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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심연과 마주한 사유의 길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1-07 11:39
조회
531
 

심연과 마주한 사유의 길


글 / 최난희(절탁NY)


Ⅰ. 심연의 공포

앤드류 솔로몬은 『한낮의 우울』에서 우울증이 깊은 사람을 이렇게 묘사했다. 덩굴식물이 왕성하게 나무를 뒤덮는다. 밖에서 볼 때 그 나무는 덩굴식물의 지주가 되어 함께 왕성히 성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덩굴식물이 그 나무의 생명력을 기세 좋게 빨아먹고 자라는 중이다. 덩굴식물이 시든 후 들춰보면 그 나무는 텅 비어 있다. 나무는 덩굴식물에게 자신을 다 내준 후 증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멀쩡하게 보이던 사람이 쓰러졌을 때 우리에게 비로소 보인다. 그 사람의 밤과 낮이. 그 사람이 보여준 말과 몸짓들의 다중적인 의미가. 우리가 봤던 것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이었다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동생이 119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그 이전과 이후가 다시는 같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울릉도에 사는 올케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 연락 없던 올케한테 전화가 왔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평소 같지 않은 목소리, 울먹이며 더듬거린다. 직감적으로 뭔가가 터졌구나 느낀다. "진정하고 빨리 말해" "형님, 현수 아빠가 출장갔다가 부산 기장 근처에서 쓰러져서 119에 실려 가고 있는 중이래요. 현진이가 병원에 갔나 봐요. 어떡해요" "그래, 알았어. 지금 내가 내려갈게. 울지 말고 정신 차려." 뭘 챙겨야 하나. 가방에 이것저것 계통 없이 쓸어 담았다. 둘째 딸이 그런 나를 보고는 "엄마, 나랑 같이 가." 부산까지 320여 킬로. 운전대를 잡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중간중간 울음이 터졌다. 내 동생이 지금 뇌혈관이 터져서 빈 나무둥치처럼 쓰러져 의식이 없다. 그 애 곁으로 무조건 빠른 시간 내에 가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양산부산대병원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가 넘어서였다. 코로나로 인해 경기권 사람은 병원 출입 자체가 통제된 상태였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조카가 제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수술동의서를 작성하고 그 시간까지 버티고 있었다. 조카가 그간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쓰러진 지 30여 분 안에 시술이 이루어졌고 다시 뇌압을 낮추기 위한 수술에 들어가서 끝난 후였고 동생은 중환자실에 인공호흡기를 쓰고 누워있다는 것이다. 조카가 검정 봉투를 들고 있었다. 동생의 옷가지와 신발이 들어 있는 검정 봉투. 조카가 사진을 보며 준다. 그 속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중년 남자가 옷을 벗긴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은 듯 누워있었다.

동생은 50대 초반 직장인이다. 한창 돈 많이 들어갈 시기인 대학생 아들, 딸을 둔 가장이고,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어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동생과 나는 어려서부터 울릉도에서 육지로 유학 나왔다. 세 들어 사는 주인집 눈치를 봐가며 겨우 전화 연락을 하다가 그도 어려우면 우체국에 가서 교환수를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절, 바다 건너 부모님은 너무 멀었고 나와 동생은 객지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동생의 사춘기 시절 방황을 곁에서 지켜봤고, 부모님의 기대와 다르게 대학진학에 실패했던 동생이 울릉도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지켜봤다. 아버지와 친인척들의 인맥으로 지금 다니는 수협에 취직했을 때 직장 초년병의 스트레스를 못 이겨 방황하는 것을 지켜봤다. 지금의 올케가 혼전임신이 되어 결혼을 해야겠다고 했을 때 가정이 생기면 그럭저럭 안착을 하겠지, 생각했다. 동생의 결혼 생활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였다. 올케는 심성도 착하고 싹싹한데 왜 동생과는 안 맞았을까. 나는 동생이 많이 외롭겠다는 생각은 했다. 일가를 이룬 동생이 예전의 내 동생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이 부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끊으려고 했다. 동생은 술이 만취된 상태로 늦은 밤 전화를 하곤 했다. 뭐라 횡설수설하는 동생의 전화를 받은 후면 내 능력 밖의 불행을 보고받은 것 같아 늘 불안했다.

그렇게 간간이 오던 동생의 전화가 끊긴 지, 돌아보니 근 1년여가 되어갔구나. 부산이 시댁이라 빈번하게 드나들면서도 몇 년 전부터 학교 때문에 자취생활을 하는 조카를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분 뒤에 도사린 이 심리는 뭔가? 동생 부부의 사생활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동생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기 시작한 지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명분이야 ‘너를 위해’라고 하지만 실상은 ‘나 사느라 바빠’ 외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심한 고모인 나는 처음으로 조카의 자취방을 들여다봤다. 그날 밤 나는 조카 둘과 오래 이야기를 했다. 조카가 전하는 제 아빠의 일상을 들어보니 동생은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의 일상이 유별나지는 않다. 대한민국 보통의 중년 남성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동생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중년을 본다. 낮에는 주어진 수만 가지의 역할에 자기를 내주고는 텅 빈 속을 어떻게 달랠 방법이 없으니 이런저런 손쉬운 마취제를 찾는다. 그게 술이었다가, 더 이상 몸이 술을 받아내질 못하니, 동생은 1년 전부터는 리니지라는 게임을 그렇게 해댔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 니체가 이미 이런 증상을 예고한 말이 떠오른다. “우울증과 싸울 때의 좀 더 귀중한 수단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이다.”(『도덕의 계보』, 503) 자기 본성과 맞지 않는 사회생활에 자기를 구겨 넣고 살려니 혐오스런 자기를 잊을 수 있는 마취제를 어딘가 마련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겠지.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수협의 총무과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업무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 집 근처 어머니한테 들러본다. 엄마는 아들과 오래 이야기하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한다며 효자 아들이라고 동생을 부추긴다. 집에 들어오면 머물고 싶지 않은 공간, 어지럽게 짖어대는 개 두 마리,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러고는 콜라를 마시며 게임을 한다. 새벽 4시까지. 창문도 없는 방에서 담배를 한 갑씩이나 태우고. 잠인들 제대로 잤을까.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빈속으로 다시 직장. 왜 동생은 그토록 자기를 학대했을까. 그 메커니즘이 너무도 이해가 돼서 눈물이 쏟아진다.

