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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2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6-02 12:26
조회
243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성의 역사』의 1권인 「앎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샘은 『성의 역사』가 제목이 주는 기대(?)를 깨는 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의 역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시리즈의 1권 제목이 「앎의 의지」인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죠. 『성의 역사』는 인간의 성sex과 성행동sexuality이 변천 진화해온 과정 따위를 다룬 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푸코의 관심은 여전히 ‘권력’에 있었습니다. 채운샘이 와타나베 모리아키를 인용하며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앎의 의지」에서 푸코는 ‘이미 주어진 실체로서의 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성’과 그것을 출현시킨 ‘앎의 의지’를 다룹니다.

「앎의 의지」는 “‘성sexuality의 역사’에 대한 푸코의 기본적 시각과 대상 및 방법”을 고찰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푸코는 성이 특정한 ‘앎의 대상’으로 출현하게 되는 과정에 주목하는데요, 여기에는 어떤 대상과 그 대상을 출현시키는 ‘담론적/비담론적 실천’을 동시적으로 사유하는 푸코의 관점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기본적인 관점은 모든 대상은 그 대상을 앎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담론적/비담론적 실천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성이라는 실체적 대상이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담론들이 점차 발전해왔다는 식의 상식적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담론을 통해 성을 새롭게 문제화할 때, 성은 새롭게 출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과 더불어 출현합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모든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에게 달려있다는 식의 주장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푸코가 그러한 주장을 하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어떤 대상이 앎의 영역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영역이 교차하며 연동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비정상성’의 출현은 정신의학과 사법영역의 교차, 그리고 부르주아의 계급적 정체성 형성의 문제 등이 동시에 작동함으로 인해 가능해졌었죠. 푸코가 바라보는 역사는 어떤 단일한 기원에 의한 투명한 인과가 아니라, 상이한 영역들을 교차시키고 새로운 배치가 형성되게 하는 우발적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푸코가 주목하는 갖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포착하여 앎의 영역에 출현시키려는 ‘앎의 의지’와 이러한 실천들을 가로지르며 작동하는 권력, 그리고 “‘앎의 의지’를 자극하고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권력’이 발명하는 ‘구조=장치dispositif’”(와타나베 모리아키)입니다. 그러한 틀로 ‘성’에 눈길을 주게 되면, 가장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억압’이라는 관념입니다. 흔히 ‘성이 억압됐다’고 말하곤 하죠. 우리는 ‘억압-해방’의 구도로 모든 것을 보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억압과 배제는 항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무언가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동안에도, 그러한 억압과 배제를 통해서조차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성의 억압 또는 해방을 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어떤 주어진 것으로서의 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성이 자명한 실체가 아니라고 할 때 성의 억압과 해방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억압’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권력을 ‘사유’할 수 없습니다. 권력을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억압-해방’의 구도에서 벗어나 ‘사유’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을 억압으로 볼 때 우리는 자유를 억압으로부터 풀려남이나 결여의 충족, 잃어버린 것의 회복 등과 같은 수동적인 이미지로밖에는 구성할 수 없습니다. 권력을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성과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능동적 사유가 가능해지겠죠.

푸코는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억압은 정말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푸코는 ‘도덕적 엄숙주의’의 대명사인 빅토리아 시대로 되돌아갑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 사이의 유럽에서 성은 금기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하는 음담패설은 자연스러웠고, 아이들을 성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아이들의 성을 관리해야 한다는 식의 담론은 없었습니다. 니체는 신비화된 모든 것에 수치심이 깃든다고 했는데, 이당시의 성은 신비한 것도 수치스러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빅토리아 시대가 되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의 음담패설은 사라지고, 일상에서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시대에 와서 성은 억압되기 시작한 것일까요?

