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주역과 노자 21장 ~ 28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6-05 22:52
조회
227
안녕하세요. 우쌤은 시작하기에 앞서서 ‘오늘 35장까지 할거에요.’ 라고 포부를 밝히셨습니다. 하지만 매 장마다 재미있게 풀어주시다보니 간신히 28장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 순전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느려도 꼼꼼히 풀어주시는 게 더 좋아요~ 물론 쌤에게는 고민이시겠지만 ㅎㅎ;;

21장.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비어있는 덕의 작용은 오직 도를 따른다. 도의 작용됨은 오직 황(恍)하고 홀(惚)할 뿐이다.

다른 판본에서는 공(孔)을 대(大)로 보지만, 왕필은 이를 비어있음이라는 의미에서 공(空)으로 본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그 안이 비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푼 것이죠.

우쌤은 여기서 도와 덕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도는 작용하고 덕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도의 작용은 황홀(恍惚)하다고 합니다. 저는 『도덕경』을 보기 전까지 이 글자는 뭔가 야릇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분명 있긴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각할 수 없는 도를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홀(惚)하고 황(恍)하니, 그 가운데에 상(象)이 있고, 황(恍)하고 홀(惚)하니 그 가운데에 사물이 있다. 요(窈)하고 명(冥)하니, 그 가운데에 정(精)이 있다. 그 정(精)이 매우 참되어(혹은 명(冥)하고 요(窈)하니), 그 가운데에 편안함이 있다.

상(象)은 아직 구체화된 형상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물(物)은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드러난 구체적인 것입니다. 도의 작용은 황홀해서 볼 수는 없지만, ‘상’과 ‘물’이 반복되는 것을 통해서 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窈)는 그윽하다, 명(冥)은 어둡다는 뜻입니다. 우쌤은 이 글자를 바다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바다를 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데 그와 비슷하게  도 역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서 어둡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정(精)에는 3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만물을 움직이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함(眞)이고, 마지막은 생명력입니다. 영어권에서 정(精)을 Essence로 번역하는데 그건 마지막 해석을 따른 것입니다.

그 다음 기정심진, 기중유신(其精甚眞, 其中有信.)을 다른 판본에서는 명혜요혜, 기중유신(冥兮窈兮, 其中有信)으로 돼있다고 합니다. 명혜요혜로 보는 게 더 문장이 멋있는 것 같지만 왕필의 해석도 멋있습니다.

신(信)은 믿음보다는 신험(神驗), 믿을 수 있는 증거로 봐야합니다. 주석에서는 ‘만물은 도의 본체(窈冥)으로 돌아가면, 참된 정(精)의 지극함을 얻으니, 만물의 본성이 안정된다’고 나와있습니다. 우쌤은 ‘신’을 도의 작용을 통해 만물이 얻을 수 있는 편안함 혹은 안정됨이라고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만물의 시작을 본다. 내가 어떻게 만물이 처음 가진 모습을 알 수 있겠는가? 도(道)로써 본다.

진고응은 자고급금(自古及今)을 자금급고(自今及古)로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으로부터 옛날에까지 이르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열(閱)은 두루 본다는 뜻이고, 중(衆)은 만물을 가리킵니다. 보(甫)에는 ‘아름답다’, ‘아버지’ 등의 다양한 뜻이 있는데 우쌤은 여기서는 ‘시작한다’로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시작하는 것을 두루 본다는 뜻이 됩니다.

22장.

曲則全, 枉則直 ; 窪則盈, 敝則新 ;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굽은 것은 가장 완전한 것이고, 구부린 것은 가장 곧은 것이다. 움푹해야 채워질 수 있고, 낡아야 새로워질 수 있다. 덜어내야 새로이 얻을 수 있고, 많을수록 뿌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도(道)를 안아 천하의 법칙으로 삼는다.

