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주역과 노자 14장 ~ 20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5-29 21:23
조회
275
이사하고 첫 시간이었는데, 새 공간은 어떠셨나요? 저번 주에 짐 꾸러미 사이에서 강의한 것을 떠올려보면 엄청 달라지지 않았나요. ㅋㅋㅋ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4.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것의 이름을 이(夷)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의 이름을 희(希)라 하고, 잡으려 해도 느끼지 못하는 것의 이름을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끝까지 따져 물을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서로 뒤섞이고 하나로 된 것이다.

이 구절은 도(道)에 대해 묘사한 것입니다. 도는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을 ‘이’로, ‘희’로, ‘미’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노자를 읽다보면 도를 도라고 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언어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노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실체를 상정하지 않으려 해도 특정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인간은 그걸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노자가 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은 도가 하나의 이미지나 의미로 규정되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는 치힐(致詰), 끝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고, 혼(混),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균질하게 섞여있다고 한 것입니다.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그 위는 밝지 않고, 밑이라고 어둡지 않으며, 무엇인가 끊임없이 이어져있지만 이름할 수 없고, 다시 형체가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니,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것의 형태이며, 사물이 형태를 갖기 이전의 형상이다. 이를 두고, 황홀(恍惚)이라고 한다.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가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위라고 밝지 않고, 밑이라고 어둡지 않다는 것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있는 도의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6장에 나온 것처럼(綿綿若存) 뭔가가 실처럼 가늘게 이어져있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다음 復은 다시 ‘부’로 읽는데, 도는 우리가 분별하고 지각할 수 있는 다른 사물들과 다르게 ‘무물’, 즉 분별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우쌤은 상(狀)과 상(象)을 구별해주셨는데, 상(狀)은 구체적인 모양이 있는 것을 말하고, 상(象)은 어떤 것의 그림자 혹은 그것의 복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無)는 없음, 비어있음보다는 알 수 없음이라는 뜻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도는 구체적인 모양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거기에는 모양이란 것이 있고, 지각 가능한 사물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의 그림자(象)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황홀(恍惚)도 주석마다 하나씩 글자를 해석하는 것도 있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공통된 것은 알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이 글자가 뜻하는 것은 불가지(不可知)와 불가명(不可名)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fantastic이라고 합니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옛날의 도를 잡아, 지금 있는 것을 다스리니, 능히 옛 시작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도기(道紀)라고 한다.

우쌤은 집고지도(執古之道)의 주어가 생략됐다고 하셨는데, 이건 성인(聖人)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자의 글쓰기 방식을 보면, 도를 설명하는 동시에 도를 따르는 성인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문장도 그런 방식이 사용된 것입니다.

도가 옛날부터 있다는 것은 천지가 있기 이전부터 도는 계속 운동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록 옛날과 지금이 많이 다르더라도 도를 따르는 것을 통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쌤은 여기서 어(御)라는 글자에 주목하셨는데, 이것은 ‘말을 모는 것’말고도 ‘다스린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단군신화를 보면 어국(御國)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가장 다스려지는 정치형태인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도를 따름으로써 치세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기(道紀)에서 기(紀)는 제왕들을 담아낸 본기(本紀)의 ‘기’입니다. 우쌤은 ‘기’라는 글자는 척추를 세울 때 사용된다고 하셨는데, 예전부터 지금까지 중요하게 세상을 작동하는 규칙(紀)이 바로 ‘도’입니다.

15.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옛날에 도를 잘 행한 사람은, 미묘하게 현통하여, 깊이를 알 수 없다.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따라서 억지로 그것을 표현해보겠다.