우리 몸에 밴 자연스런 행동들, 예컨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잔다는 이 신체의 활동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각하는 의식의 영역이 섬이라면 ‘신체라는 커다란 이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2)의 영역은 그 섬을 받쳐주는 바다 같다고나 할까. ‘자기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자는 단잠을 이룰 수가 없다.’(같은 책, 42) 낮의 그 수 많은 역할들에 마음을 주지 못하고 소진되기만 한다고 여겼을 테니, 아마도 동생의 불면과 게임과 콜라들은 허무를 향해 달려가는 자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동생의 카톡프로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사람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인생, 동생에게 삶은 마땅히 짐 지고 살아내야 할 의무였구나. 세상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 당위와 책임으로 무장한 채 자신을 모두 내준 사람,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 더없이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같은 책, 39) 지금 자신의 사막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동생은 세상으로 나올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는 어떻게 표면의 삶, 현실의 삶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 동생이 처한 절체절명의 문제, 그가 처한 삶의 한가운데다.

한편 나에게는 이 체험의 강렬함을 다양하게 문제화하는 게 과제로 남는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삶에 어둡다. 온갖 망상으로 삶을 이렇다 저렇다 재단하며 주관적 환상의 세계를 헤맨다. ’내가 나‘라는 의식, 그런 내가 정렬해놓은 매끈한 세계는 한꺼풀에 지나지 않았다. 커튼이 찢겨지는 순간의 고통. 니체는 개체적 실존이 그 뿌리의 세계인 심연과 마주할 때의 공포를 ‘사지가 찢긴 디오니소스의 고통’이라 한다. 이것의 다른 이름은 불시에 본 적 없는 낯선 얼굴로 도래한 삶의 긍정이다. 이름 없는 것의 공포. 낯선 삶 앞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간 우리가 삶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매달렸던 그 모든 것들이 삽시간에 무가치해지고 오직, 오직 삶만을 원하게 된다. 낯선 얼굴의 삶, 그것을 나는 니체가 말한 ‘심연’이라고 이해한다. 일상,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 이 표면을 떠나 심연은 어딘가 실체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어디 먼 곳, 먼 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부단히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하나의 사건은 그 자체로 뭔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그저 별일 없던 일상에 주어진 강렬한 자극,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극단의 불쾌로 처리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니 산전수전 다 겪었다면서도 여전히 삶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만나잖는가. 우리는 자잘한 경험들을 축적하면 언젠가 모종의 지혜에 도달한다는 망상을 품는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심지어 책조차도 간접적 경험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다독을 권한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 자체를 재생산할지언정 가치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자의 자기확장에 불과하다. 왜 인간은 단 한 번의 고통으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왜 고통은 반복되는가. 표면의 삶 너머를 얼핏 본 경험은 공포였고 잠들어 아무 질문도 생산해내지 못하던 내 의식을 깨웠다. 이 사건 자체에 미리 주어진 가치는 없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각종 시선들이다. 예컨대 불운, 불행, 죄와 벌, 사회적 낙오와 같은 닳고 닳은 해석의 그물망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해묵은 해석들은 틈틈이 고통의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려고 한다. ‘고통받는 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작은 복수를 식혀주는 원인들을 찾아’(『우상의 황혼』, 169) 내며 그것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돌려세우고 습관적 해석에 붙들어 앉히려 한다. 사자의 정신, 공격적인 파토스! 담담히 ‘그 자신이 겪는 번민을 통해 자신의 앎을 증대시키는 생명’(같은 책, 172)의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 속에 있기 위해 어떤 힘을 키워야 할 것인가, 나의 문제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것에 속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85) 올 한해 니체를 만난 건 어쩌면 이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나를 미리 준비시킨 어떤 힘의 작용이었을지 모른다.

 



 

Ⅱ. 우리는 해석된 고통을 겪는다

“해석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발견하고 인식한 후에 수행되는 일이 아니다. 해석은 결코 2차적인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물에 대해 해석하기 전에 하나의 해석으로서 사물을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에 기분 나쁜 일을 겪었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그 일을 기분 나쁜 것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것을 겪는다. 우리는 사물 자체, 일 자체를 겪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가 겪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역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자아’란 우리의 체험에 덧붙여진 하나의 ‘주석’이며, ‘우리 자신’이라는 분명한 철자에 대한 오독이라는 것이다.”(고병권, 『언더그라운드 니체』, 16)