푸코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 익명으로 씌어진 『나의 비밀스러운 삶』이라는 ‘추잡스러운 문학’에 관심을 갖습니다. 다만 푸코는 이것을 빅토리아 왕조의 억눌린 욕망의 표출 따위로 바라보고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17세기의 교서로부터 문학, 특히 ‘추잡스러운’ 문학에서 섹스의 투영인 것까지 곧장 이어지는 선이 그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13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고해성사는 16세기에 이르면 ‘모든 것을 말하라’는 명령과 함께 ‘진실’을 생산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푸코는 『나의 비밀스러운 삶』의 저자로부터 시대의 엄숙주의로부터 용감하게 탈주한 사람이 아니라, “섹스에 관해 말하라는 수세기에 걸친 명령을 가장 직접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가장 순진하게 실천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이 저자와 그의 책은 반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빅토리아적인 것이라는 거죠.

푸코가 주목하는 또 다른 사례는 비슷한 시기 프랑스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사소한 성범죄입니다. 1867년, 프랑스의 랍쿠르라는 마을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살아가던 ‘다소 정신이 박약한’ 남자가 고발당합니다. 그는 마을의 장난꾸러기들이 하는 대로 밭가에서 여자아이로부터 약간의 애무를 받았는데, 이 공공연한 장난이 어느 순간 ‘범죄’로 출현한 것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이야기의 사소함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요체입니다.

“이 이야기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의 사소한 성격이고, 마을의 성과 관련된 그 일상적 사건, 덤불 속에서의 그 하찮은 희열이 어느 순간부터는 집단적 불관용뿐만 아니라 사법적 소송, 의학의 개입, 주의 깊은 임상적 검사, 거창한 이론구축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농촌생활의 구성요소인 그러한 인물을 대상으로 두개골의 크기를 재고 얼굴의 골격을 조사하며 해부학적 특징을 검사하여 성적 타락의 있음직한 징후를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 그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는 것 (…) 그를 의학과 앎의 순수한 대상, 이를테면 죽을 때까지 마레빌 병원에 감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세한 분석에 의해 학계에 알려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두 사례로부터 이끌어내는 푸코의 결론은 “섹스는 어쨌든 말해야 할, 어떤 구속력을 갖는 담론의 장치에 따라 철저히 말해져야 하는 것이 되었다”(채운샘)는 것입니다. 성은 결코 무의식으로 밀려나거나 억눌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상의 영역에서 성이 밀려나고 도덕적 엄숙주의로 인해 억눌리는 것조차 성이 담론화되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이 억압됐다고 믿지만, 실은 전에 없이 많이 성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은밀한 동시에 공공연하게. 식탁에 둘러앉아 주고받는 음담패설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우리는 의사나 정신분석가 앞에서 우리의 성에 대해 낱낱이 고백합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성으로 영속적 담론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특이한 절대적 요청에서 섹스에 관한 담론을 부추기고 도출하며 정돈할 뿐만 아니라 제도화하는 경제학, 교육학, 의학, 사법영역의 다양한 메커니즘까지, 우리의 문명이 요구하고 조직화한 것은 바로 엄청나게 많은 말이다.”

성이 앎의 영역에서 사법적 ‧ 의학적으로 촘촘하게 담론화될수록, 엄숙한 담론이 우리의 일상의 영역을 뒤덮을수록, 성이 대상화될수록 각자의 성의 윤리를 고민하는 힘은 축소되어갑니다. 권력에 의해 더욱 촘촘하게 성적 주체로 생산될수록 우리는 자신의 성에 대해서 수동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성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해야 한다’며 성을 가십화하는 예능들이 출현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성에 대해 정말로 고민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에 대한 분석적 담론에 의해서 ‘아이’, ‘어머니’, ‘노인’, ‘동성애자’ 등으로 세밀하게 주체화될 뿐,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주체화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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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4 10:44
    나는 두어 달에 한번 쓰는 후기도 머리카락을 한 주먹쯤 뜯어내야 겨우 쓰는디... 우리 거놔는 타고났어!! 어뜨케 이 후기를 매주 이르케 잘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까!! 나는 윤회 믿어. 전생부터 쌓아온 내공일게야^^ 젊은 이 청년이 한없이 부러운 일인 씀. ^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