사(士)는 판본에 따라서 도(道)로 쓰여있다고 합니다. 도가 인식을 벗어난 것처럼, 도를 따르는 사람 역시 그 모습이 도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를 형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죠. ‘억지로 표현하겠다’라고 한 것도 아마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마치 살언 겨울강을 건너는 듯 망설이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신중하며, 손님처럼 엄숙하고, 얼음이 점점 녹듯 흩어지고, 통나무처럼 진실하며, 계곡 같이 텅 비어 있으며, 혼탁한 것처럼 섞여있다. 누가 능히 탁함을 고요함으로써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편안함을 움직임으로써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예(豫)에는 ‘미리’, ‘예상’말고도 ‘망설이다’란 뜻이 있습니다. 유(猶)는 판본에 따라서 여(與)로 쓰여있기도 한데 여기서는 ‘조심하다’, ‘신중하다’라는 뜻입니다. 용(容)은 많은 판본에서 객(客)으로 돼있는데, 왕필도 ‘손님’이란 뜻으로 풀었습니다. 환(渙)은 물이 점점 녹아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돈(敦)은 사람의 진실됨이 두텁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숙능(孰能)과 서(徐)가 반복되는데, ‘숙능’은 ‘누가 능히~하겠는가?’라는 뜻이고 ‘서’는 ‘잘 살피고 신중하다’라는 뜻입니다.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맨 앞에 나온 옛날 도를 잘 행한 사람의 핵심은 ‘서’입니다. 그는 이런 태도로 다스리기 때문에 혼탁한 것도 맑아지게 하고 사물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이 도(道)를 보존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고자 하지 않는다. 채우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덮어둘 뿐(오래 됐어도) 새로 만들지 않는다.

폐(蔽)는 ‘뚜껑을 덮다’말고도 ‘오래된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도는 예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계속 운동하기 때문에 새로이 다른 것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16.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것을 돈독히 하여, 만물이 아울러 자라나고, 나는 돌아감을 본다. 만물은 많고 많지만, 각각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

치허(致虛)를 끝까지 하고, 수정(守靜)을 돈독히 하라는 것은 이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자라나고 자신을 자라나게 한 그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장소멸의 과정을 뜻합니다.

復 이 글자는 돌아갈 ‘복’자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부’로 읽을 것인지는 앞, 뒤 의미를 생각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한자는 이래서 참 어려워요. ‘복’이나 ‘부’로 읽는 것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니.... 여기서는 ‘부’자로 읽었습니다. 부귀어근(復歸其根)을 줄여서 귀근(歸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귀(歸) 대신에 복(復)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귀근’이라고 하고 복근(復根)이라고도 합니다.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 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뿌리로 돌아가면 고요해지고,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한다고 한다. 명을 회복하면 항상되고, 항상됨을 알면 밝아진다. 항상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일을 저지르게 되니, 명대로 못 살고 죽게 된다. 항상됨을 알면 포통(包通)하게 되고, 포통하게 되면 탕연(蕩然)히 공평하게 되고, ‘탕연’히 공평하게 되면 미치지 않는 바가 없게 되고, 미치지 않는 바가 없게 되면 하늘처럼 불인(不仁)하게 되고, ‘하늘’처럼 불인하게 되면 도에 부합할 수 있고, 도에 부합할 수 있으면 장구할 수 있다. 그러니 내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귀근(歸根)부터 복명(復命), 상(常), 명(明) 등등 중요한 단어들이 수두룩벅벅 나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명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명을 회복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고 태어난 이 형체가 영원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상(常)을 아는 것이고, 그러면 밝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상’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것을 흉(凶)하다고 합니다. 우쌤은 이것을 두고 이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이 받은 명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주석에서는 용(容)을 포통(包通)이라 했고, 공(公)은 탕연(蕩然)이라고 했고, 왕(王)은 전(全)이라고 했습니다. ‘상’을 안다는 것은 이치를 깨우친 것이니 그렇게 되면 포용하고 통하지 않는 바가 없게 됩니다. 우쌤은 ‘탕연’을 물이 확 끝없이 퍼져서 바다가 되었는데 그것이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탕연히 공평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공평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전’과도 연결되는데, 왕필은 ‘전’을 ‘두루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天)은 하늘보다는 자연이라는 뜻이 더 알맞습니다. 앞에 5장에서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지불인’은 또한 도(道)의 작용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상’을 안다는 것은 ‘도’의 작용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자신에게 주어진 명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게 되니 내 몸이 흩어지는 것조차 자연의 이치임을 알아 근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