섬에서 날마다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다. 오늘도 어머니는 동생네에 가서 동생 사진을 보고 눈이 붓도록 우셨다고 한다. 동생의 현재 상황을 상세히 전달하지만 어머니에게는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고 모든 이가 당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속이고 있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신다. 당신 삶의 자랑이었던 아들이 ‘저렇게’ 된 데는 ‘에미인 내 죄 탓’이라며 ‘늘그막에 웬 우환’이며 ‘왜 안 죽고 이렇게 오래 살아 이런 꼴을 당하는지’라며 신세 한탄을 하신다. 섬에서는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더 많은데 문밖을 나가기 싫으시다는 거다. 아들이 좀 어떠냐는 안부를 지극히 물어오는 사람들을 마주하기가 힘들고 ‘저절로 기가 죽는다’고 하셨다. 몸이 굳는 것과 비례해 우리의 의식도 굳는다. 연세 드신 어머니는 오랜 습관적 사고방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다. 처녀적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셨는데 시집오니 시어머니가 진각종이라는 불교종단의 스승이셨고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하셨다. 진각종은 불교의 한 종파로 재가불교를 표방하며,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진언을 수행의 본존으로 삼고 있다. 결혼으로 난데없는 개종을 해야 했던 어머니는 종교적 갈등을 몸으로 겪으셨다. 일상과 불공의 경계가 없는 생활, 계율이 시퍼런 스승이셨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 헤아려보면 어머니의 신앙에 대한 이중적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결혼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수행을 하라는 필연적 요청인데, 아무튼 어머니의 지금 마음자리는 단지 환경에 오래 노출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어머니의 행복, 어머니의 자부심에 대해 나는 너무도 공감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나는 일’ 한 적 없고, ‘다락 같은 명예’ ‘부정한 재물’을 탐한 적이 없는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닥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해, 내게 결코 우호적이 아닌 삶에 대해, 내가 믿었던 삶에 대해 배신감과 원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그 마음자리를 이해한다. 하지만 불교의 첫 관문이 바로 니체가 말한 ‘자기경멸’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자기경멸’이란 ‘인간 말종’의 삶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말종, 최후의 인간의 삶의 모습은 이렇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인간말종이 날뛰고 있다. 저들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인간말종은 누구보다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병에 걸리거나 의심을 품는 것이 저들에게는 죄스러운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일에 매달린다. 일 자체가 즐거운 소일거리, 그런 소일거리로 인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평등하다.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자신들의 조촐한 환락을 즐긴다. 그러면서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차라투스트라』, 24)

인간말종은 상식적인 인간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해, 주어진 자극에 대해 수동적이다. 수동적이란 말을 나는 자극에 대한 해석 능력의 부재라고 이해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해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들뢰즈에 의하면 니체에게 수동성(passivite)은 비-적극적(non-actif)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수동적이란 영향받지 않음(non-agi)을 뜻한다. 이때 영향받지 않음이란 사회적 관계를 차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을 펼칠 때의 기준을 오로지 이득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는 얕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득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이들은 더없이 적극적이다. 파블로프의 개가 먹이 앞에서만 반응하는 것처럼 이들은 이득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현재 우리의 이득의 현실태는 화폐다. 그러나 화폐는 이득을 상징하기는 하지만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감정을 거래하고 헌신을 거래한다. 모든 것이 이득을 기반으로 하는 거래의 형태를 띠는 세계에서 영향받음이라는 게 가능할까. 이미 획득한 무언가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할 때 세계는 아무런 차이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평생을 진각종 도량인 심인당을 다니셨음에도 지금 어머니는 불시에 도래한 이 사태 앞에서 왜 상식적인 해석에 머물러 제2의 화살을 맞고 계신 것일까.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그 ‘행’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의식작용, 사고방식을 닦으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고’ 내 현세적 삶을 유지 보존하기를 비셨던 것은 아닐까. 나도 한동안 수행을 습관적인 의례로 굳혀버리고 그간의 의리로 도량에 몸만 왔다 갔다 한 적이 있다. 한순간도 머무름 없이 변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등을 돌렸다. 들뢰즈는 이런 순간을 ‘반작용의 승리, 영향받기를 중단할 때 그것이 소위 원한이 되는 그 순간’(들뢰즈, 『니체와 철학』, 212) 이라 이른다. 영향받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관념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공부란 게 마치 뭔가를 덧내는 과정인 것 같고 괜히 헤집어 없던 고민도 만들어내는 것 같아 가다 말다 머뭇거렸다. 나는 이대로도 ‘행복’한데, 굳이 이 나이에 감당도 안 되는 문제로 골몰하는가 싶고 지금 이 공부로 내 삶이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인가, 얄팍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문제없는 것이 바로 내 문제’라는 글을 읽고 도반들에게서 글에서 느껴지는 스텐스는 뭔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땅에서 한 3센티 정도 떠서 하는 소리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는 매일 새벽 진언 염송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그러면서 일상의 어떤 문제와 마주칠 때면 매사를 ‘내 문제’로 재빨리 환원했다. 정작 그 문제에 대한 해석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으면서 ‘내 문제’로 퉁치는 것을 문제의 답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수행이 아닌 ‘나’를 신앙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몽땅 끌어안을 수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로 환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 그걸 수행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한다. 이 의미를 단순히 외부 환경 탓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나’라고 이해했을 때, 다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 우리가 느끼지만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일에 하나의 가상적 통일성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 나’(『아침놀』, 115절)를 실체화할 때, 그 ‘나’는 다시 바깥이 되기 때문이다. 자칫 불교 ‘수행’이 세계를 등지고 개인의 마음이나 편하게 하자는 ‘수양’으로 오해되는 것은 이런 차원일 것이다. 불교에서 밖을 문제삼을 때 그 밖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주관적 구축물로서의 환상이다. 내가 그동안 ‘나’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주관적 환상의 주인인 ‘자의식’이 이름 붙여준 정체성이었다. 나는...살아오면서 거친, 혹은 거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거칠 수많은 역할에 대한 나였다. 니체에게 의식은 ‘자의식(conscience de soi)이 아니라, 의식적이지 않은 자신(soi) 그 자체와 관련한 어떤 자아(moi)의 의식’이고, ‘주인 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이지 않음에 분명한 한 주인과 관련한 노예의 의식’(들뢰즈, 『니체와 철학』, 87)이다. 다시 말하면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는 자기’(『차라투스트라』, 52)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자기’가 바로 의식의 주인이다.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 그것은 누구의, 어떤 자유인가? 자의식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자유란 끝없이 쟁취해야 할 무엇이지 그 자체로 완성된 어떤 상태가 아니다.

