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colorcloud in Deusch(3) 쾰른을 떠나며...

작성자
채운
작성일
2020-01-05 06:04
조회
483
채운입니다.
모두들 새해에는 지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공부=지복인 거 아시죠?ㅋㅋ)
저는 독일에서 기해년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으로 가는 기차 안에 있습니다.
유럽이 하나는 하나더군요. 2시간 반이면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에 도착합니다.
뮌헨과 쾰른 말고는 일정을 확정하지 않았는데, 마음 가는 대로 다니다보니 암스테르담까지 왔네요.
목표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반고흐 미술관이었는데,
알고 보니 반 고흐 미술관은 일정 수만 예약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국립미술관만 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림 같은 풍경/사진만 봐서 그런가, 네델란드는 동화 속 나라일 것 같았는데, 그런 상상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두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이지만, 어쩌면 제가 본 게 거의 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풍경이 똑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가다 보면 운하, 가다 보면 다리, 그렇습니다. (위 사진에 있는 게 네델란드의 독특한 도개교입니다.)
한 가지 느낀 것은, 독일보다 훨씬 활기차달까...
나쁘게 표현하면 더 정신사납고, 좋게 표현하면 더 생기있고 북적대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뭐, 그닥 감흥이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어딜 가나 맥도날드, 스타벅스, 망고, 자라... 정말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렘브란트가 있고 베르메르가 있고 할스도 있지요.
(그림 얘기는 다음 기회에)
그런데 이런 것도 있더라구요.



 

흉상은 드 비트의 것이고, 그림은 드 비트 형제의 죽음을 표현한 Jan de Baen(추정)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를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스피노자의 분노를 샀던 드 비트 형제의 죽음.)
그림이 낭만적으로 종교화되다 보니, 스피노자가 느꼈을  참담함이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겠지요.

국립미술관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미술사 도서관!



 

네 개의 층 전체가 책으로 가득합니다.... 뜸향으로 가득한 규문각이 생각났습니다.
거기서 책은 안 읽고 뜸을 뜨며 쿨쿨 자고 있을 규문의 그분들이 그립네요;;
암스테르담의 당일치기 여행은 여기서 마치고, 다시 쾰른으로!

1.성과 속

쾰른은 대성당밖에 볼 게 없다는 사람들도 있고, 대성당만으로 충분하다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중세 고딕의 대표적 양식이네,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네 하는 말들은 다 필요없고요,
그냥 초현실적으로 압도적입니다.(밤에 특히 그렇습니다.)
2차 대전때 불에 그을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니(검은 부분이 그을린 부분이고, 하얀 부분은 보수했거나 세척한 부분이랍니다),
스산하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한 것이...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건축입니다.
최고의 뷰는 구글에 널려 있으니, 저는 그냥 제 느낌에 가장 부합하는 컷 두 장만 올립니다.



 

하나는 맑은 날 오전에, 하나는 종일 비가 내리던 저녁에 찍은 성당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이 다르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다릅니다.
지금은 불타버린,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도 느낌이 아주 많이 다릅니다.
들뢰즈가 '비유기적 생명'이라 했던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도대체 종교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저 압도적 비주얼과 성당을 가득 채운 장식물들과 특유의 냄새... 모두 감각을 극대화하지요.
확실히 종교는 대중의 정서에 호소합니다.
감각의 극단, 파토스의 극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이끌리게 마련이죠.
지혜가 아니라 감각에.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일상이 아니라 기적에.
종교와 예술은 이런 식으로 통합니다.(종교가 없었다면 예술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최소한 지금과 달랐을 겁니다.)
고로, 종교와 예술로는 깨달을 수 없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왜냐. 매혹적이기 때문에,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이지요.
깨달음은 매혹을 넘어서는 힘, 정서와 감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불가능하지요.
스피노자가 왜 종교와 철학을 그렇게 분리해서 사고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요 얘기도 다음 기회에, 다른 지면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 관련해서 사진 두 장만 더 올립니다.
독일 출신 현대작가 중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는 리히터가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한 게 있는데요, 보실까요?