太上, 下知有之 ; 其次, 親而譽之 ; 其次, 畏之 ; 其次, 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최고의 정치(혹은 왕)는 백성들이 왕이 있다는 사실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왕을 친근하게 대하고, 기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왕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왕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통치자의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이 불신이 있게 된다. 유원(悠遠)하니 법령을 함부로 시행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 계획한 것이 되는 것을 백성들은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앞에 나온 태상(太上)과 그 다음 나오는 3번의 기차(其次)는 정치의 형태를 4단계로 풀어낸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왕이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인데, 다르게 말하면 왕이 있는 것 빼고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뜻합니다. 그 다음은 무위(無爲)는 아니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仁義)와 같은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백성들과 친근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힘으로 백성들을 억눌러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왕이 무엇을 해도 백성들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쌤은 지금이야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대통령을 결정하지만, 고대 동양에서는 반대로 왕의 수준이 백성들의 수준 혹은 삶을 결정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흔히 군주를 바람, 백성을 풀에 빗대어 많이 표현한다고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왕의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이 불신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혜기귀언(悠兮其貴言)은 ‘무위지치’의 통치자를 형용한 것인데, 중용에서는 유(悠) 다음에 원(遠)이 붙는다고 합니다. 통치자의 마음이 안달복달하지 않고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言)은 법령,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백성의 삶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貴)는 귀하게 여긴다는 것보다는 아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인은 함부로 백성들에게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무위(無爲)로 일에 거하고, 말없는 가르침으로 행하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따라서 일이 잘 진행돼도 백성들이 그렇게 되는 원인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왕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원래부터 혹은 자신들 덕분에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8.

大道廢, 有仁義. 智慧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대도(大道)가 없어지고 난 뒤에, 인의가 있게 되고, 지혜가 나타난 뒤에, 큰 거짓도 있게 됐다. 가정이 화목하지 않게 된 뒤에, 효(孝)와 자(慈)가 있게 되고, 국가에 혼란이 있고나서, 충신이 있게 된다.

도가 폐했다는 것은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지(智)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 앎을 뜻합니다. 18장은 어떻게 보면 간단명료하지만 그 안에는 유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들어있습니다. 도가 없어지고 난 뒤에 따라야 할 가치들이 생겼다는 노자의 주장이 그럴 듯합니다. 왜냐하면 효자와 영웅 같은 인물들이 돋보이는 것은 대부분 그 가치가 실현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가치들은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19장.

絶聖棄智, 民利百倍 ; 絶仁棄義, 民復孝慈 ;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 以爲文不足 ;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의식을 끊고 이기적 앎을 버리면, 백성은 백 배로 이롭게 되고,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들은 다시 효(孝)스럽고 자애로워지고, 교묘한 기술을 끊고 사리사욕을 버리면, 도적이 생기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제도로 삼기에는 부족하므로, 따라서 지금 사람들이 속하는 바가 있어야 하니, 가지고 태어난 바탕을 드러내고 진솔함을 지키고,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죽여야 한다.

19장은 구조가 재밌습니다. 여기서는 절(絶)과 기(棄)가 반복되는데, 전체적인 구조는 ‘‘절’해야 ‘기’할 수 있다’입니다. 이것을 17장처럼 정치 수준을 3단계로 나눈 것으로 보거나 혹은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야 할 과정으로 보거나 신분에 따라서 해야 할 지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8장에서는 효(孝)와 자(慈)가 폐단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처럼 얘기돼서 노자는 ‘효’와 ‘자’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이 ‘효’와 ‘자’를 회복한다는 구절을 보면 노자는 따라야 할 가치를 제시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뿐인 것 같습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 안에는 유가가 따라야 할 가치가 잠재되어 있는데, 다만 그것을 발현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자는 욕망을 끊어내면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이 회복된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문(文)은 두 가지로 나눠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 쓴 것처럼 ‘제도’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꾸미다’로 보는 것입니다. ‘제도’로 해석하면 ‘제도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혹은 ‘제도로 삼았지만 부족하다’가 되고, ‘꾸미다’로 보면 ‘부족한 것을 꾸며준다’가 됩니다.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공손히 대답하는 것(唯)과 성의 없이 대답하는 것(阿)의 차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선과 악의 차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가. 아득하구나, 그 다하지 못함이여!

