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12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0-08 20:25
조회
442
지난 시간에는 세 번째 고원 “도덕의 지질학”을 전 시간에 이어 탐사했습니다…… 만은, 뭐랄까요, 앞으로 다른 챕터들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더 이해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ㅜ
곁지층, 밑지층, 웃지층 하는 소리에 멀미가 나고, 내용과 표현으로 이중분절된다는 게 뭔 소린지, 게다가 추상기계는 또 무언지, 수업을 듣고 돌아서니 다시 개념들 사이를 헤매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지요. (저만 그런가요, 그런 건가요...;)

암튼 개념들 하나하나를 다 씹어 먹진 못하더라도 이번에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지층의 사유’라는 이 듣도 보도 못한 렌즈가 어떤 지점에서 새롭게 세계와 인간을 비춰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채운쌤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볼까요. 지층의 사유를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론적으로 같은 지평에 있음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기계권 안에서 끊임없는 분절이 낳은 효과로서의 지층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것, 인간이 외따로 높은 권역에(가령 ‘정신권’ 같은) 존재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
저자들이 지구를 거대한 하나의 알, CsO라고 했을 때 그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형식이 부여되기 전의 질료들이 흐르는 동일한 평면에서, 그곳에 내재하는 힘에 의해 분절과 공명이 일어나 지층화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상이한 지층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꺾이고 서로 질료를 교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동일한 평면 위에서 생성된다는 것.

<앙띠>에서도 주의했던바, 저자들은 결코 생명과 비생명, 자연과 기계,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관계를 도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질적인 것과 접속함으로써 기존의 영토에서 이탈하고 코드를 탈각하는 것, 배치에 따라 새롭게 작동되고 생산되는 것,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성질이니까요.
인간이든 담비든, 구름이든 슬픔 혹은 고통이든, 모든 것은 접속에 의해 생겨나고 노쇠하고 소멸합니다. 그런 한에서 모든 것이 실상 생명이라 할 수 있고, 같은 말이지만 모든 것이 기계라고 할 수 있지요.

조금 전 성층화는 내재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요,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이게 아-아-주 중요합니다.
<차이와 반복>를 떠올려보면 들뢰즈는 차이의 반복이 곧 생성이라고, 스스로 차이화하는 힘이 존재함으로써 그것의 반복을 구조화할 수 있다고 했었지요.
선차적인 것이 차이라는 주장이 여기 <고원>에서는 탈코드화의 여백이라는 묘한 단어로 표현됩니다. 지층이 되는 것, 코드화되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탈영토화, 탈코드화입니다.
코드화된 것이 끊임없이 코드로부터 벗어나는 것, 코드를 흘러넘치는 것, 채 분절되지 않고 흐르는 것, 그것이 틈처럼 항존한다는 거예요.
바로 그 여백으로 하여 지층은 설사 겉으로는 굳어지고 고착된 것처럼 보여도 실상 한시도 같은 자리에 멈춰 죽어 있을 수 없습니다.
흘러넘침이라는 이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구조화되기 전, 지구 위를 맹렬히 흐르는 질료로 볼 수 있지요.
질료가 분절되어 지층이 되는 것, 그것은 바깥에서 질료를 주무르는 손과 법칙에 빚지는 것이 아니라, 질료 그 자체가 가진 힘에서 비롯됩니다.

언어학자인 옐름슬레우의 표현을 가져와 말하자면 질료는 끊임없이 분절되고, 내용과 표현이라는 이중 분절을 통해 지층화됩니다.
하지만 지층은 한 번 굳어지고 꺾였다고 해서 영원히 같은 모양새로 있지 않아요.
다른 지층과의 소통을 통해, 내용과 표현 상의 역동적 배치가 지구라는 평면 위에서 쉼 없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소통을 가능케 한 것, 그것이 CsO 안에 내재된 힘입니다.

이를 통해 격파된 서구의 굳건한 사유들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요. 오랜 전통을 자랑(?)라는 물질-정신이라는 이원론, 맑시즘, 그리고 구조주의랍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했다는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실재를 실재로서 보고 받아들이고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했다는 코멘트를 들으며, 수업 중 느닷없이 움찔하게 되더군요. -_-

암튼, 들뢰즈+가타리는 지층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명칭들을 엄청 붙이고 있는데 그 중 밑지층과 곁지층이 좀 중요한 것 아닌가 싶었어요.(아닐 수도;;;)
모든 지층은 자신의 밑지층 내지 하부지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층의 지층에게 질료를 공급한다는 면에서 외부환경으로서 중요하지요.
물론 외부환경은 지층 바깥을 지칭하는 것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외부환경이 결국 특정한 지층의 내부를 형성하기 때문.
그러니까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도 그것들이 서로 내재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곁지층. 이 경우는 하나의 지층에 대해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지층들로 곧 연합된 환경이 됩니다. 곁지층 간의 쉼 없는 작용으로 지층은 확장되고 이동한다고 해요.

<감시와 처벌>의 틀을 이 구도로 다시 읽은 게 인상적이지요. 푸코가 서구 근대 사회를 의학, 사법, 가족 등의 체계를 통해 읽어내고자 했던 것을 <고원>은 지층의 내용과 표현으로서 번역합니다.
가령 현대사회의 법률체계는 내용으로는 감옥이라는 형식과 수감이라는 실체를 갖고, 표현으로는 형벌이라는 형식과 범죄라는 실체를 갖습니다.
현대사회의 의료체계는 정신병원이라는 내용의 형식 및 수감이라는 내용의 실체를 갖고, 정신병리학이라는 표현의 형식 및 행위라는 표현의 실체를 갖습니다.
채운쌤 설명을 가져와서 보면 이때 층화된 각각의 지층이 가족, 의료, 범죄 등등이 됩니다. 그리고 이 지층들이 서로에게 곁지층이 되어 서로 질료를 교환한다고 하죠.
그러니까 어떤 이데올로기가 선재해서, 혹은 컨트롤타워의 효율적 지휘체계가 있어서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고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각각이 상이한 경험에 따른 집합적 배치물에 의해 지층화 되지만, 그와 동시에 지층들 사이에도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이 특정 사회의 에피스테메로 드러난다는 것. @.@
추상기계를 이를 가지고 이해할 수 있다고 채운쌤께서 하신 말씀이 얼핏(!!) 기억나는 것도 같고……. 저자들에 따르면 “기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표로 작용하는” 것이 추상기계라고 하는데, 이와 연관해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부분은 또 들을 날이 오겠죠ㅋㅋ 목차를 보니 “얼굴성” 챕터에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라는 항목이 있네요^_^

자, 암튼 희미해진 기억에서 그나마 추출해낸 것은 이와 같습니다. 나머지는 후기 담당인 건화군이 잘해내리라 믿으며, 저는 이만 >.<
다음 시간에는 4장 “언어학의 기본전제들” 읽어 오심 됩니다. 간식은 공지원+채영님 쌤.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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