 나는 왜 그동안 문제화에 빈번히 실패했을까. 신체는 다양한 힘들의 장으로 부단히 차이를 지금도 생성 중인데 나는 ‘고통을 못 느낀다, 고통이 없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은 차이에 깨어있기를, 즉 영향받기를 중단하려는 의지에 먹이를 주는 게 아니었을까. 신체를, ‘육체, 휴먼 바디(human body)로 읽지 않도록 하자. 신체는 삼라만상의 연관관계 자체, 다양한 힘들의 장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부단히 생성되고 있는 차이를 해석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이의 생성, 즉 고통조차도 이미지화해서 ‘재난’으로 표상되는 고통만을 고통으로 착각하고자 했다. 착각했다, 가 아니라 착각하고자, 했다. 이 말은 우리의 무지는 우리가 무지하기를 욕망한 결과라는 의미다. 갓난아기가 아닌 이상 우리의 무지는 ‘순수’하지 못하다. 지쳤을 때 우리는 ‘더-이상-의욕하지 않기, 더- 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같은 책, 143)으려 하며 동시에 생성의 세계를 배반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순수한 무지’를 가장한 채 ‘고의적인 외면’(마크 네포, 『고요함이 들려주는 것들』, 279)으로 자초하는 어둠. 놀라워라! 무지가 스스로 욕망한 결과라니! 시간의 흐름과 생성의 세계, 덧없음으로 넘치는 이 표면의 세계에 신체는 매순간 끌리고 가치평가를 하고 창조하고 있다! 신체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앎’을 외면하고 자기를 속이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이미지화된 고통이 들이닥치지 않는 것을 ‘이만하면 행복’이라며 만족하고 보존하자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이어 그 지푸라기 같은 행복의 이미지에 반대되는 삶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한 ‘삶의 결핍’으로 가는 회로다.

삶의 결핍의 회로에 갇히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놀랍게도 신체의 그림자이던 의식이 신체를 지배하게 된다. 니체에게 의식은 이중적이다. 생성의 관점에서 의식은 ‘자유 정신’이며 ‘고향을 찾아내려는 탐색’을 본질로 한다. 하지만 ‘삶의 결핍’의 관점에서 의식은 ‘편협한 신앙, 엄하고 융통성 없는 미망에 사로잡’혀(『차라투스트라』, 449) 삶을 적대시하는 주범이 된다. 삶에 반대하는 수단,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온갖 중독물질로 신체를 오염시키고 기존의 삶의 양식을 답습하면서 신체를 길들인다. 길들여져 온순해진 신체는 영향받기를 두려워한다. 영향받기를 거부하는 신체와 영향받기를 거부하는 의식은 상호연동된다. 악순환인 것이다. 우리는 왜 자유를 말하면서 스스로 예속의 길을 택하는가. 왜 문제화에 빈번히 실패했는가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자유를 말하는 의식은 그간의 신체를 길들여온 세월의 기억을 이기지 못한다. 뭔가를 하고자 하면서도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하는 것은 ‘자유의지’보다 습관의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처럼 고통도 긍정으로 만든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그들은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재인식한다.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로 경련과 마비를 만들고, 고통으로 삶을 비난하고 삶에 반대하는 수단을 만들고, 또 삶을 정당화하고 모순을 해소하는 수단을 만들어낸다.”(『니체와 철학』, 45)

들뢰즈에 의하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삶의 긍정과 삶의 부정으로 나뉜다. 삶의 과잉이라 했을 때 ‘과잉’은 상대적인 ‘많음’이 아니라 ‘흘러넘침(overflow)’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움켜쥔 우리의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중에 있는 무엇이다. 고통은 바로 이러한 삶의 과잉으로부터, 늘 이행 중에 있는 것으로서의 세계로부터 새어 나온다.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세계와 삶을 비난하거나 원한을 품는 대신에 생성으로서의 세계를 표상에 가두려고 하는 자신의 의식을 문제 삼는다. 삶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관점을 절대화하는 나의 부적합한 인식이 문제다. 고통이 없으면 인식도 없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기는 고통이란 생성으로서의 삶을 긍정한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세계 그 자체로부터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설명될 수 없는 것과 맞닥뜨릴 때 공포심을 느낀다. 그때 그 사태에 서둘러 어떤 설명을 갖다 붙인다. ‘어떤 설명이든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우상의 황혼』, 120) 이때 그 설명이 현상에 대한 적합한 원인-결과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성가신 것을 없애주며 가볍게 해주는 원인’이 자동적으로 채택된다. 우리가 ‘낯선 느낌, 새로운 느낌, 체험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장 빨리 가장 빈번히 제거해버리는 설명들, 가장 습관화된 설명들’을 선택하는 이유는 불쾌의 정동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안정된다는 느낌 때문에 그 설명이 옳다고 믿는다.(같은 책, 119) 이리하여 고통을 출현시키는 조건에 대한 이해와 통찰의 기회는 사실상 불발된다.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삶의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구하며 ‘해결’을 목표로 한다. 삶을 비난하고 정당화하기를 되풀이하게 될 뿐, 삶을 그리고 고통을 긍정하지 못한다.

삶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자는 필연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삶을 불완전한 것으로 판결하며 유죄 선고를 내린다. 지금 여기, 감각적인 현실 세계는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우므로 고통 없는 저 완전한 곳을 꿈꾼다. 현존의 허무, 그 아래 ‘삶이란 이래야 한다’는 저마다의 이상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삶에는 주어진, 본질적인, 자명한 의미가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삶의 결핍, 다른 말로 삶의 부정은 이렇게 허무주의와 한배를 타고 이상주의로 향한다.

