.
<앙띠>에서 기계들의 연결접속만이 있다는 주장이 여기서 다시 환기되지요. 세계는 오직 생산만을 안다, 이항적 기계들의 끊임없는 연결접속만이 있다…….
세계 전체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거대한 다양체로서의 추상 기계이며, 그 세계 안에서 각각의 다양체들이 서로 만나 상대를 탈코드화하고 재코드화하면서 생성을 이루어낸답니다.
세계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거대한 시계 같지요^^ 마법에서나 나올 것 같은, 언제 어떤 것이 툭 튀어나오고 소리를 내고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시계.
보면 볼수록 고원은 퐌타스틱합니다그려.

음... 지난 시간에 재미난 이야기를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시간이 다 되어 채 다루지 못한 것들이 좀 있지요. 다음 시간에 11장과 함께 10장 마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간식은 저와 재겸쌤.
모두들 다음 주에 뵙죠.
전체 1

  • 2016-11-29 13:49
    '하늘이 하늘이기 위해 접속해야 할 수많은 조건들' 요 대목이 딱 걸리네요!^^ 건화, 혜원 후기에 쌤것까지 읽고 나니 완전 근사해요!
    언제나 정신나는 후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