여기서 신경 써야할 것은 즉(則)자입니다. 이것을 ‘~하면 ~할 수 있다’(後)와 같은 식으로 보거나, ‘~은 ~이다.’(而) 등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쌤은 여기서 이(而)로 보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완전한 원은 구불구불한 것으로 보이고, 가장 곧은 것은 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죠.

우쌤은 소(少)와 다(多)를 나무의 비유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많다’는 것은 잔가지가 많아서 그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고, ‘적다’는 것은 뿌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또한 77장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는데, ‘적다’는 것은 ‘덜어낸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덜어내야 우주의 법칙에 의해(77장에 나온 활과 같은 우주) 채워질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많이 탐하면 미혹(惑)에 빠지는 것이므로 자기가 가야할 길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일(一)은 도(道)를 뜻하는데 도의 작용은 앞에 나온 3쌍(혹은 6개의 구)에서 얘기한 것들입니다. 포(抱)는 ‘안다’를 뜻합니다. ‘포’ 같은 경우에 다른 판본에서는 집(執)자로 쓰이기도 하는데 의미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 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빛나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으며, 스스로 뽐내지 않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혹은 장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천하에서도 능히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옛날에 이른바 굽은 것이 온전한 것이고, 구부린 것이 가장 곧은 것이라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참으로 온전히 하여 뿌리로 돌아간다.

부자현고명, 부자시고창, 부자벌고유공, 부자긍고장.(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이 구절은 세상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 성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 나온 내용을 받아 정리하는 부유(夫唯)용법이 또 나왔네요.

장(長)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우두머리’, 다른 하나는 ‘장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우쌤은 그 다음에 나오는 곡즉전자(曲則全者) 이 구절도 다양하게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곡즉전’일지 아니면, ‘곡즉전, 왕즉직’까지일지, 아니면 ‘곡즉전’부터 ‘다즉혹’까지일지는 명확하지가 않다고 합니다.

23장.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말이 적은 것이 자연이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오히려 오래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희언(希言)은 '말이 드물다'는 뜻입니다. 5장에 나온 다언삭궁(多言數窮)과 반대되는 뜻으로 백성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자랑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법령입니다. 뭘로 해석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표풍(飄風)은 ‘회오리바람’, 취우(驟雨)는 ‘갑자기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우쌤은 이것을 힘이 어딘가에 치우치는 자연적이지 않은 현상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연을 따르지 않아서 장구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정치인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 焉有不信焉.

따라서 도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와 같아지고, 덕에 종사하는 사람은 덕과 같아지고, 도와 덕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은 일을 잃는다. 도에 다가가는 사람은 도 또한 기꺼이 이루어주고, 덕에 다가가는 사람은 덕 또한 기꺼이 이루어주고, 도와 덕을 잃는 일에 다가가는 사람은 도와 덕을 잃어버리게 된다.(혹은 도와 덕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 덕 역시 그를 버린다.) 군주가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이 군주를 믿지 못하게 된다.

실(失)은 도와 덕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뒤에서는 ‘버려지다’는 뜻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락(樂)은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기꺼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동(同)은 ‘같아진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로 쓰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득(得)은 ‘얻는다’는 의미보다는 ‘이루어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신부족언, 유불신언(信不足, 焉有不信焉)은 17장에도 나왔던 것인데, 17장과 똑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쌤은 자연을 따르지 않는 군주는 또한 자연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인데, 이는 결국 백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 ;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발뒤꿈치로 서는 것은 오래 서있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하니,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뽐내는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도의 입장에서 말하면, 먹다 남은 음식이고 쓸데없는 짓거리다.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므로, 따라서 도를 따르는 사람은 이러한 행동에 처하지 않는다.

기(企)는 ‘발돋움하다’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기획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과(跨)는 ‘성큼성큼 걷는다’는 뜻입니다.