 



 

Ⅲ. 모든 이상주의는 허무주의다!

“허무주의(nihilisme)란 단어에서 허무(nihil)는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무가치를 의미한다. 삶은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하하는 한에서 무가치해진다. 비하는 항상 어떤 허구를 가정한다. 바로 허구에 의해 사람들은 왜곡하고, 비하하며, 허구에 의해 사람들은 삶에 어떤 것을 대립시킨다.”(『니체와 철학』, 259)

“모든 이상주의는 허무주의다!” 몇 해 전 수원평생교육관에서 채운쌤의 니체 강좌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뭔가에 끌리는 것은 내 의식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어떤 힘의 작용이다. 니체는 높은 산처럼 저 멀리 있는데도 마치 ‘신은 죽었다’는 깃발 같은 문장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면서 끌리는 것처럼 나와 니체를 접속하게 한 문장, ‘모든 이상주의는 허무주의다.’ 당시 나는 기독교식 신앙이 아니라며 나름 자부했던 나의 수행이 사실은 그런 신앙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감에 휩싸여 있었고 길이 꽉 막힌 느낌이 들던 때였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모든 이상주의는 허무주의다’는 문장을 당시의 나는 같은 맥락으로 읽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상주의의 궁극은 신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었다. 흔히 ‘갱년기의 허무’ ‘인생은 허무한 것’ ‘헛되고 헛되다’처럼 일상에서 우리가 ‘허무’라는 말을 쓸 때를 돌아보자. 뭔가 있는 것처럼 믿고 달려왔는데 도달하고 보니 신기루였더라, 혹은 뭔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별것 아니더라,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 여기고 알뜰히 챙겼는데 내 기대를 저버리더라. 이런 표현들의 공통점은 ‘분리’다. 지금과 저곳의 분리, 별것과 별것 아님의 분리, 만족과 불만족의 분리...지금 이곳의 삶은 늘 뭔가 부족하고 별것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불만족스럽다. 마치 저 높은 고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때문에 우리는 그게 뭐였던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꿈’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여긴다. 너무나 만연하고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이 사고방식을 문제 삼은 것이 나는 니체의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허무’는 현존이 이상을 설정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잉태된다. 이상주의가 허무주의라는 말을 나는 우선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니체에게 허무주의는 이 정도의 이해를 넘어선다. 니체는 ‘원한에서 해방되고, 원한의 진상을 규명했다는 것’(『이 사람을 보라』, 341) 때문에 자신의 오랜 병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 말을 좀 더 확장시키면 이런 표현이 되지 않을까. ‘허무주의에서 해방되고, 허무주의의 진상을 규명했다.’ 그렇다면 원한과 허무주의는 어떻게 엮이나?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번역이 ‘원한’인데, 어감이 과히 유쾌하지는 않다. 원한이라는 말에 붙어오는 개념이 복수심인데, 이 말 또한 별로 달갑지 않다. 원한을 가지고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따로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니체의 언어를 세밀히 헤치고 들어가 보면 ‘원한’과 ‘복수심’은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의지다. 원한의 인간은 한마디로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뭔가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이다. 존재와 힘을 분리시키는 존재.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는 인간. 세상을 탓할 때 그 세상은 주인공인 자아를 둘러싼 외부 전체다. 또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의지박약을 나무란다. 가책이다. 또 다른 전략은 지금을 희생해 나중을 도모하자는 식의 금욕주의적 이상. 이생은 망했으니 내생에 다시. 이 모든 형태들을 ‘복수심’이라 부른다. 니체에게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은 ‘전혀 심리적 성향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역사적 사건들이나 이데올로기의 흐름으로도 더더욱 환원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구조로도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니체와 철학』, 77) 그것은 특정하게 치우치고 비관적인 사상도 아니고, 건강하지 못하거나 쉽게 절망에 빠지는 특정한 성향도 아니고, ‘비존재’에 대해 말하는 형이상학도 아니다. 니체가 허무주의와 벌이는 싸움은 광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우선, 허무주의는 의지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반응적 의지의 승리를 나타낸다는 것. ‘다른 세계’에 대한 관념을 붙들고서 ‘이 세계’를 부정하려는 의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이 지지부진한 삶과 불완전한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의지가 허무주의의 배후에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러한 해석 속에서 니체가 유럽문명의 토대에 허무주의가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기독교의 허무주의를 비판할 때, 그는 특정한 교리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창시자들이 허무주의자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고통에 대한 기독교-허무주의적 해석이 유럽인들을 지배해왔고 유럽문명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을 비판할 때 니체는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몇몇 철학의 사조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초-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관념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의 형이상학 전통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반응적 힘의지에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니체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처음 만났던 나는 ‘세 변화에 대하여’에 나오는 세 가지 정신이 너무도 와 닿았다. 세 가지 정신 중에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나는 당연히 사자의 정신에 나를 투사했다. ‘자기 위의 크기’(『이 사람을 보라』, 353)를 가늠하지 못하고 음식을 섭렵하는 사람은 자기가 대단한 소화력의 소유자로 착각하겠지만 실상은 음식에 지배당한 사람이듯, 낙타는 짐을 무던히도 지는 자기가 강한 자라고 착각한다. 낙타의 기쁨은 자기의 등에 짐 지워 주는 대상의 인정에서 온다. 대상의 인정이 없을 때 낙타는 짐 지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읽으면 읽을수록 사자의 정신에 나를 투사했던 것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타가 지고자 하는 짐의 성질을 헤아려보고는 이를 막연히 나에게 강제되는 외부의 규제로 해석하는 것은 얕은 이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의 짐은 지워지는 짐이 아니라 스스로 지고자 하는 짐이요, 어찌 보면 해방으로 가는 길인 것 같은데 그 길 자체가 하나의 짐인, 대단히 복잡미묘한 성격을 띤다. 니체는 낙타가 ‘짐 지려는 정신’이라 규정한다. 단순히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차원을 넘어 그는 자꾸 묻는다. 이걸 지면 되나요? 더 무거운 걸 져야 하죠? 누구한테 묻는 것일까?