 

제 기기로는 저 정도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만,
구글에 이미지를 찾아보시면('쾰른 리히터'라고 치시면 됩니다) 훨씬 좋은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해가 들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벽에 비치는 빛이 환상적입니다.(화면 왼쪽 벽 빛그림자 보이시죠?)
빛, 그것은 종교의 모든 것이자 예술의 모든 것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이란의 이슬람 사원에서 본 빛의 유희에 비하면,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난 같기도 합니다.^^
높이가 42미터에 달한다는 쾰른 성당의 내부로 들어서면 밖에 있을 때보다 '인간의 초라함'이 더 극적으로 느껴집니다.
하긴, 그러라고 이렇게 지은 것이겠지요. 천국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이래도 안 믿겠느냐, 라고 말이죠.



 

그런데 성당을 나오면 바로 라인강을 따라 왁자지껄한 시장이 펼쳐집니다.
여기 구시장에서는 컬리(?) 같은 것도 하고, 회전목마도 타고, 밤늦게까지 별걸 다 하고 놉니다.
독일의 모든 백인 아재들은 여기 와 있나 싶게, 백인 아재들의 천국입니다. (연주자는 사람 아니고 인형)



 

독일인들은 정말 많이 먹고, 정말 시끄럽습니다.
(파스타 양만 해도 혜화동 디마떼오의 다섯배는 족히 됩니다. 맥주도 기본이 1리터고요.)
아무리 아닌 척 해봐야 '고상'이나 '우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음식만 해도, 대체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면 요리라 할 만한 게 있나 싶게 거칠고 투박합니다.(어딜가나 그놈의 맥주, 그놈의 소세지!)
니체가 그토록 '소식'과 '고요'를 좋아하고 (약간의 와인 정도를 빼면) 술을 싫어했던 게 단박에 이해될 정도입니다.
왜 종교개혁은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우문이지만, 독일의 세속적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니체는 종교개혁을 두고 "뒤떨어진 문화와 정신들의 단호한 항의"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위 사진은 프랑크푸르트 아침 재래시장의 (많고도 많은) 소세지 매장입니다.
독일 티비를 우연히 보다가 소세지 만드는 다큐를 보게 됐는데요, 아.... 봉준호의 옥자는 리얼리티가 전혀 없다고 느껴질 지경입니다.
돼지가 통째로 삶아져서 분해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더 놀라운 것은, 그 프로의 결론이 '이런 식으로 질 좋은 소세지를 생산한다'는 거였다는 사실!
전 육식 비판 다큐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슬픈 반전이었습니다.
그 다큐만 아니었어도, 소세지에 대한 반감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ㅠ.ㅠ
(그니까 혜원아, 입맛 다시지 마...)

2. 여행, 유목, 소요...

이곳 시간을 기준으로 저는 요즘 완벽한 타임라인을 그리고 있답니다.
인시에 일어나(대략 새벽3-4)
묘시에 변을 보고(새벽5시)
진시에 조식을 먹고(아침7시)
해가 떠있을 동안 돌아다니고(9-4)
해지면 들어와 자는(8시~3시)
한국 시간으로 하면 엉망진창이지만, 여기 리듬을 기준으로 하면 완벽한 양생 중입니다.
(이게 양생인지, 시차 부적응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
지금 내 몸은 외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면서 살고 있나 궁금해하다가 문득,
일정한
장소에서 때에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먹는 건, 저주에 가까운 삶이 아닌가...
들뢰즈가 '유목'을 두고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고 했던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유목이란, 한 자리를 점유하면서 어떤 장소를 자기 '집(소유물)'으로 만들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유랑/방황을 일삼는 삶이 아니라는 것.
장자의 '소요'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마음의 정처가 없는 자들은 유목도 소요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붙들리고, 만나는 것마다 구속당하지요.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규문의 소생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만나야 할지, 이 글로벌한 '이동의 시대'에 어떤 식으로 우리만의 '소요'를 발명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지는 밤입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위 조각은  쾰른 성당 기둥에 있는  크리스토포루스 상입니다. 1470 경 조각이라는데, 어린 아이 모습을 한 예수를 업은 크리스토포루스는  등산가·운전사·철도 노동자·짐꾼·여행자(=역마살을 지닌 자들)의 수호성인이랍니다. 합장.