불립(不立)은 ‘오래 서있지 못한다’는 뜻이고, 비슷하게 불행(不行)은 ‘오래 걷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 ; 자벌자무공, 자긍자부장(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이 구절은 앞에 나온 22장의 부자현고명, 부자시고창, 부자벌고유공, 부자긍고장.(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우쌤은 아마도 죽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석과 원문이 뒤섞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을 원문으로 정하고 주석으로 정할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22장에는 고(故)가 들어갔으니 아마도 24장의 이 구절이 원문이고, 22장의 구절은 이것에 대한 주석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사(餘食)는 ‘잔반’이란 뜻이고, 췌행(贅行)은 ‘쓸데없는 짓거리’란 뜻입니다.

처하지 않는다(不處)는 것은 앞에서 비판한 자현(自見), 자시(自是), 자벌(自伐), 자긍(自矜)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廖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황(恍)하고 홀(惚)한 가운데]물이 있다는 것은 혼연(混然)으로부터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다. 적막하고 텅 비어있는 것 같으나, 어디에 의존하지 않아도 운동성을 유지하고, 두루 주행하여 미치지 않는바가 없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르지만, 자(字)를 붙여서 말하면 도(道)라 하고, 억지로 그 이름을 말하면 대(大)라고 한다.

유물(有物)은 21장에 나온 황하고 홀한 가운데 사물이 있다(恍兮惚兮, 其中有物)는 구절과 연결되고, 혼(混)은 14장에 나온 혼이위일(混而爲一)과 연결됩니다. 선천지생(先天地生)은 4장에서 나는 누구의 자식인지는 모르지만 상제보다 앞선 것 같다(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는 말과 연결됩니다.

적(寂)과 료(廖)는 모두 뚜렷한 형체가 없는 도(道)를 묘사한 것입니다.

독립(獨立)은 어디에도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운동하는 도(道)의 작용을 묘사한 것이고, 불개(不改)는 그 운동성은 변하지 않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됐음을 말합니다. 우쌤은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상(常)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태(殆)자는 다른 판본에서는 ‘다하다’는 뜻의 진(盡)자로 돼있기도 합니다.

자(字)를 붙여서 말한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시적이나마 이름을 붙여서 불러보겠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이름이 없다는 것(無名)이 이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커지면 나아가고, 나아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온다. 따라서 도가 위대하고, 하늘이 위대하고, 땅이 위대하고, 왕 또한 위대하다.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왕이 그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아 살고, 땅은 하늘을 본받아 살고, 하늘은 도를 본받아 살고, 도는 자연을 본받아 산다.

왈(曰)은 22장의 즉(則)과 같은 용례로 사용됐습니다.

우쌤은 두 문장에 있는 대(大)를 구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에 나온 대(大)는 도를 표현한 개념어고, 뒤에 나온 대(大)는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다른 판본에서는 왕(王)을 인(人)으로 고쳐서 읽는다고 합니다.

26장.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신중함은 경박함의 뿌리가 되고, 차분함은 조급함의 우두머리가 되니, 따라서 성인은 종일토록 언행을 행해도 무거운 짐수레에서(혹은 신중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집이 있어도, 평소에 초연함에 머무른다. 어찌 만승의 군주가 자신의 언행을 가볍게 하여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어버리고, 조급하면 중심을 잃어버린다.

중(重)은 ‘신중함’을, 경(輕)은 ‘경박함’이라는 뜻입니다. 정(靜)은 ‘차분함’을, 조(躁)는 ‘조급함’이라는 뜻입니다. 근(根)과 군(君)은 모두 ‘근본’을 뜻합니다. 주석에서는 '가지 않는 것이 가는 것을 부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부린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치중(輜重)은 ‘무거운 짐수레’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성인이 지니는 신중한 태도를 말합니다. 연(燕)은 ‘제비’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평소에’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27장.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걷기를 잘하는 이는 지나간 흔적이 없고, 말 잘하는 이는 말실수가 없고, 계산을 잘하는 이는 주책을 쓰지 않고, 가장 잘 닫힌 것은 빗장과 자물쇠가 없어도 열 수 없는 것이고, 가장 잘 묶인 것은 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는 것이다.