“그것은 오만에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 자신의 지혜를 비웃어 줄 생각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일. 혹은 도모한 일이 크게 잘 되었을 때 그 일에서 손을 떼는 일,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로 살아가며,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으로 고뇌하는 일, 병으로 누워 문병 오는 자를 돌려보내고,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벗하는 일, 우리를 경멸하는 자를 사랑하고 유령이 우리를 위협할 때 오히려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고 차디찬 개구리와 뜨거운 두꺼비조차도 물리치지 않는 일인가?”(『차라투스트라』, 37)

뭐가 문제인가? 낙타가 지고자 하고 지고자 하는 짐을 묻는 것은, ‘확신의 감옥에 갇히지 않은 위대한 회의주의’(『안티크리스트』, 297)와 어떻게 다른가? 그의 짐은 이러저러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오는 힘겨움 따위에 머무는 게 아니다. 살펴보면,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내가 뭘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물러날 때를 알고, 빈자의 삶을 살며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고뇌에 찬 영혼, 내 취향이 아닌 자 나를 경멸하는 자와도 벗하며 사랑하며...이건 성녀 테레사 류의 삶이다. 나만 이런 삶을 우러러 공경하는가. 나는 인간은 마땅히 이런 삶을 우러러 공경하고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하고 ‘때 묻지 않은 깨달음’(『차라투스트라』, 207)을 추구하는 것이 도대체 왜 세 가지 정신 중에 가장 ‘아랫단계’에 해당하는 것일까. 나는 이 세 가지 정신의 변화를 점진적인 변화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인생을 하나의 긴 일직선의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 높은 목표를 향해 경험의 지난한 축적 끝에 임계점에 이르면 한 단계가 완수된다. 그러고 나면 다시 다른 단계로 자동 이동되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무슨 인연인지 스승을 하셨던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 섬에서 유학 나올 때 마침 종단을 퇴임하셨던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매일 새벽 세 시간씩 반가부좌 자세로 진언염송을 하시는 할머니의 등을 보고 자랐다. ‘聖과 俗’, ‘진리’라는 언어가 골수에 박힐 정도로 생활화되어 있는 분위기에서 자라다 보니 나는 은연중 ‘눈이 높아’ 졌던가보다. 나는 ‘속인’들의 삶을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짐을 진 낙타가 사막을 걷는 것으로 판단하고 일찌감치 그 길에는 절대 들어서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내가 ‘깨달아서’ 구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나온다. 친절한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비웃는 듯해서. 나의 허무주의, 나의 데카당, 나의 병은 이토록 유래가 깊다.

어떤 인간관계 속에서도 ‘라이벌 의식이 없다’며 성자연했던 것도 따져보면 데카당의 한 형태, 허무주의의 표현이었다. 나는 일상 속에서 ‘평화’ ‘고요’ 등의 말을 선호하며 싸울만한 상황 자체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속은 더없이 시끄러웠으면서. 니체에게 ‘싸움’은 자기극복이다. 이때 싸움은 인간관계에 각을 세우라는 상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안주하고 있는 기존가치를 부단히 넘어서고자 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라이벌 의식을 못 느낀다는(느끼지 않으려 했던) 나는 어떤 은밀한 굴로 숨어들었을까. 나는 어째서 그 어린 나이부터 삶을 ‘관조’하고 ‘피로’에 지친 영혼이 되었을까. 익기도 전에 곯기부터 했을까. 실상 나는 힘들이 우글거리는 ‘대지’의 삶이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을 뿐이지 일단 하기만 하면 너네들 따위야 내 발 아래야’ 무슨 근거 없는 아만인지, 니체를 읽고 보니 이건 열등감 중에도 형편없는 열등감을 포장한 가짜 우월감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무너졌다. 니체의 맹금과 양의 비유에서 나는 양 중의 어린 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구축한 영토에 금을 내는 타자들을 접근금지시켰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완전무결하게 세팅해놓은 관념의 세계에 더러운 시기 질투라니! 쪼잔하게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는 것 같은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아래로 보았는가. ‘참된 것, 진실한 것, 무아적인 것’이 설마 ‘가상에, 기만에의 의지에, 이기심에, 욕망에’(『선악의 저편』, 17) 관련되어 있을 리가 없다! ‘때 묻지 않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고귀한 사람이라는 이 망상을 니체는 망치로 죽도록 내려쳤다. “너는 예민한 위선자다. 너의 욕망은 순진무구하지가 못하다. 의지를 죽이고 이기적인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너는 분만하지 못하는 자다. 네가 관조라고 부르는 것은 거세된 곁눈질이다!”(『차라투스트라』, 207) 아, 얼마나 안절부절했던지. 깨지기를 두려워하는 내 허위의식은 올 한해 니체와 접속하는 동안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만해도 너는 충분해,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마, 그 나이에 뭘 더 나아가려고, 됐어, 됐어, 됐어...’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도덕의 계보』, 541)

내가 처음에 사자의 정신에 나를 투사한 것은 낙타가 진 짐을 ‘먹고사니즘’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낙타의 짐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웠는가.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는 힘들일 뿐 아니라, 그것들의 무게를 달고 평가하는 등을 가지고 있다.’(『니체와 철학』, 313) 그들의 신체성, 즉 짐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계산으로 스스로 지는 짐은 ‘낙타의 등’과 상호 연동된다. ‘낙타의 등’을 변용시키지 않고 낙타의 현실인 사막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낙타는 등에 진 짐의 무게를 현실로 느끼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낙타가 말하는 ‘긍정’이다. 낙타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낙타는 ‘허무주의 자체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른다.’(같은 책, 315)는 점이다. 그것은 허무주의의 모든 산물을 끌어모으고, 그것들을 사막에서 짊어진다. 사자의 정신을 투사하면서 낙타를 불쌍히 여겼던 나는 지는 짐의 성질만 달랐을 뿐, 그것이 ‘진리’의 길일지라도 ‘허무주의의 산물’로서의 짐이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낙타의 현실 ‘긍정’을 반대하면서 ‘부정’을 외치는 것이 그 사막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딜 가나 짐의 무게를 다는 ‘낙타의 등’이라는 신체성을 변용하지 않는 한 현실은 늘 사막이다.

