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우공이산] 장식적 앎에서 관계적 앎으로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29 19:00
조회
219

장식적 앎에서 관계적 앎으로


글 / 장청(비기너스)


푸코와 일리치, 이 두 철학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유기적인 관계의 구도 속에서 주체는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리고 실천의 문제로서 어떻게 대항품행을 만들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항품행은 예속화되지 않기 위한 능동적인 실천행위이다.

일리치는 『깨달음의 혁명』에서 모두가 확신하는 고정관념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일리치의 생각은 『깨달음의 혁명』뿐 아니라 일리치의 모든 책을 관통하는 사상이다. 일리치는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근대 이후 우리가 산업 자본 문명에 어떻게 길들여져 왔는지, 그 결과 산업 사회 이전,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후 자립능력을 박탈당하고 어떻게 전문가 집단에게 의존하는 인간이 되었는지를 파헤친다. 산업자본에 길들여짐으로써 종속화된 주체. 푸코는 이 길들여진 품행이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는 권력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인식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 스스로 권력에 복종함으로 예속화되기를 자청한다는 것이다. 일방통행의 권력관계는 없다.

나는 일리치와 푸코를 공부하기 전까지 지식, 진실, 진리, 권력이라고 하는 것들이 외부에 있는,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란 없고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의해 발명되고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진리처럼 떠받들던 ‘가치화’된 제도와 가설들은 합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조작한 은폐된 진실이다. 일리치는 가짜에 속지 않고 우리의 품행을 바꾸기 위해 진리의 가면을 쓴 기존의 체제를 근본부터 흔들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다방면의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왜 깨달음이 혁명인지를 일깨워준다.

푸코가 우리에게 핵심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구도의 힘 관계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이다. 푸코는 지식, 권력, 주체의 세 가지 키워드를 연구의 중심축으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건 주체의 문제였다. 푸코에게 주체화란 실천행위를 통해 진실을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진실은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화 된다’는 건 사회가 정한 질서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실천 행위 속에서 진실을 작동하게 만드는 일이다.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존재양식! 매력적이다. 푸코를 통해 진실이 내 실천행위에 있음을 이해하게 되자 나는 내 행위에 전과는 다른 책임 의식을 느낀다. 예를 들면, 귀찮다고 생각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이젠 어떻게 좀 더 해보자로 바뀌었다.

주체의 해석학을 읽을 때였다. 읽는 도중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되었다. “인간은 공동체를 위해 태어난 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만인이 이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모이는 공통의 거처라는 것을 아는 것..”(『주체의 해석학』,261쪽)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였다. 푸코는 세네카가 테메트리우스의 《자선에 관하여》에서 발췌한 이 인용문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함에 있어 앎의 방식은 모호하게 진실을 감춘, 주체의 변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장식적 앎 대신, 세상과 관계 맺는 -신들과, 인간들, 세계, 사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적 앎’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사회적 존재라거나 공동체라는 말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그때 왜 그 문장이 자극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유추해보자면, 그간 나와 공동체를 분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나는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니 거의 없는 것 같다. 고민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관념일 뿐이었다. 전쟁의 참상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울컥하다가 돌아서면 곧 잊고 마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이라고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생판 남의 일처럼 여겼던 문제들이 예전처럼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없으니 관심 밖이라고 여겼던 병역문제, 미혼모 문제, 성소수자들의 문제 등 이 모든 사회문제들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면서 푸코와 일리치가 던져준 화두를 다시 한 번 상기한다. 모든 대상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주체를 구성할 것인가”.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 실천이다. 주체적 인간이 되기 위해 나는 어떤 행위 양식을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전체 3

  • 2021-01-01 16:45
    일방통행의 권력관계는 없다! 거나 가치화 되어 있는 앎들을 뒤흔드는 것이 깨달음의 혁명! 이라는 간명한 표현들 속에서 샘이 앎을 무기로 만들고 계신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ㅎㅎ 잘 읽었습니다!

  • 2021-01-06 10:00
    저번 에세이부터 청샘께서 실천으로 삼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활동들이 떠오릅니다. 매일 그 어려운 푸코의 문장들을 읽고, 막히면 필사를 하고... 그런 고된 일들을 매일 해내고 계시는 청샘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딘가 숙연해지는 것 같아요! 이번 에세이에서의 관계적 앎에 대한 통찰도 그런 실천들 속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21-01-08 17:21
    비움샘들과 규문에서 공부를 시작한 게 제작년이네요. 팀웍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동체의 힘이라는 것도 있는 듯해요. 각자 조금씩 다른 역량을 가진 팀원들을 세심히 챙기고 보듬고 같이 가려고 하는 마음, 그게 공동체의 힘일 듯한데,, 비움샘들은 그런 힘이 있는 팀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저도 푸코와 일리치를 읽을 기회를 얻었고요. 생각만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푸코 그리고 일리치...하지만 다가서면 쉽게 품을 열지 않는 푸코와 일리치..우리 모두 힘들게 한발씩 다가가려고 했죠. 언젠가 청쌤께서 저한테 전화를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쓴 공통과제의 한 구절의 의미를 물으셨잖아요. 참 놀라웠어요. 저는 웬만해서는 잘 묻질 못하거든요. 이게 저의 고질병이라는 것을 샘들과 공부하면서 알게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