철적(轍迹)은 ‘바퀴자국’인데, 이것이 없다는 것은 과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적(瑕謫)은 말실수를 뜻하는데, 이것이 없다는 것은 침묵을 지킬 줄 안다는 것입니다. 주책(籌策)은 대나무로 만든 살가지인데, 계산할 때 쓰는 도구라고 합니다. 동양에서 계산은 병법과 관련되는데, 전술지도를 펴놓고 각각의 군대를 표시하는 것을 또한 주책이라고 합니다. 우쌤은 주책을 논다고 하는 것은 싸우기 전에 전술을 짜는 행위를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 常善救物, 故無棄物 ;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따라서 성인은 항상 남을 잘 도와주기 때문에, 버리는 사람이 없고, 항상 사물을 도와주기 때문에, 버리는 사물이 없으니, 이를 일러 습명(襲明)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 그 착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사랑하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크다해도 미혹되니, 이를 일러 요묘(要妙)라고 한다.

구(救)는 돕다는 의미의 조(助)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버리는 사람도 없고, 버리는 사물도 없다는 말을 다르게 풀면 곧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불인’은 도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습명(襲明) 또한 도의 작용을 다른 글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襲)에는 ‘계승하다’의 뜻과 ‘원인이다’(因)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해석에 따라서 ‘밝음을 이어받는다’ 혹은 ‘도의 작용이다’로 나뉠 수 있습니다.

자(資)는 ‘바탕’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자기와 같은 경지로 이끈다는 의미의 취(取)로 사용됐습니다. 선인이 불선인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를 이끌어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쌤은 또한 타자를 이끌어주지 않는 삶은 곧 도에서 멀어지는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불귀기사(不貴其師)에는 주어가 빠져있는데, 우쌤은 여기에 불선인(不善人)을 채워넣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미(迷)는 혹(惑)자와 같은 의미로 ‘미혹된다’는 뜻입니다.

우쌤은 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무기인, 무기물(無棄人, 無棄物)의 태도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두 글자로 정리하면 습명(襲明) 혹은 요묘(要妙)인데, 세상에는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8장.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남성다움을 알고, 여성다움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상덕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으니,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간다.

백을 알고, 흑을 지키면, 천하의 법칙이 된다. 천하의 법칙이 되면, 상덕에 어긋나지 않으니, 무극(無極)으로 되돌아간다.

영화로움을 알고, 욕됨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상덕이 이내 충족되니, 순박함으로 되돌아간다.

우쌤은 세 개의 문장이 글자들은 다르지만 구조나 의미를 해석했을 때 보면 큰 차이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두 개의 구의 구조를 ‘음을 알고, 양을 지키면’이라고 풀이하셨고, 그 뒤에 천하의 계곡(법칙)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반되는 두 개의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임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칙을 아는 성인은 자기 몸을 뒤로 해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서게 된다고 합니다.

樸散則爲器. 聖人用之則爲官長. 故大制不割.

순박함이 깨지면 그릇이 되니, 성인은 이를 이용해서 현실정치의 시스템을 만든다. 그러므로 크게 작용하는 것은 자르지 않는다.

관장(官長)은 현실정치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박(樸)이 흩어지는 것을 18장에 나온 것처럼 도가 사라진 다음에 인위적인 정치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왕필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통나무가 흩어져서 그릇이 되는 것처럼, 성인은 제도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해(不割), 도의 본체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쌤은 이 장을 무위정치가 일어나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제불해(大制不割)를 다르게 보면, ‘성인의 위대한 정치는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벌써 절반이 지났네요. 뒤에 가면 앞에 나온 내용들이 반복되겠지만 그래도 어떤 내용으로 풀어주실지 기대됩니다. 모두 토요일 저녁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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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5 23:32
    규창이 성불하시겠다.^^

  • 2017-06-07 10:27
    오오..완전 신속하고 정성이 가득 담긴 황홀한 후기이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