 



 

Ⅲ. 심연과 마주한 사유의 길

사막에는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빛난다’며 거들먹거리는 용이 있다. 그러니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현실을 살아간다. 하나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없다. 하지만 용은 ‘이것이 현실’이라며 낙타를 한 줄로 세우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걷게 한다. 낙타는 끝없이 사막을 돌면서 ‘단념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생존의 목줄을 잡고 이끄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낙타를 고개 들게 하는 사자의 정신이 어디서 오는지 묻는다.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의 무게, 내가 걷고 있는 이 사막의 황량함과 뜨거움은 필연인가?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암담하고도 끔찍한 이 의문부호,’(『우상의 황혼』, 서문) 왜? 왜? 왜? 솟구치는 이 “왜?”의 정신, 사자의 정신은 어디서 오는가.

동생의 뇌출혈은 짐 지려는 낙타의 정신을 화들짝 깨게 만든 사건이었다. 나는 동생의 뇌출혈을 정상성에 지나치게 자신을 맞추려고 자신을 억압한, 즉 지나치게 짐을 잘 지고 많이 지려던 낙타의 등이 터진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심연과의 마주침, 우연의 도래, 그 자체엔 어떤 주어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마주침을 어떤 힘과 연결시키는가에 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그 폐허에서 어떤 사람은 이런 신체의 신호를 다시 정상성으로 ‘잘’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역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 건강이 최고야. 보험을 더 꼼꼼히 챙기고 건강식품을 더 많이 먹고 ‘병’에 대비하기 위해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혹여 한 번의 기침이라도 새어나올까 전전긍긍한다. 쓰러지기 전보다 더 두려워하고 공경하고 단념하는 낙타가 되어 새로운 짐을 진다. 잠시 죽은 척 누워있던 용이 새로운 가면을 쓰고 더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그에게 명령한다. “건강이 최고다!” 

니체는 광대가 줄을 타는 것이 천직이듯 인간의 천직이 ‘심연 위의 밧줄’을 건너는 일이라고 한다. 곱씹을수록 와닿는 말이다. 정말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심연을 품고 산다. 그런데도우리는 잘 닦인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길이 어디 있겠나. 심연의 광풍이 그를 흔드는 의미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보면 그것은 아무나 맞을 수 없는 ‘행운’이다. 낙타의 고개를 들게 하는 순간,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은 우연의 산물이다. 모든 관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이 한 번의 우연을 들뢰즈는 ‘사건’이라 부른다. 사건은 겪기 전과 겪은 후의 신체성을 바꿔놓는다.

“우리는 일상적 기호의 코드에 비한다면 불연속적 상태들의 연속에 불과하고, 이 연속에 대해 언어의 불변성은 우리를 속인다. 우리가 이 코드에 의존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속성을 고안하지만, 우리는 사실상 불연속적인 것으로 살아갈 뿐이다.”(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67)

도대체 우리에게 아프지 않는 순간이 있기나 한 걸까? 아프지 않은 ‘건강체’라는 것은 환상이다. 신체는 매 순간 진동하고 있다. 생성 그 자체가 차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는 이미 고통이다. 그러나 낙타의 정신, 상황 종속적인 정신은 ‘내가 나’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자신만의 ‘건강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매달린다. 그 건강체의 다른 이름은 ‘존재, 지속, 단일성, 영원, 목표..’이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심연의 체험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재포장해 그 체험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 펠릭스 가타리는 그러한 ‘정상성에 대한 집착 자체가 병’이고 그 병명을 ‘정상병’이라 규정하고 메이저리티의 불치병이라 덧붙였다. 우리는 얼마나 정상성에 들기 위해 눈치를 보는가. 시대의 유행인 미모에 들기 위해, 비유가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환청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고무줄 같은 ‘이 정도’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횡포에 갈갈이 찢긴다. 동생도 나도 그런 ‘정상병’을 앓으면서도 ‘문제없는 삶, 우환 없는 삶, 정상적인 삶’을 향해 주야로 달리며 환상을 쫓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동생의 뇌출혈은 차라리 ‘행운’이 아닐까. 아니, 단적으로 행운이다! 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니체에게 있어 건강은 ‘병’의 반대말이 아니다. 단지 특정한 상태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건강인 것도 아니다. 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이란 병과 치유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는 힘이다. 클로소프스키가 니체의 두통을 해석한 것처럼 병은 신체적 차원의 신호, 기호다. 니체는 병을 약과 병원에 의존해 ‘치료’하고 ‘고치고’ 없애려 하지 않았다. 병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다. 니체는 병과 고통을 하나의 신호로 활용했고 그 신호의 발생적 조건을 부단히 탐구했다. 니체의 저작 전체는 바로 그 신호의 발생적 조건을 탐사한 결과물이 아닐까.