유(唯)는 ‘오직’이나 ‘비록’이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공손히 대답하는 말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아(阿) 역시 대답하는 말로 사용됐는데 다만 ‘유’에 비해서 성의 없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유’라고 대답하건 ‘아’라고 대답하건 중요한 건 그러한 차이를 따지는 학(學)으로부터 인간의 근심이 시작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근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배움을 끊어내야 한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48장을 참고해서 보면, 거기에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고, 도에 부합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낸다는 것이죠. 배워서 날마다 더해지는 것은 대답하는 것이나 선과 악의 차이를 따지는 분별심일 것 같습니다. 반대로 도를 통해서 날마다 덜어낸다는 것은 분별력을 버리고 19장에 나온 소박한 삶을 지키는 것일 것 같습니다.

우쌤은 인지소외(人之所畏), 불가불외(不可不畏) 이 구절을 두고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1973년에 출토된 백서본을 참고하면 역불가이불외인(亦不可以不畏人)으로 돼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면, 임금이 백성들의 두려워하는 바인 것처럼 임금 역시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구두점을 느낌표! 아니면 물음표? 둘 중 어느 것으로 하는 가에 따라서 의미가 바뀌기 때문에 깨끗하게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사람들은 웃고 떠들어, 마치 큰 잔치를 즐기는 듯하고, 봄의 누각에 오른 듯하다. 나 홀로 움직일 어떤 조짐도 없이 담담하니, 마치 어린아이가 웃을 줄 모르는 것 같고, 고단하고 고단하구나.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나 홀로 버림받은 것 같으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구나!

뢰(牢)는 제사에 쓰일 짐승을 가두는 울타리라는 뜻입니다. 이 글자는 짐승을 사용해서 지내는 제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태뢰(太牢)는 소, 양,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큰 제사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성인의 고독함(?)이 나옵니다. 루루(儽儽)는 ‘고단하다’는 뜻이고, 무소귀(無所歸)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쌤은 성인이 정말 돌아갈 곳이 없어서 힘들다는 것보다는 내가 편히 마음 놓일 곳이 없어서 힘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뒤에 나오는 자기 혼자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 역시 비슷한 내용입니다.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내 마음이) 구별이 안 되는구나, 사람들은 밝지만, 나 홀로 어두운 것 같고, 사람들은 잇속에 빠르지만, 나 홀로 사리분별에 둔하구나. 바다와 같이 맑고, 세속의 인의에 얽매이지 않으니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람들은 모두 배운 바를 쓰는데, 나 홀로 완고하니 비루한 듯하니, 나 홀로 사람들과 다르고, 만물의 위대한 어머니인 도(道)를 귀히 여긴다.

우쌤이 20장이 골칫거리라고 하신 것은 ‘불가불외’ 말고도 하나로 꿰기 어려운 성인의 마음 때문입니다. 분명 앞 구절에서는 세상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해서 슬퍼하는 마음이었는데, 이 구절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소(昭昭)는 ‘밝다’는 뜻인데, 선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고, 혼혼(昏昏)은 반대로 그런 기준 자체가 없는 성인의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찰찰(察察)은 자기 잇속을 계산하는 것이 빠른 것을 나타낸 것이고, 민민(悶悶)은 사리분별에 어두워서 마치 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모습이 마치 바다처럼 맑고, 료(飂),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인데 인의를 비롯하여 어떤 세속적 가치에도 얽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식모(食母)는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도(道)를 형용한 것입니다. 자신은 사람들과 다르게 ‘도’를 귀히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과 자신을 구별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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