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23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25 01:42
조회
352
이번 주에는 열 번째 고원인 <1730년─강렬하게 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를 읽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번 고원은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녹록치 않았습니다.

이번 고원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은 ‘되기’입니다. ‘되기’는 생성을 사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독특한 방식을 표현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그냥 ‘생성’이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헷갈리는 개념을 만들어서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요? 채운쌤은 들뢰즈의 관심이 차이나 생성 자체가 아니라, 차이 속에서도 유지되는 동일성·일관성에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떻게 나는 변화를 거듭하고 항상 새로운 순간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나 자신일 수 있는가, 문제는 것은 이 질문을 해결하는 일입니다. 생성과 존재를 동시에 이야기하지 않는 존재론은 우리 삶에 별다른 소용이 없겠지요. 생성 앞에 존재를 놓는 모든 종류의 본질주의는 우리에게 보편윤리나 당위 같은 것을 부과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변화와 차이 자체만을 볼 때 우리는 냉소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는 이 양극단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닐까요. 물론 이때 양극단이 아닌 제3의 길을 실체화한다면 그 순간 또다시 함정에 빠지고 또 다른 영토에 귀결되고 말겠지만요. 아무튼 들뢰즈·가타리의 존재론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생성, 차이를 말했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생성과 존재를, 차이와 반복을 동시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혁명적입니다. 이들이 모든 고원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탈영토화의 선차성이죠. 그러니까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힘, 변이, 생성, 차이, 특이자 등이 중심이나 존재, 주체마저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앞서서 얘기하자면, 되기는 항상 자기 자신을 생산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상을 부여받아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되기에 의해서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변화와 생성을 지속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계속되는 실험을 통해서 가장 구체적인 윤리를 구성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되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채운쌤은 되기가 특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되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이 얼음이 되거나 수증기가 되는 것과 같은 정태적 변화는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항에서 늑대라는 항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될 거야’라거나 ‘커서 해적왕(?)이 될 거야’라고 말할 때의 ‘되다’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란 항상 다양체의 되기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고 성인 남자인 그레고르 잠자가 나름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벌레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건은 우선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인 남자)라는 개체성이 벌레라는 개체성으로 교체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 항, 되기에 앞서 존재하고 그것의 도달점이 되는 이 두 항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본질주의적인 착상 없이는 결코 이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존재는 다양체입니다. 다양체는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상대적으로 나뉠 수 없는 거리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한 절대적 거리들, 차원들이 다양체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늑대는 그 자체로 무리를 내포하고 있고, 다양체는 배치 속에서, 다른 것들과 더불어 되기를 실행중인 것이죠.

그러므로 되기는 특정한 항들 사이의 교체나 이동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본질적인 항들을 교란시키면서 작동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생성의 이미지를 유전이 아니라 전염에서 발견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되기를 말할 때 항상 ‘동물-되기’가 이야기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되기에 돌입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들, 규정들, 유위적 질서들을 얼마간 떠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을 오이디푸스화 시키는 사람들은 실제로 동물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되기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동물-되기 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여성-되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수자-되기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이 여성-되기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성의 소수적인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생성은 우선 다수성으로부터의 탈주입니다. 자연을 보면 바로 그렇습니다. 자연은 항상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 반자연적인 것으로 인해 생성되고 ‘자연’으로 유지됩니다. 계통적 진화에 앞서 돌연변이가 있습니다. 다수적 생성이란 없습니다. 생성은 항상 소수적으로만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위계화하고 규정하는 기준으로 기능하는 남성이나 백인으로 되기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소수적 상태나 소수성 자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수성과 짝을 이루는 소수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여성-되기를 말할 때의 여성은 영토로서의 여성이 아니죠. 그러므로 이들은 여성도, 흑인도 여성-되기, 흑인-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물-되기, 여성-되기는 결국 분자-되기, 더 나아가서 지각불가능하게-되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각불가능’은 어떤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영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지각의 바깥에 있음을 뜻합니다. 채운쌤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눈을 예로 드셨는데, 함께 봤던 그의 영화는 인간적 지각 이전의 기계적 지각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인간적 가치, 인간적 지각, 인간적 기준을 떠나는 것인 듯 보입니다. ‘n-1’. 인간적인 것을 떠나온다는 것은 어떤 상실이 아니라, 유일을 제거함으로써 다양한 속도들과 기운들을 관통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고유명, 나의 <이것임>을 구성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와도 곧바로 연결됩니다. 새로운 윤리를 발명하는 일은 내 안에 다양한 중심들이 작동하게끔 하는 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되기는 항상 나를 새롭게 생성하는 문제인 동시에 내가 속한 배치를 새롭게 생성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되기에 의한 새로운 윤리의 발명은 결코 자폐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배타적인 것일 수도 없겠지요. 채운쌤은 각자의 윤리를 만드는 일은 항상 다른 실험하는 자들과의 접속을 동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3

  • 2016-11-25 10:06
    단숨에 읽고 또 읽었네. 댓글을 달지 않을 수가~~^^ 빠른 것도 빠른 것이지만, 그간 공부한 것들까지 녹여 이렇게 근사하게 정리를 해 주다니. 글고,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고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대목들까지~~, 좋다야, 고마구만 ㅎ.

  • 2016-11-25 20:10
    그 날 채운쌤으로부터 이것저것 들었는데, 하나같이 알 수 없는 음악들이었습니다. ㅋㅋㅋ '새-되기'라는 점에서 메시앙의 노래가 어떻다를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임현정의 왕벌의 비행이 좀 더 왕벌을 잘 표현한 것 같은데, 이건 또 '되기'가 아니라 '모방'이라고 하시더군요. '모방'과 '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흐음....... 새소리나 좀 더 들어야겠습니다.

  • 2016-11-29 13:30
    수업을 못들었는데, 완전 잘 읽었네요.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이렇게 간명하게 정리해주다니, 건화 화이팅이여!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