 

동생은 며칠 후면 일반병실로 내려오게 된다. 어제 처음으로 병원에서 동생의 상태를 영상통화로 보여줬다고 한다. 조카는 “아빠 얼굴을 보자마자 누나랑 저랑 엄마랑 셋이서 병원 복도에서 눈물바다 됐어요.”라며 긴 카톡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나도 울었다. 동생이 서서히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 전과 같지 않은 몸으로. 심연의 광풍에 휘말려 그는 난파했다. 난파를 겪은 그는 변신했다. 정상성의 규준에 미달되는 몸으로 그는 어떻게 무리의 삶으로 돌아올 것인가. 아마 그는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새긴 신체의 기억으로부터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겪었던 변신은 어쩌면 동생이 사고로 겪은 신체 마비와 같은 ‘쓸모없게 된 신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정상성에서 벗어난 신체는 무리의 삶으로부터 가차 없이 배제당한다. 그 무리가 가족일지라도. 어쩌면 가족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그의 정상성의 회복을 재촉하는 가장 잔인한 집단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병 없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덕의 발전을 위해 병이 없어도 될 것인가, 인식과 자기 인식을 향한 우리의 갈증은 건강한 영혼만큼이나 병든 영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중요한 물음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즐거운 학문』, 195)

나는 심연을 마주하는 순간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의식의 이중성 중에 자유정신으로서의 의식은 마주치는 세계를 해석하는 의지로서 부단히 심연의 가장자리까지 신체를 몰아갈 수 있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그 고통이 바로 심연과 의식의 경계에서 새어나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니체는 심연의 마주침 없이 발생하는 사유란 없다고 말한다. 사유란 단순히 의식을 이용한 ‘생각’이 아니라는 의미다. 들뢰즈가 ‘사유하는 것은 어떤 능력의 자연적인 발휘가 결코 아니라’(『니체와 철학』, 195)고 했을 때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된다. 우리의 오만가지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다. 상황에 반응해 그동안 자신만의 습속의 길을 따라 신체에 새긴 정보들을 리플레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생각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는 좀 과장해 말하면 ‘좀비’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불교에서는 이런 현존을 ‘갈애渴愛’의 존재라고 한다. 바닷물을 퍼마시면서 목마름의 고통을 달래려고 하는 존재. 자칫 이를 욕망 자체를 없애라는 의미로 읽으면 곤란하다. 오히려 욕망에 허덕이는 현존을 직시하고 그 길들여진 욕망을 구부리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이 욕망을 구부리는 훈련으로서의 사유, 나에게 공부란 이런 의미다.

하지만 니체의 사유는 더 먼 곳까지 뻗어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니체는 인간 자체를 ‘하나의 불구’로 사유했을지도 모른다. 니체가 ‘곱사등이에게서 그의 혹을 떼어낸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서 넋을 빼앗는 것’(『차라투스트라』, 233)이라 했을 때 그 의미를 어디까지 해석할 수 있을까. ‘곱사등이의 세계는 그의 신체성이 빚어낸 결과다, 만약 그의 굽은 등을 외부의 어떤 힘이 펴준다고 그는 구원을 얻을까, 그는 자신의 세계를 뺏길 것이다.’ 환원하면 ‘인간의 세계, 즉 오만가지 고통이 들끓고 있는 이 세계는 인간이라는 신체성의 산물이다. 이 오만가지 고통을 제거해준다고 해서 인간은 구원을 얻을까?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 자신의 신체성을 넘어서지 않는 한 요원하다.’ 인간이라는 이 신체성이 지고 가는 짐이란 뭘까. 니체가 말한 원한은 결국 인간이라는 신체성으로 말미암은 짐이고 인간은 그 짐을 지면서 거듭 인간을 되풀이한다. 작은 돛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로 나선 느낌이다. 
전체 8

  • 2021-01-07 22:27
    와우! 글의 펼침이 광범위하다! 우선 그런 생각이 제게 들었습니다. 그 끝없이 펼쳐질것 같던 글을 다 읽고나니 한권의 책을 읽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난희샘의 글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동생분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 2021-01-08 16:30
      미현쌤
      감사드려요. 쌤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요. 지치지 않고 공부의 길을 가는데 도반의 응원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쌤을 응원합니다

  • 2021-01-08 22:24
    샘이 그간 니채의 말들과 들뢰즈의 말들, 채운샘의 강의와 동료들의 코멘트나 글 등등을 몸에 새기고 계셨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샘께서 니체는 너무 투쟁적이고 젊은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나이 들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동양철학이나 불교가 더 맞는 것 같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본인의 말씀을 멋지게 글로 반박해주셨네요ㅎㅎ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삶을 긍정하는 사유와 사유를 긍정하는 삶(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는데 샘이 그 예시를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1-01-10 23:35
      니체를 만나면서 저항하고 아픈 와중에 몸에 새겨진 그 많은 언어들 중에 '청년, 니체를 만나다'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 글에 건화샘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는 것이 느껴지실 거예요. 정말 힘을 많이 받았습니다. 건화쌤한테서.

  • 2021-01-10 23:30
    경황이 없는 중이라 에세이를 쓰시는 것이 쉽지 않았을 난희샘을 생각해보면 마지막 문장처럼 작은 돛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나서는 마음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울증에서 신체성까지에 이르는, 난희샘이 숙고하며 썼을 텍스트를 읽으며 몇몇가지의 상념에 젖어볼 수 있었습니다. ^

  • 2021-01-10 23:43
    경황이 정말 없었던 것 같아요. 지나고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면 ... 그 경황없음에 휘말려 어떻게 되었을지요. 할 게 있다는 것, 그것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게 작은 돛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2021-01-11 21:27
    몇 번이나 읽으면서 되새겼습니다...! 난희쌤의 공부가 보이는 글이었네요. 자기극복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 2021-01-12 12:14
      규창쌤~
      감사드려요. 쌤이 쓰신 글들을 스크랩해놓고 저도 읽고 힘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