3. 프랑크푸르트의 명암

쾰른에서 한시간 반쯤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에서 2020년을 맞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 미술관을 찾아 헤매는 중에 혜원에게 문자가 오더군요.
새해가 얼마 안 남았는데, 독일은 새해맞이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구요.
그러게? 얘들도 성당에서 제야의 종 같은 걸 막 치고 그러나?
그리고 그날 밤, 알아버렸습니다.
얘들은 개인적으로 폭죽을 어마어마하게 구입해서 자정이 되면 그걸 터뜨리고 놉니다.
자다가 놀라서 창밖을 보니, 도시 전체가 화염으로 가득하더군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총성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쟁터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1시간은 폭죽 소리와 앰뷸런스 소리로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실제로 자동차에 불이 붙거나 사람들이 다치는 경우가 많답니다.)
언제 어디서 폭죽이 터질지 몰라 창을 열 수도 없을 지경이었죠.
오랑캐들 같으니라구...


그래도 이곳 프랑크푸르트에서 채운은 먹을 복이 터지게 됩니다.
뮌헨이 강남같다면, 프랑크푸르트는 (옛날) 종로 같은 느낌이랄까요?
아시안, 히스패닉, 아프리칸 청년들이 하릴없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어쩐지 뮌헨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게다가 낮에는 일식당을 발견해서 우동을 먹고, 저녁에는 한국식당을 발견해서 떡볶이(떡5개)를 먹게 됩니다.
일주일만에 먹은 간장국물과 고추장국물이었죠.
뿐만 아니라, 이날 짐을 챙기면서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누룽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31, 드물게 영업중인 아시안 마트에서 미소된장스프를 구매하는 성공.
이후 쾰른에서는 된장국과 누룽지로 행복 끼를 차렸답니다.
이 상황을 사진으로 음미하시죠!





4. 무상하고 무상하도다 : 민호에게 띄우는 비가


저는 남산에만 '사랑의 자물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한국인들의 집착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아무 맥락없이 '민족성'과 연관시키기까지 했었죠. 쩝.
그런데 그것마저 유럽으로부터 '수입된' 문화였다는 놀라운 사실!
프랑크푸르트에는 아이제너 다리라고, 아담한 마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쾰른에는 호엔촐른 다리라고, 쾰른 성당 바로 앞에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한강철교 같은 다리가 있죠.
눈치채셨겠지만, 두 다리의 공통점은 바로 자물쇠입니다.





위는 프랑크푸르트, 아래는 쾰른입니다.
아.... 현대의 바니타스(헛됨) 정물이 있다면 해골도 물방울도 유리잔도 아니고, 바로 저 자물쇠일 것입니다!
가만 보면,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참 열심히들 산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부디, 세상의  모든 연인들에게 깨달음 있으라!^^
민호야! 사랑은 무상한 거야~~
그 와중에 민호 염장 지르는 샷, 보너스로 추가합니다!





