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7 절차탁마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2-13 18:32
조회
354
161207 절차탁마 후기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이분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상과 질료, 자연과 문명. 늘 변화하는 차원(생성)과 생성에 형태를 도입하는 일관성의 차원이 있는데 이런 차원을 어떻게 개념화 하는가가 서양 철학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문제를 ‘내재면’, ‘잠재성’이라는 개념으로 가져옵니다. 내재면(잠재적인 측면)에서 이중분절이 되면 지층(현실성)을 이루는데, 이 지층은 이중분절을 거듭하며 내재면과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층과 내재면의 왕복운동이 배치물을 이루고, 곧 세계를 이룹니다.

여기서 잠재성은 현실성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현실성은 늘 잠재성과 동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큰 가능성이 있는데 실현되는 건 요만큼이라는 식의 잠재성이 아니라는 것. 잠재성은 현실화 되는 것을 통해서만 사유됩니다. 또한 들뢰즈/가타리는 존재가 곧 생성이라고 하며 잠재성과 현실성의 위계가 없음을 말합니다. ‘되기’라는 말이 이 동시성을 설명해는데요, 존재가 생성을 겪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생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개체가 고유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성의 평면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개체의 고유함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개체가 그 개체의 고유성을 띠는가? 그건 그 배치물들의 주기적인 반복, 차이가 리듬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리토르넬로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공간의 블록이라고 정의됩니다. 또 프리즘이고, 글라스 하모니카라고 하고요. 프리즘이나 글라스 하모니카는 차이 나는 것들을 조직하는 것에 빛이나 음을 만들어냅니다. 이렇듯 생성이 특정한 표현적 질을 획득하면 그 고유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리토르넬로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둠 속에서 무서움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카오스에서 주기적으로 반복이 생성되며 코드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카오스의 틈입으로부터 환경은 코드로 자기를 지키게 됩니다.

두 번째는 같은 유의 두 개체간의 임계적 거리가 일어나는데, 바로 영토의 출현입니다. 환경의 성분이 코드화를 이루는 것을 그칠 때, 그 코드가 해석되고 탈코드화될 때 영토화가 이루어집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존재란 다른 개체와의 임계적 거리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이는 기능적인 면과 무관하다고 합니다. 새는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자기를 표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를 표현하고,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생성합니다. 그 표현은 도덕률과 무관한 자신의 리듬성인데요, 스타일이라고도 합니다. 스타일은 어떤 법칙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원칙을 고수한다고 해서 그걸 스타일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주제와는 다른 일관된 무언가, 어떤 비전 같은 것을 작품이나 사람을 볼 때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이행의 측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영토를 내재면의 차원으로 열어버리는 것. 존재는 자기를 유지하려는 열망과 함께 내가 아니고자 하는 열망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배치물 속에서 중요한 것은 그 탈영토화인데요, 탈영토화를 통해 영토는 다른 영토로 이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이질적 성분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다지는 것. ‘되기’입니다. 일관성의 구도가 여전히 중요한 것. 영토를 만드는 것은 표현성이며, 영토를 갖는 것은 외부로부터 날 지키는 게 아니라 외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내 식으로 표현할 때 영토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존재론은 예술론이라고도 합니다. 예술은 경계표를 세우는 행위, 영토를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기능적인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것도 아닌 존재의 미학적 측면, 잉여적인 것으로 형성된 존재의 본질을 말합니다. 클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였습니다. 비가시적인 것들을 보는 것은 우주적인 것과 접속하는 능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는 여러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다차원의 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클레의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는 재료를 가다듬어서 비가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장인으로서의 예술가를 지향했다고 합니다. 재료와 힘들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예술적 능력과 결부된다고 본 것입니다. 재료를 어떻게 다질 것인가. 소리를 어떻게 직조할 것인가. 모두 영토를 형성하는 문제, 예술의 문제이며 존재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채운쌤은 세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요. 세잔은 망막에 맺힌 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에너지를 그린 화가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불안정성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음악은 매번 다른 시간을 직조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로잡아 단결시키는 힘이 가장 크다는 점에서 가장 탈영토화의 계수가 높으며 동시에 재영토화의 힘도 큰 예술입니다.

클레는 “우리는 민중을 기다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민중은 이질적인 집합, 소수자, 그리고 영원히 다수적 형태로 오지 않을 민중입니다. 새로운 예술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그 예술을 해석해낼 집단이 만들어지는데, 그 새로운 예술과 동시에 만들어질 해석 집단으로서의 민중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즉 실험하는 자에게만 열리는 코스모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민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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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15 10:46
    개체는 반복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 반복도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겠죠...? 매번 머리를 쥐어짜는 건화형이 이해가 갑니다. ㅠㅜ / 새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위험에 노출되지만 그것은 곧 자기를 표현하는 것, 어떻게 보면 존재를 생성하고 있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까요? 노래를 부르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잡아먹히는 것처럼 어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천개의 고원은 항상 알쏭달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