성당이 대단하면 뭐합니까. 성당은 저들에게 그저 들러리일 뿐.
민호야, 부럽니? 부러우면 지는 거다!ㅋㅋㅋ


5. 그리고 미술관들


그림을 화면 이미지로만 접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림을 실견하니 여러 생각들이 듭니다.
호사스러운 고생을 글로 만드는 이번 여행의 목표입니다.
이왕 거니까 부지런히 다니려고 합니다.
제 속도로는 1일 1미술관이 최선이네요.
(그 정도로 콜렉션이 어마어마합니다.)
쾰른에서 본 많은 것들 중에 케테 콜비츠만 잠깐 맛보기 하실까요?
루쉰이 극찬한 목판화는 사진으로 표현이 잘 안 됩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석판화 두 점만 올립니다.
"아이들을 낚아채는 죽음", 그 아래는 "죽음이 친구처럼 느껴지네"입니다.





저녁마다 혈자리를 누르는  꽤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매일 사물환과 사군자환도 복용합니다.^^
채운은 쾰른을 떠나 내일 베를린으로 갑니다.
기차가 어느새 쾰른에 도착했네요. 그럼 이만 총총.

전체 6

  • 2020-01-05 09:59
    부러우면 진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습네다~~ 민호야 글치? ㅋㅋㅋ 암튼 미소된장과 떡볶이와 혈자리 관리와 양생보조식품들로 몸 잘 챙기고 다니시니 퍽 다행입니다. 게다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도 이케 재미나고 알속있는 소식을 간간히 들려주시니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훈훈, 감동입니다. 모쪼록 끝까지 건강히 즐거운 여행하시고 돌아오시길 빕니다~^^

  • 2020-01-05 12:49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부럽지도 않고 성당도 들러리가 아니라 멋있어보이고 자물쇠따위도 부질없어 보인다고요! 오랑캐들 같으니라고... 에효

  • 2020-01-05 20:23
    패키지단체관광 갔다 가이드 제대로(잘못) 만난 기분이랄까요? 여행기 들으러 왔다 강의 듣고 가는 이 늑힘적인 느낌ㅋㅋㅋ 스승님 목소리가 생생히 울리는 것이... 어느 쪽이든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 2020-01-08 13:00
    선생님 ?? 언제?? 앉아서 독일 거리와 미술관까지 활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가끔 음성지원도 되는 것 같아요.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응원합니다.

  • 2020-01-08 17:08
    스승님은 사랑의 자물쇠에서 현대인의 무상함을 통찰하시는데, 저는 저기 높이까지 늘어지게 달아논 자물쇠들을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달았을까만 무척 궁금할 뿐입니다. 내공의 차이란ㅋㅋㅋㅋ 배움이 시급합니다!
    스승님 우중충한 타국서 고생하시는 덕에 저는 뜨뜻한 이불 속에서 채운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 편히 감상하는것 같아 괜히 죄송하네요. 누구든 좋으면 좋은거죠 하하하!

  • 2020-01-11 16:06
    언젠가 잘츠부르크 마카르트 다리에 자물쇠 도배가 되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알아 본 적이 있죠. 허니문으로 유럽을 돌아 볼 때는 자물쇠가 없었거든요. 물론 당시 연애 시절에 많이 올라갔던 남산 위에도 자물쇠는 없었지요. 남산에 첫 커플이 자물쇠를 단 것이 2006년이라고 해요. 서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먼저 시작된 것은 맞아요. 사람들이 너도 나도 동참하게 된 건 2008년 TV에서 방송된 이후. 유럽에서는 퐁네프 다리에서 이게 시작되었다고, 여기저기 다리를 중심으로 소위 "love padlocks" 열풍이 시작되었죠.

    공통적인 것은 Federico Moccia의 <너를 원해(Ho voglia di te)>라는 소설이 인기를 얻으면서 소설 속의 장면인 "love padlocks를 매달고, key를 강에 던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이 유래라는 것인데, 아마 우리나라의 커플도 이 소설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겠습니다. 유럽에서 이 리츄얼이 생긴건 2008년 쯤이라고 하네요. 퐁네프 다리가 자물쇠 무게에 못이겨 무너지는 곳이 생기면서 철거된 것은 2014년.

    오랜만에 이런 저런 옛날 기억이 떠오르네요~ 건강하게 돌아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